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78)
안개가 자욱한 대욕탕 안.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노천탕 옆에서 서로 맨살을 비비며 키스하고 있는 김덕성과 에반젤린의 모습을 본 순간.
올리비아의 뇌가 정지됐다.
키스라니.
그것도 저렇게 파렴치한, 사실상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용납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촌구석 섬나라의 공주 따위가 자신보다 먼저 저렇게 깊은 스킨십을 하는 건 인정할 수 없다.
두근두근.
올리비아의 가슴이 분노로 뛴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파렴치한 광경을 목격한 올리비아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온다.
“다, 다다다다당신들 지금 대체 뭐 하는 건가요?! 어, 어떻게 이런······! 이렇게 음탕하고 파렴치한 짓을?!”
올리비아가 깊게 파인 가슴골을 손으로 가리며 말한다.
“으으으으으! 스튜어트 양. 그렇게 안 봤는데 약았어. 주인님한테 꼬리치지마! 이 불여우! 당장 주인님한테서 떨어져!”
옆에서 에리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말한다.
“너, 너무해······. 나, 나도 아직 거기까지는 못 해봤는데······.”
마코토가 말끝을 흐린다.
“히익······. 하루 사실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어. 세상에······. 역시 하루가 우리 덕성 오빠랑 같이 혼욕했어야 했어! 하루 초 분해! 완전 짜증나!”
옆에 있던 하루가 볼을 부풀린다.
이 세상이 라노벨이라는 사실을 김덕성을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하루였다.
그런 그녀가 ‘혼욕’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라노벨 세상에서 혼욕한다면 반드시 럭키 스케베 이벤트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그걸 이용해서 덕성 오빠와 좀 더 가까이······.
라는 것이 하루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혼욕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다른 엉뚱한 히로인. 그것도 지금까지 별다른 비중이 없어서 공기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에반젤린이 먼저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다른 히로인도 아닌 에반젤린이라니.
하루는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꼈다.
“이건······.”
린 역시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뭔가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문득 여름학교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거의 알몸으로 서로 끌어안고 있다가 우연히 키스한 순간.
그녀의 모습을 목격한 에반젤린은 자신과 그를 강제로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린이 순간의 망설임으로 인해 멈칫한다.
“······!!”
당황한 건 에반젤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짜고짜 대욕탕으로 돌격해서 예상대로 김덕성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다.
그와 단둘이 목욕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것도 좋았다.
베아트리체의 정체를 알고도 감싸준 그의 상냥함에 다시 한 번 반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와의 혼욕을 계속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무리해서 잡았다.
하지만 이렇게 사고가 벌어진 것도 모자라 서로 입맞춤까지 하게 되다니.
그것도 일반적인 옷차림이 아닌, 서로의 맨살이 맞닿는 알몸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두근, 두근, 두근.
에반젤린의 심장이 폭주하듯 계속해서 뛴다.
심장 소리가 그에게 전달될까 두려울 정도로.
‘하와와와와와······.’
에반젤린의 머릿속이 분홍색으로 물든다.
‘퍼, 퍼스트 키스······.’
비록 사고일지라도, 지금의 입맞춤이 그녀에게는 첫 입맞춤.
맨살이 닿은 외간 남자도 그가 처음이었다.
첫 키스는 반드시 좋아하는 사람과 하기로 결심했던 에반젤린이었다.
순결 역시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기로 결심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예상치 못하게 첫 키스를 빼앗길 줄이야.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 상대가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이렇게 되면 소녀······. 김덕성님 이외의 다른 남자한테는 시, 시집 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는 것이와요······!’
시집.
그 단어를 떠올리자 에반젤린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녀의 얼굴에 영국 버킹검 궁전에 있는 본인의 방이 떠오른다.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침대 위에 누운 자신과, 그를 덮치듯 끌어안은 김덕성의 모습이.
‘이, 이대로······. 어맛······. 하와와와······. 소녀, 김덕성 님이라면······.’
얼마든지 전부를 바칠 수 있다.
김덕성에게 몸을 바치겠다는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을 통치하는 자랑스럽고 고귀한 스튜어트 왕실의 혈통의 후손으로서 처녀는 반드시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바치기로 결심했으니까.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순결을 내어줄 수 있었다.
오히려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녀가 궁중에서 몰래 읽었던 로맨스 소설에서는 이런 상황도 자주 나왔으니까.
마치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소, 소녀의 이런 마음을 알면 김덕성 님, 소녀가 치녀라고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사와요······.’
교양 있는 레이디인 자신이 이런 파렴치하고 불건전한 망상을 떠올리다니.
에반젤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상상을 지워냈다.
이 상황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다른 히로인들에게 들켰지만, 에반젤린은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내심 그녀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선언하고 싶었다.
나도 그를 좋아한다고.
두근, 두근.
아플 정도의 심장 고동이 그녀의 가슴을 기분 좋게 울리던 순간.
“푸흡.”
김덕성이 입술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머리가 어지럽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어지럽다.
‘젠장······.’
솔직히 방심했다.
욕탕에서 히로인과 둘만 있는 상황에서는 99% 럭키 스케베가 발생할 것이라는 라노벨의 법칙을 간과했다.
샤워부스나 캐비넷 같은 밀폐 공간이 아닌 온천 같은 개방된 공간에서의 럭키 스케베는 항상 곤란할 때 타인에게 들킨다는 법칙을 잊고 있었다.
그 결과 일어난 참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잘못이었다.
‘역시 처음부터 혼욕을 거부했어야 했어.’
후회가 막심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회빙환 삼대장의 첫째인 회귀를 불러오지 않는 이상 되돌릴 방법은 없다.
아, 회귀 마렵네.
주변을 둘러본다.
