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75)
화
뚝, 뚝.
끈적한 탄산이 몸에 묻는다.
안 그래도 제대로 못 씻어서 찝찝한 상황에 탄산까지 끼얹어지다니.
불쾌지수가 확 올라간다.
“야, 너 이거 설마 일부러 흔든거냐?”
탁.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라무네를 내려놓으며 베아트리체에게 말한다.
“히끅! 아, 아니에요오······. 그, 그럴 의도는 맹세코 절대 없었는데······.”
베아트리체가 딸꾹질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내 화난 얼굴 때문인지 중2병 코스프레도 집어치운 말투.
베아트리체가 이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다.
그녀를 믿는 게 아니라, 상냥한 라노벨 세상의 법칙을 믿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에휴.”
한숨을 쉰다.
그래 뭐 실수할 수도 있지.
내가 소인배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화낼 필요는 없다.
상대방 잘못도 아니고.
나는 그 정도로 뻔뻔한 철면피가 되지 못한다.
뚜껑 열린 라무네를 그녀에게 건넨다.
“그래. 다음부터는 이런 탄산음료 뽑을 때 안 흔들리게 조심해라.”
“네, 네! 알겠어요오······.”
라무네를 받아든 베아트리체가 조심스럽게 라무네를 꿀꺽꿀꺽 마신다.
하, 근데 몸은 어쩌지.
저녁 먹기 전에 어떻게든 씻어야 하는데.
숙소 욕실에서 샤워해야 하나.
거기서 샤워하기에는 좀 그런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던 그때.
번개처럼 머리에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야.”
“네, 네?!”
“너희 목욕 시간 끝났냐?”
원래는 한밤에 대욕탕을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여생도 대다수가 목욕을 마친 지금이라면.
어쩌면 빈틈을 노려서 아무도 없는 노천탕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여생도 입장은 입욕 시간 팻말 바꾸기로 차단하면 된다.
‘대체 누가 팻말을 바꿔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라노벨 세상의 편의주의적 법칙에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내가 이용하겠다.
내 말에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네. 아니. 흠. 그래. 여가 가장 마지막에 나왔느니라. 인간의 온천 따위는 별로 즐기지 않는 주의였지만······.”
“아 그래? 알았다. 정보 고마워.”
필요한 정보는 전부 얻어냈다.
이제 남은 건 온천욕뿐이다.
나는 끈적끈적한 손을 끌어안고 대욕탕으로 향했다.
*
“가버렸군.”
떠나버린 김덕성의 뒷모습을 보면서 베아트리체가 라무네 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김덕성.
그에 대한 베아트리체의 마음은 아직 제대로 정해진 게 없었다.
처음에는 그를 이용하려 접근했지만, 거꾸로 그에게 당했다.
이후 상호 협력 관계가 되었고, 그에게 마음을 털어놨었다.
거짓된 관계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모닥불 앞에서 구운 마시멜로를 나눠 먹기도 했었다.
“그때 먹은 마시멜로······. 그런대로 괜찮았었지. 흠흠. 인간의 음식치고는······.”
베아트리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는 지금이 좋았다.
교단에 있을 때보다, 위장 신분이지만 학원에 다니는 지금이 좋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호의로 자신을 대해주는 에반젤린도 좋았다.
가능하면 이 세월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베아트리체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라? 트릭시 양? 숙소에 없더니 여기 있으셨군요!”
그때.
베아트리체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풍성한 분홍 트윈테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미소녀.
에반젤린 스튜어트였다.
“계약자여. 여를 직접 찾아오다니 그대의 충심이 갸륵하구나.”
“못 찾아서 조금 걱정했었사와요. 혼자서 함부로 아무 데나 가서는 안 되는 것이와요.”
덥석.
에반젤린이 손을 잡는다.
베아트리체의 기프트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에반젤린의 마음이 베아트리체에게 흘러들어온다.
말한 것과 똑같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
교단의 심처에 갇혀 있을 때 교단의 신도들에게 느끼던 것과는 다른 따뜻한 마음을 느끼면서 베아트리체가 웃는다.
“여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여의 충복이여.”
“하와와와······. 트릭시 양. 혹시 김덕성님 못 보셨어요?”
되돌아온 에반젤린의 질문.
