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72)
에반젤린이 눈을 비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하와와. 시노자키 공이로군요. 무슨 일로 소녀를 찾은 것이와요?”
시노자키 린의 눈에 에반젤린이 보인다.
린 본인과 에반젤린의 관계는 친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여름 학교 때 같은 조였던, 서로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터였다.
‘하지만 내게는 빚이 있다.’
그러나 린은 에반젤린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빚이 있었다.
지금까지 여자력, 특히 처참할 정도로 끔찍한 요리 실력 때문에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했던 그녀였다.
그런 린의 요리를 처음 칭찬해준 사람이 에반젤린이었다.
[무척 맛있사와요! 역시 시노자키 공! 한식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것이와요!]린의 머릿속에 그날, 무인도에서 자신의 김치찌개를 먹고 칭찬하던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별것 아닌 칭찬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린에게는 좋은 기억을 넘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할 말이 있다.”
“어, 어떤 할 말인 것이와요?”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떨린다.
덥석.
린이 에반젤린의 양손을 잡는다.
린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스튜어트 양은 충분히 매력적인 레이디다. 적어도 하루보다는 훨씬. 하루 말처럼 절대 몰개성하지 않아. 그런데 우리가 은인이라는 이유로 우릴 배려하면서 지금처럼 어영부영 뒤에서 관망하다가는 스튜어트 양이 연모하는 덕성한테 매력을 어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린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스튜어트 양은 지금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조금 더 자신을 생각할 필요가 있어.”
린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에반젤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하얀 뺨이 살짝 떨린다.
“······시노자키 공. 그 정도는 소녀도 알고 있사와요.”
에반젤린이 가슴팍의 옷깃을 움켜쥔다.
에반젤린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녀라고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에반젤린은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시노자키 공을 비롯한 여러분은 소녀와 조국의 은인인 것이와요. 함부로 대할 수 없······.”
“스튜어트 양. 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건 배려도 호의도 아니야.”
린이 에반젤린의 말을 잘라낸다.
“똑같은 조건에서 다른 라이벌과 함께 경쟁하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보나파르트 양도, 빨래판도, 카미야 양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배려야말로 정정당당한 레이스를 방해하는 반칙 행위지.”
린의 말을 들은 에반젤린이 입을 다문다.
그녀의 입술이 떨린다.
에반젤린도 사실은 스스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금사빠’라고 욕해도 좋다.
처음에는 별거아닌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구원받았다는 것, 그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 연모의 마음이 이제는 지울 수 없을 만큼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에반젤린이라고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서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다.
그 나이대 소녀와 같은 욕망이 그녀의 마음속에도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 욕망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필 연적이 자신과 조국을 구해줬던 은인들이었기 때문에.
은인에게 질투해서 폐를 끼칠 수 없으니까.
그랬었는데.
에반젤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소녀가 그렇게 해도, 여러분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와요?”
에반젤린의 시선이 린을 향한다.
“그렇다. 스튜어트 양. 그것이 오히려 나, 다른 사람, 그리고 스튜어트양 본인의 마음을 존중하는 길이다. 이제부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라.”
린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
에반젤린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뺨이 파르르 떨린다.
그렇게 해도 된다.
무의식적인 욕망을 긍정한 순간, 지금까지 애써 억제했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도 된다면.
나도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
결정을 내린 에반젤린이 고개를 든다.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한다.
“······시노자키 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좋사와요. 그렇게 하겠사와요!”
그 모습을 본 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기분이었다.
“아, 그리고 하루의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원래 성격이 좀 그런 아이니까 말이다.”
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10년 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린은 하루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한 신조어 말투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건방진 성격은 여전했다.
“······정 마음에 걸린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지.”
“아니, 아니에요! 신경 안 써도 되는 것이와요!”
린이 고개를 숙이자 에반젤린이 손사래를 친다.
“시노자키 공이 대신 사과할 필요는 없사와요! 소녀는 괜찮사와요. 그리고 무엇보다······.”
에반젤린이 말끝을 흐린다.
“사과는 본인이 직접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하긴, 그것도 그렇지. 그럼 그 부분은 내가 하루한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그럼.”
린이 에반젤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힘낼 수 있도록. 스튜어트.”
“알겠사와요!”
린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는 에반젤린의 얼굴이 한결 가벼워진다.
마음의 짐을 덜어놓은 듯 후련한 기분.
‘좋았어요! 시노자키 공의 응원도 받았으니 지금부터는······. 보, 본격적으로 김덕성님과······.’
머릿속에 김덕성의 모습을 떠올린 에반젤린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뛴다.
본격적으로 매력을 어필할 거라는 다짐을 한 순간부터, 스스로의 마음을 더 이상 억누르지 않겠다고 결심한 다음부터.
그녀의 심장은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하와와와······. 어쩌면 좋을까요······.”
에반젤린이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구르던 그때.
“에반젤린 언니.”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젤린이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검정 빨강 투톤 사이드테일 미소녀, 하루가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장난기가 없는 얼굴.
하루의 빨간 눈동자가 에반젤린을 향한다.
“그······. 그러니까 아깐 초 미안! 하루가 잘못했어······. 그,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하루가 머리를 긁으면서 어색하게 웃는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하루가 워낙······. 아니야. 변명 안 할게! 심한 말 해서 완전 미안!”
착.
하루가 고개를 숙이며 합장한다.
그 모습을 본 에반젤린의 얼굴이 묘해진다.
“시노자키 공의 말을 듣고 소녀한테 사과하러 온 것이와요?”
