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70)
유령처럼 나타난 한서진.
료칸에 맞게 유카타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에리와 마코토가 흠칫한다.
“히익!”
“우,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한서진 씨!”
찰싹.
에리와 마코토가 서로 끌어안으면서 떤다.
한서진의 회색 눈동자가 두 사람을 응시한다.
“이미 다 봤습니다.”
흠칫.
에리와 마코토의 표정이 굳는다.
이미 다 봤다니.
혼욕이라는 파렴치한 일을 모의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아닌 김덕성을 보좌하는 한서진에게 들켰다니.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에리와 마코토였다.
“그, 그건요. 한서진 씨······.”
에리가 말끝을 흐리며 변명을 시도한 순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한서진이 에리의 말허리를 자른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
에리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저는 여러분을 탓하려고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지금은 대욕탕에 여러분 이외에 다른 여생도들도 들어가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바꾼다면 다른 여생도들 때문에 혼욕이 불가능할 확률이 높습니다.”
한서진이 조목조목 차분하게 말한다.
하렘 계획의 기획자로서, 혼욕은 지적이 아닌 오히려 장려 사항에 가깝다.
히로인들과 김덕성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추후 하렘 계획이 공식화될 때 잡음이 없어질 테니까.
“즉, 하려면 제대로. 다른 여생도들이 없고, 김덕성님이 들어오기 직전 타이밍에 팻말을 바꿔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름 학교에서 샤워장 팻말을 바꿨을 때처럼.
한서진이 뒷말을 삼켰다.
그때의 공작 타깃은 아리스.
아리스가 들어가기 직전 타이밍에 팻말을 몰래 바꾸기 위해 잠복했던 해변 샤워실 근처에서 기억이 한서진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과연······. 역시 한서진 씨!”
“대단해······!”
한서진의 말을 들은 에리와 마코토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두 사람이 양 주먹을 불끈 쥔다.
비록 영웅은 아니지만, 유능한 커리어 우먼인 한서진은 그녀들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
“이해한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그럼 온천욕을 즐겨주시길.”
한서진이 고개를 숙인 그때.
“우리끼리 즐길 수는 없지! 한서진 씨도 같이 가자!”
덥석.
에리가 한서진의 팔목을 잡는다.
“응! 나도 한서진 씨랑 같이 온천욕 하고 싶어.”
반대편 팔목을 잡는 마코토.
그 모습을 본 한서진의 회색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는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김덕성과 하렘 계획.
하렘 계획의 성공적인 진행과, 나아가 그분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는 하렘 계획의 대상자인 에리, 마코토와 친분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들의 제안에 응하는 게 좋다.
한서진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났다.
“좋습니다. 함께 온천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았어!”
“한서진 씨랑 온천욕······!”
한서진의 말이 끝나자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대욕탕 안으로 끌고 가는 에리와 마코토.
김이 피어오르는 대욕탕 입구 안으로 한서진과 마코토, 에리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니시시시.”
웃음소리와 함께 빨강과 검정 투톤 사이드테일이 인상적인 미소녀, 쿠로사와 하루가 유카타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시야에 팻말이 보인다.
‘이 세상의 법칙에 따르면 입욕 시간을 바꾸면 주인공이 욕탕 안에 들어오는 것이 클리셰였지? 니시시시. 그럼 하루가 입욕 시간을 바꾸면 덕성 오빠랑 같이 혼욕할 수 있겠지?’
흠흠.
하루가 속으로 자화자찬하면서 팻말 향해 손을 뻗다가 멈칫한다.
‘그런데 덕성 오빠가 언제 올지 어떻게 알지?’
그가 욕탕에 오는 시간을 모른다면 바꿔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살짝 고민에 빠진 하루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스윽.
하루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꾹꾹꾹.
그녀가 스마트폰을 터치해서 메시지를 보낸다.
[오빠. 덕성 오빠 오면 대욕탕으로 보낸 뒤에 연락줘]하루가 문자를 보낸 상대는 김덕성과 같은 방을 배정받은 유지.
[응? 왜?]유지의 답장이 곧바로 돌아온다.
[이유는 알 필요 없어] [하라면 해] [바보 오빠 같으니]하루가 손가락을 놀려 메시지를 빠르게 보낸다.
[알았어······.]되돌아오는 답장.
그 답장을 본 하루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니시시시······.”
타이밍을 알았으니, 이제 남은 건 팻말 바꿔치기뿐이다.
*
주간 관광이 끝나고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전통 숙박시설인 료칸.
실제 벳푸시에는 없는 료칸이었지만, 애니메이션이 방영된 뒤에 아예 컨셉을 가지고 새로 료칸을 지어서 제법 인기몰이를 했다는 소식을 커뮤니티에서 본 적 있다.
거기 직접 다녀온 성지순례 후기가 인기글로 가기도 했고.
시야에 애니메이션이랑 후기글로 본 것과 정확히 똑같은 료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실제 현실 세계와는 다르게 캐릭터 등신대는 없었지만.
아무튼 나는 같은 조였던 린, 에반젤린, 베아트리체와는 당연히 성별이 달랐기 때문에 같은 방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나와 같은 방을 배정받은 남생도는 유지와 이시하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통해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갔다.
드르륵.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간다.
“김! 조별 관광은 잘 즐겼어?”
“오셨음까? 형님!”
다다미방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날 맞이한다.
유지와 이시하라였다.
와그작.
유카타를 입은 두 남정네가 탁자 위에 놓인 차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 뒤로는 발코니와 욕실이 보인다.
탁.
캐리어와 배낭을 방에 내려놓는다.
옷걸이에 유카타가 걸려 있다.
아마도 내 몫인 모양.