“흠. 그 인간이라면 방금 여한테 대욕탕에 사람이 있는지 물어본 뒤에 없다는 대답을 듣고 떠났느니라.”
에반젤린의 질문에 베아트리체가 친절하게 답한다.
대욕탕, 사람 없음, 떠났다.
세 개의 키워드가 에반젤린의 머릿속에 조합된다.
대욕탕에 들어왔을 때 당황하고 아쉬워했던 김덕성의 얼굴도.
‘김덕성님께서는 지금 대욕탕으로 향한 것이 분명한 것이와요!’
에반젤린의 머릿속에 김덕성의 목적지가 떠올랐다.
그는 대욕탕으로 갔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마 자신 혼자뿐.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호, 혼욕······.’
화악.
에반젤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뛴다.
하지만 후발 주자인 그녀가 치고 올라오기 위해서는 과감한 한 수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혼욕 같은.
에반젤린이 입술을 깨문다.
‘조, 좋아요······!’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쥔다.
“트릭시 양. 정보 고마운 것이와요! 저는 이만 가보겠사와요! 숙소에 꼭 잘 들어가셔야 해요!”
에반젤린이 웃으면서 베아트리체에게 인사를 남긴 뒤에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보던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중얼거린다.
“그 남자도 그렇고 계약자도 그렇고······. 오늘 무슨 날이라도 되는 것인가.”
라무네와 함께 홀로 남은 베아트리체의 말이 료칸 홀을 맴돈다.
*
예상대로 대욕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와는 달리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나는 빠르게 욕탕 입구 팻말 입욕 시간을 변경한 뒤 옷을 벗고 노천탕 안에 몸을 담궜다.
“으으으······. 시원하다······.”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온천물이 온몸을 감싼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이 보인다.
벌써 노을도 지고 이제 저녁인 모양.
가을에 접어들어 제법 차가워진 밤공기와 따뜻한 온천물이 만나니 제법 괜찮다.
방금까지 라무네 때문에 끈적끈적한 불쾌감을 느꼈던 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쪼르르르, 딱.
오늘만큼은 저 빌어먹을 시시오도시 소리도 감미롭다.
이래서 다들 온천온천 하는 거구만.
심지어 드넓은 노천탕을 나 혼자 쓰니까 해방감이 장난 아니다.
나 혼자 온천 독식 최고다.
좀 이따 심야에 대욕탕을 개장할 때 다시 또 와야겠다.
‘가이세키 요리에서는 뭐가 나올지 기대되는구만.’
료칸 하면 일본식 코스 요리라는 가이세키 요리 아닌가.
공짜로 가이세키 요리를 먹어보다니.
라노벨 세상이 엿 같기는 하지만 이런 건 또 좋다.
그렇게 느긋하게 눈을 감고 있던 그때.
“하와와와와······.”
귓가에 헛소리가 들린다.
하와와라니.
잘못 들었겠지.
“김덕성님······?”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내가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뜬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익숙한 미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물에 젖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분홍색 트윈테일.
수건 한 장으로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감싼 미소녀.
국뽕 불닭 애기븝미 에반젤린 스튜어트였다.
아니 네가 왜 여기 있냐?
당황스럽다.
아니 분명 앞에 팻말을 바꿔놨을 텐데? 설마 그걸 무시하고 들어온 건가?
“너 왜 여기 있냐?”
“그, 그건······.”
내 질문에 당황하는 에반젤린.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가 떨린다.
“······트릭시 양한테 정보를 얻었사와요.”
트릭시? 베아트리체?
그녀에게 내가 온천욕을 하러 간다는 이야기는 안 하긴 했다.
하지만 트릭시와 나 사이에 나눈 문답 내용에서 내가 대욕탕으로 향할 거라는 사실 자체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사실.
하지만 추측이랑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일이다.
만에 하나 내가 욕탕에 안 갔다면 에반젤린은 헛걸음을 했을 테니까.
거기다가 남자 입욕시간이라는 팻말까지 무시하고 들어온 게 아닌가?
라노벨의 법칙을 깨뜨린 히로인이라니.
머리가 아프다.
얘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와서 내보내는 것도 좀 그렇다.
그럼 내가 나가야 하나? 아직 온천도 다 못 즐겼는데.
좀 아쉬운데.
거기다가 지금 일어나면 내 알몸을 에반젤린에게 보여주는 꼴이 된다.