“린 언니? 아니 아니. 린 언니랑 만난 적 없는데? 하루 온천욕 끝내고 바로 온 거야.”
하루가 고개를 젓는다.
에반젤린이 턱을 매만진다.
린이 사라지자마자 하루가 등장한 걸 보면, 두 사람이 만날 물리적인 시간은 부족했을 것이다.
바로 온 거라는 하루의 말에는 신빙성이 있다.
“확실히 사과하고 있는 것이와요?”
“응! 진짜 미안! 니시시시······.”
하루가 멋쩍은 듯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다.
그런 하루의 모습을 본 에반젤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하루는 그녀보다 두 살이나 연하인 소녀인 것이다.
“좋사와요! 이번 한 번만큼은 특별히 소녀가 아량을 베풀겠사와요!”
한 번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다.
에반젤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완전 고마워! 에바 언니!”
와락.
하루가 에반젤린을 끌어안는다.
얼떨결에 그녀의 품에 안기게 된 에반젤린.
그녀가 하루를 품에서 떼어내면서 말한다.
“그리고 소녀는 절대 몰개성한 사람이 아닌 것이와요! 앞으로 김덕성님 앞에서 증명해보일 것이니 쿠로사와 양도 각오하는 것이와요!”
에반젤린이 허리에 손을 얹으면서 우쭐한 표정으로 말한다.
“헤에?”
그 모습을 보던 하루가 웃는다.
“니시시시. 좋아. 에바 언니의 도전, 하루는 언제든지 완전 받아줄 준비 됐어.”
“두고 보는 것이와요!”
하루에게 선전 포고 아닌 선전 포고를 날린 에반젤린이 발길을 돌린다.
마음은 정했다.
이제 남은 건 행동뿐이었다.
*
제대로 된 온천욕을 끝내기도 전에 온천에서 쫓겨난 뒤.
숙소로 향하던 내 귓가에 들린 건 탁구공 튀는 소리였다.
탁, 타닥.
료칸 탁구장.
유지와 이시하라가 유카타를 입은 채 탁구채를 들고 탁구 치는 모습이 보인다.
탁구공이 허공에 튀어 오른다.
아니 근데 왜 료칸에만 오면 다들 탁구 치지?
료칸 공식 스포츠인가?
“꺄아아아아! 이시하라 님! 너무 멋있어!”
“쿠로사와 군도 멋있지 않아? 잘 생겼는데?”
“쿠로사와 군 진짜 왕자님 같아!”
탁구대 근처에는 엑스트라 여생도들이 구름처럼 몰려서 유지와 이시하라의 탁구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시하라야 원작에서도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유지 역시 나와는 다르게 잘생긴 외모 때문에 최근 인기가 올라간 모양.
누구는 왕자님인데 누구는 귀축이라니.
염병할 라노벨 세상 같으니.
아무튼 굳이 아는 척해봐야 좋을 건 없다.
내가 그렇게 모르는 척 지나가려던 그때.
“어라 형님?”
“김!”
타닥.
탁구공 소리가 멎더니 이시하라와 유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와 함께 엑스트라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한다.
“꺄아아악! 검은 귀축이야!”
“검은 귀축이라고? 진짜잖아?”
“아까 여자애들이 입욕 중인 노천탕에 거침없이 들어왔다며?!”
“몸이 그렇게 대단하다던데?”
이제는 당연할 정도로 따라붙는 엑스트라들의 만담.
내가 욕탕에 들어간 소문은 또 언제 저렇게 퍼진 거야?
돌겠네.
여기서는 그냥 무시하는 게 맞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일단 탁구장 근처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엑스트라들의 웅성거림을 피해 도착한 곳은 료칸 홀.
자판기와 테이블, 탁자가 구비되어 있는 여기에는.
“끄으으응······.”
자판기에서 뽑은 걸로 보이는 라무네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베아트리체가 있었다.
쟤는 라무네 가지고 대체 뭘 하는 거지?
“이건 대체······.”
베아트리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히끅!”
그녀가 소스라치듯 놀란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의자에 앉은 내가 베아트리체에게 말을 건다.
“왜 그러고 있냐?”
“따, 딱히 자판기라는 기계에서 구입한 이 독랄한 음료수병을 따는 법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었느니라! 홍련의 성녀인 여가 이깟 음료수병 따위에 굴복할 것처럼······.”
누가 봐도 라무네 병 따는 법을 몰라서 저러고 있는 거다.
하긴, 라무네 처음 보면 이걸 대체 어떻게 따서 마셔야 하는지 좀 난감하기는 하지.
“줘 봐.”
“여는 이런 하찮은 시련 따위에 결코 굴복하지······.”
내 말에 베아트리체가 얼굴을 붉히면서 라무네 병을 품 안에 끌어안으며 말한다.
“먹기 싫으면 말고.”
“······않지만, 때로는 하등한 인간한테 여가 겪는 위대한 시련의 편린이나마 경험시켜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홍련의 성녀를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인간이여.”
베아트리체가 중2병 멘트를 늘어놓으며 내게 라무네를 건넨다.
베아트리체에게 받아든 라무네의 뚜껑을 눌러서 구슬을 병목에 떨어뜨린 순간.
-치이이이익!
탄산 거품과 함께 라무네가 폭발하듯 튀어오르며 유카타와 손에 끈적끈적하게 묻는다.
뭐야.
이거 설마 흔든 거냐?
이러면 진짜 씻으러 가야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