바닥에 누운 채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에반젤린이 거의 알몸이 된 본인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황급히 가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뒤로 린, 에리, 올리비아, 하루, 베아트리체, 한서진까지.
말 그대로 전원이 수건을 두른 채 노천탕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잠깐, 한서진이라고?
수건을 두른 한서진의 모습이 보인다.
이 난장판에서 유일하게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평정을 유지하는 모습.
이쯤 되면 대단한 프로정신이 아닐 수 없는데, 한서진이 왜 여기 있지?
다른 히로인들의 난입이야 그럴 수 있다.
여기는 라노벨 세상이니까.
뭐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한서진은 다르다.
“한서진. 넌 왜 여기 있냐?”
“그건······.”
내 질문을 받은 한서진이 살짝 당황한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던 그때.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내 옆에 에리가 다가온다.
“한서진 씨, 에리링이 데려왔어. 주인님.”
다른 히로인에 비하면 살짝 빈약한 가슴을 수건으로 가린 에리.
온천욕을 하러 왔는데도 트윈테일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에리가 데려왔다고?
가지가지한다.
주변을 둘러본다.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히로인들.
그녀들의 시선이 내 하반신으로 향한다.
아무리 나라도 이건 좀.
얼굴이 뜨거워진다.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린다.
흑태자라면 어떤 조언을 했을까?
‘파트너.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철면피 깔고 레이디들이랑 같이 목욕하라고.’
이런 조언을 했을 것 같은데 별로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은 아니다.
보아하니 다들 온천욕하러 온 것 같다.
숙소에서 떠들다가 온천욕 한 번 더 하자 하고 이야기가 나온 뒤에 여기 왔다가 라노벨의 법칙처럼 내 럭키 스케베를 목격한 게 분명하다.
그냥 여기서는 철면피 깔고 미안하다고 말한 뒤에 빠져주는 게 맞다.
“뭐, 흉한 꼴 보여서 미안하고. 온천욕하러 온 거지? 방해되니까 나는 이만 나갈게.”
빠른 속도로 사과의 말을 남긴다.
좋았어.
이제 이 뻘쭘한 지옥을 탈출할 시간이다.
내가 노천탕 입구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주인님. 어디 가는 거야? 에리링. 아직 주인님이랑 혼욕하지 않았다구.”
덥석.
에리가 팔짱을 낀다.
뭐?
혼욕?
그냥 온천욕하러 온 거 아니야?
이건 진심으로 당황스럽다.
“맞아. 주군! 나도 주군이랑 온천욕하고 싶어.”
덥석.
반대편 팔을 마코토가 감싼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 감촉이 팔에 닿는다.
“야, 올리비아 이거······.”
아니지?
내가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올리비아가 팔짱을 낀 채, 붉어진 얼굴로 이쪽을 힐끗힐끗 바라보면서 말한다.
“전속 시녀로서! 당신의 문란한 행동을 이제 결코 묵과할 수 없어요! 차라리 제가 전속 시녀로서 당신의 목욕 시중을 드는 고육지책을······. 으으으으으! 이건 결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전속 시녀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니까 착각하지 마시라고요! 아시겠나요! 이 우주 제일 바보!”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면서 소리친다.
올리비아까지 이 빌어먹을 혼욕에 찬성했단 말인가?
“그, 그리고 아, 아랫도리 조, 좀 가리세욧!! 이 왕변태! 파렴치한!!”
올리비아가 양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소리친다.
라노벨 세상답게, 손가락을 벌려 사이사이로 내 아랫도리를 주시하는 올리비아.
그러고 보니 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네.
염병.
이건 좀 쪽팔린다.
떨어진 축축한 수건을 주워서 아랫도리에 다시 동여매서 가린다.
“니시시시. 하루, 덕성 오빠랑 같이 목욕도 하고 등도 밀어주고 싶다고. 하루는 덕성 오빠의 초 카와이한 여동생이니까! 등 밀기 서비스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이봐 하루. 누구 마음대로 등 밀기를 한다는 거지? 덕성의 등 밀기는 내가 먼저 할 것이다.”
하루의 말에 옆에 있던 린이 발끈한다.
내 시선이 마지막으로 한서진에게 향한다.
국뽕만 뺀다면 지극히 정상인인 한서진이라면.
이 빌어먹을 아수라장에서 나를 구해줄지도 모른다.
내 눈빛을 받은 한서진이 고개를 살짝 돌린다.
그녀가 귀가 빨개진 얼굴로 말한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김덕성님. 다 같이 혼욕하시죠.”
내 기대는 무참히 빗나갔다.
“가자! 주인님!”
“주군! 같이 목욕!”
질질질.
에리와 마코토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다시 온천탕에 강제로 입수한다.
“하와와와와! 소녀도 그렇다면 질 수 없사와요!”
뒤이어 에반젤린이 입수한다.
“스튜어트 양은 좀 빠지시죠! 지금부터는 전속 시녀인 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간이니까요!”
“누구 마음대로지? 보나파르트. 그의 곁은 내 차지다!”
“올리브 언니, 린 언니. 틀렸어! 덕성 오빠는 내 거야! 아무한테도 안 줄 거라구!”
풍덩.
올리비아와 린, 하루가 온천에 뛰어든다.
“트릭시 양도 함께 목욕하는 것이와요!”
“으으으으······.”
에반젤린의 부름에 잔뜩 위축된 베아트리체가 온천에 몸을 담근다.
잠깐, 베아트리체?
쟤도 여기 있었어?
“그럼 저도······. 입욕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서진이 조용히 온천에 몸을 담근다.
올리비아, 린, 마코토, 에리, 에반젤린, 베아트리체, 하루, 한서진까지.
라노벨 권두 컬러 일러스트에 나올 만한 단체 온천신이 눈앞에 펼쳐진다.
“으으으으······.”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온천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온천 제발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