그건 좀 그런데.
머릿속이 갈팡질팡하던 그때.
“기, 김덕성님!”
에반젤린이 크게 소리친다.
아, 깜짝이야.
풍덩.
그녀가 뜨거운 온천수 안으로 뛰어든다.
축축하게 젖은 수건이 그녀의 글래머한 몸에 착 달라붙는다.
린 만큼은 아니지만 에반젤린 역시 군살 없는 균형 잡힌 몸매와 꽤 큰 사이즈의 가슴을 보유한 글래머 미녀.
그런 에반젤린이 수건 한 장만 걸치고 온천에 입수한 거다.
눈을 대체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비키니를 입고 다녔던 여름 학교보다 더 자극이 심하다.
“이, 일본에는 혼욕이라는 좋은 문화가 있다고 들었사와요!”
착.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에반젤린이 내 팔에 달라붙는다.
온천수에 젖어 거의 의미가 없어진 얇은 수건 너머로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소녀, 김덕성님과 혼욕을 하고 싶은 것이와요!”
뭐?
일본 온천에서 한국 남자에게 영국 공주가 혼욕을 제안한다고?
이건 대체 무슨 미친 발상이야?
*
해가 지고 어느새 밤이 찾아온 벳푸시.
온천의 도시답게 도시 곳곳에서 모락모락 새하얀 수증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이 선글라스를 낀 거구의 붉은 머리 구릿빛 태닝 근육질 남자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뉴 월드 리그의 EX랭크 빌런, 베르세르크.
포 호스맨에서 ‘전쟁의 기사’ 역할을 담당하는 그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의 귓가에는 블루투스 이어셋이 끼워져 있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도시군.”
베르세르크의 바위 같은 얼굴에 금이 간다.
목표 중 가장 강한 상대라고 해봤자 S랭크 영웅인 ‘파괴의 마법소녀’ 마유즈미 마유뿐.
생도 중에는 린, 올리비아, 김덕성, 쿠로사와 유지가 진명해방의 단계에 오르기는 했지만, 베르세르크 본인은 이미 심상전개를 각성한 EX랭크 빌런.
S랭크 따위, 트럭으로 몰려와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반면 이쪽의 전력은 EX랭크 둘.
심지어 그와 동행한 EX랭크 빌런, 언더테이커는 EX랭크 영웅 두셋 정도는 혼자 갖고 놀 정도의 실력자.
언더테이커는 단신으로 오메가 랭크 이계종 상대가 가능한, 전투광인 베르세르크 본인이 마스터와 함께 유이하게 실력을 인정한 괴물이었다.
고작 애송이 생도들 따위를 상대하기에는 지나치게 강력한 과잉 전력 투사였다.
‘마스터의 명령이 아니라면 이 나와 감히 손속을 섞을 자격조차 되지 않는 쓰레기들······.’
베르세르크는 전투광이기는 하지만, 아무나하고 손속을 섞지는 않았다.
그에게 전투를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은 최소 EX랭크.
그 이하의 쓰레기들은 감히 자신의 존안을 볼 자격조차 없다.
이번이 특이 케이스였다.
처음으로 자신을 이긴 사내, 마스터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한다.
그것이 메사이어와 베르세르크가 맺은 맹약이었다.
그렇기에 베르세르크는 메사이어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것이 설령 그가 가장 혐오하는 무가치한 싸움을 강요하는 일일지라도.
베르세르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블루투스 이어셋을 통해 언더테이커에게 말했다.
“그쪽 준비는 끝났나?”
[끝났······. 지······.]언더테이커가 이번 작전에서 맡은 역할은 적 지원 전력의 차단.
그는 지금 베르세르크와 멀리 떨어진 장소에 도착해서 그와 통신하고 있었다.
[근육바보······. 네놈이야말로······. 다른 버러지들처럼······. 애송이들한테······. 당하지 말도록······.]“당하다니? 내가? 오히려 차라리 저 애송이 중에 나한테 생채기라도 입힐 수 있는 수준의 상대가 나타났으면 좋겠군.”
베르세르크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러면 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무가치한 임무가 조금은 즐거워질 테니까.”
그의 싸늘하게 식은 시선이 벳푸 시내를 훑는다.
남은 시간은 하루.
내일이 D-Day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