그런데 료칸에 오면 유카타 입는 건 국룰인가? 그냥 다른 옷 입으면 안 되나?
묘한 의문을 품으면서 옷을 벗고 유카타로 갈아입은 뒤에 과자를 열심히 축내고 있는 유지와 이시하라 앞에 앉는다.
“너희 씻었냐?”
료칸에서는 다과를 기본으로 비치해두는 건가?
모텔에서 기본 비치하는 음료수가 생각난다.
와그작.
과자를 입에 넣는다.
맛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네, 씻었슴다.”
“응.”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지와 이시하라.
“염병······.”
과자를 씹어 삼킨다.
여기 대욕탕도 당연히 라노벨 세상답게 남탕과 여탕의 구분이 없을 게 분명하다.
“아직 남생도 입욕 시간이라던데? 김 군.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유지가 살짝 어색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직 입욕 시간이라고?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즐기는 제대로 된 온천이다.
놓치고 싶지는 않다.
“그래? 그럼 지금 가야지. 다녀올게.”
“잘 다녀와!”
“다녀오십쇼!”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면서 방을 나선다.
그런데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
탁.
방문이 닫힌다.
“후우.”
유지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타닥타닥.
유지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김 군 방금 나갔어]그가 메시지를 보낸 상대는 하루.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빠르게 읽음 표시가 뜬다.
[알았어! 고마워 오빠!]되돌아오는 형식적인 감사 인사.
메시지를 읽은 유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힘내. 하루.’
한때 소꿉친구인 린을 응원하기도 한 유지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하루가 그를 좋아하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유지의 마음은 하루 쪽으로 좀 더 기울어졌다.
게다가 김덕성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남자.
다른 남자라면 모를까 그라면 여동생과의 관계를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환영이었다.
기왕이면 여동생이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졌으면 좋겠다.
유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과자를 씹던 그때.
번쩍.
섬광과 함께 찰랑거리는 흑발 히메컷 미소녀가 등장한다.
쿠사나기였다.
“어머. 마스터. 아가씨와 그 남자를 엮어줄 생각인 건가요?”
불쑥.
쿠사나기의 예쁜 얼굴이 유지의 휴대폰을 향한다.
“아, 어?! 으응······.”
유지가 화들짝 놀란다.
“하루는 소중한 여동생이지만, 그와 이어진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어. 하루도 김을 좋아하고 있고······.”
유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한다.
“형님이라면 저도 찬성임다!”
옆에서 이시하라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한다.
그 모습을 본 쿠사나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쿠사나기의 눈빛이 반짝인다.
‘어쩌면 그 남자를 마스터 곁에서 떨어뜨릴 방법을 찾은 걸지도?!’
그 남자를 하루와 이어준다면.
더 이상 마스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판단을 내린 쿠사나기가 유지의 곁에 찰싹 달라붙는다.
“좋아요! 그럼 이 쿠사나기도 마스터를 도와 아가씨와 그 남자를 이어주는 걸 돕도록 하겠어요!”
“정말? 고마워!”
쿠사나기의 답변을 들은 유지의 얼굴에 순수한 미소가 떠오른다.
와삭.
그 모습을 보던 이시하라가 과자를 깨문다.
김덕성이 방을 나간 뒤에 있던 일이었다.
*
방을 나온 나는 대욕탕을 향해 걸었다.
흑태자가 깃든 듀랜달은 방에 놔두고 왔기 때문에, 오랜만에 흑태자 목소리 없이 혼자다.
솔직히 온천욕까지 흑태자랑 같이 하고 싶지는 않다.
원래 고급 료칸에는 방마다 작은 노천탕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 료칸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온천욕을 하려면 무조건 대욕탕에 가야 했다.
이게 전부 온천 럭키 스케베를 위한 편의주의적 설정이다.
문제는 내가 그 편의주의적 설정에 당하고 있는 처지라는 것이다.
‘여기가 대욕탕이로군.’
뜨거운 수증기가 새어 나오는 욕탕 입구가 보인다.
입구 앞에 있는 팻말을 보니 확실히 지금은 남생도 입욕 시간.
‘정말 남생도 입욕 시간일까?’
순간 의심이 든다.
남자 여자 목욕시간이 외적 요인으로 인해 바뀌는 바람에 주인공이 욕탕 안에서 히로인들과 마주치는 건 라노벨 세상의 국룰을 넘어 절대 법칙.
당연히 원작에서도 나오는 전개다.
자리에 멈춰선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안 씻기도 좀 그런데.’
지금 안 씻으면 저녁 먹고 심야 시간에 다시 욕탕이 열릴 때 씻어야 한다.
그런데 그때까지 안 씻고 그냥 있기에는 몸이 찝찝해서 안 된다.
일단 못 먹는 감이라도 찔러 봐야 한다고, 들어가서 확인은 해 봐야 한다.
결단을 내린 나는 김이 자욱한 대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어 로커 안에 넣고는 목욕탕 문을 연다.
맑은 하늘 아래, 애니메이션에서나 봤던 커다란 노천탕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건.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수많은 여생도였다.
‘염병.’
혹시나가 역시나였나?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다.
“더, 덕성······! 덕성인가······!?”
귓가에 가장 먼저 들린 건 린의 목소리.
애니메이션처럼 쓸데없이 뿌연 김이 온통 노천탕을 가득 채운 덕분에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과연 린답게 물안개 너머에서도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굴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주인님! 주인님 온 거야?”
“주군! 으으으······. 부끄러워······.”
“뭔가요?! 다, 다다다다당신이 어떻게?!”
뒤이어 에리, 마코토,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씻는 건 글렀다.
내가 한숨을 쉬며 나가려고 한 그때.
쪼르르르······. 딱!
온천편 애니메이션에서도 나온, 시시오도시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환장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