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80)
벌써 저녁 시간이라고?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기도 하다.
노천탕 안에 시계가 없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나갔어야 했는데.
이 빌어먹을 광경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다니.
그나마 마유즈미 선생이라서 다행인가?
엑스트라 여생도나 혹시나 남생도였으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세, 세상에······. 기, 김 군······. 흡.”
마유즈미 선생이 입을 틀어막는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하긴 지금 광경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리 좋지 못한 광경이기는 하다.
“서, 선생님. 이, 이건······.”
마유즈미 선생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올리비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다른 히로인들 역시 당황한 모습으로 굳어 있던 그때.
“마유즈미 선생님.”
차가운 목소리가 당황스러운 온천의 분위기를 깨뜨린다.
한서진이 몸을 일으킨다.
몸에 착 달라붙는 수건 덕분에 드러난 그녀의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매와 이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무감각한 눈동자가 마유즈미 선생에게 향한다.
기이할 정도로 침착한 한서진의 태도에 모두가 헛바람을 집어삼킨다.
“딸꾹!”
베아트리체가 딸꾹질한다.
“네? 네! 하, 한서진 씨!”
마유즈미 선생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한서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김덕성님의 보좌 요원으로서 담임 교관인 마유즈미 선생님께 말씀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시 저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가주시죠.”
“아, 알겠어요······.”
마유즈미 선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와 한서진이 대욕탕 바깥으로 나가 사라진다.
이야기라니?
대체 무슨?
한서진은 당연히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는 나도 짐작도 안 간다.
이미 분위기는 싸해진 상황.
“······.”
방금까지 옆에서 서로 옥신각신하던 히로인들도 침묵을 지킨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스윽.
한서진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한다.
“김덕성님. 다른 생도 여러분. 마유즈미 교관님과의 이야기는 잘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욕탕에서 나온 뒤 식당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벌써 끝났다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후우. 고마워요. 한서진 씨.”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면서 말한다.
“역시 한서진 씨! 대단해! 에리링, 감탄했어!”
“이 정도는 해야 주군의 보좌 요원이구나······. 나 조금 더 분발해야겠어.”
옆에서 에리와 마코토가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마유즈미 선생을 돌려보낸 거지?
국정원에서는 대체 요원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럼. 김덕성님도 생도 여러분도 다들 식사 맛있게 하시길.”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고 있던 그때.
한서진이 고개를 숙이면서 빠르게 나간다.
뜨거운 온천수 안에 너무 오래 들어가 있어서 그런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배도 슬슬 고프고.
마유즈미 선생 덕분에 온천욕도 다 끝났으니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
물 때문에 몸이 퉁퉁 불었다.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간다.
노천탕 밖으로 온천수가 넘친다.
이제는 저녁이 된 차가운 바깥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힌다.
“그렇다니까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소녀도 같이 가겠사와요!”
“덕성! 나도 함께하겠다.”
내가 움직이자 린과 에반젤린이 따라붙는다.
저녁 식사 자리 배치는 당연히 조별 배치.
나와 같은 조인 린, 에반젤린, 베아트리체만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
당연히 여기 있는 다른 히로인들, 올리비아, 에리, 마코토, 하루는 나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없다.
“쳇······. 에리링도 다음에는 주인님이랑 같이 밥 먹을 거야.”
“으으으으으······. 전속 시녀인 이 저와 저 바보가 다른 조라니······. 이건 불공평해요······.”
“지이이이이······.”
“언니들. 지금 마음껏 기뻐해. 하루는 뒤에서 초 웃고 있으니까. 하루는 치타처럼 초 빨리 달릴 거니까!”
에리, 올리비아, 마코토, 하루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들의 말을 들으면서 대욕탕을 나서려는 순간.
“윽.”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휘청거린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온천에 너무 오래 있던 캐릭터가 나올 때 휘청거리는 장면을 본 적 있다.
원작에서 유지도 그랬고.
그런데 그게 나에게 일어날 줄이야.
왠지 아까부터 어지럽더라니.
“으, 어지러워······.”
술에 취한 것처럼 발걸음이 꼬인다.
이 정도로 걷기 힘든 건 대학교 신입생 대면식 때 술 게임에 져서 창수가 소주 맥주 양주 다 섞어서 말아준 벌주를 한 번에 들이킨 이후로 처음이다.
근데 무인도 때 감기 걸렸을 때도 그렇고 나름 초인인데 이런 걸로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게 말이 되나?
염병할 라노벨 세상 같으니.
초인이 일상생활에서 갖는 장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주인님? 괜찮아? 에리링이 부축해줄게!”
“김덕성님! 소녀가 보필하겠사와요!”
“덕성, 온천에 너무 오래 있던 게 아닌가? 내가 부축하겠다.”
“주군! 내가 도와줄게!”
“덕성 오빠! 괜찮아?”
술꾼처럼 휘청이던 그때.
내 모습을 본 히로인들이 몰려든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주변에서 뭐라고 하니까 더 어지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다들 비켜요! 그의 부축은 전속 시녀인 이 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몫이니까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봐요, 당신. 왜 그렇게 몸이 약한 건가요? 하여튼······.”
내 옆에 다가온 올리비아가 뭐라 하던 그때.
내 몸이 힘없이 올리비아에게 쓰러진다.
“흐앗?!”
올리비아의 입에서 기묘한 비명이 흘러 나온다.
“야, 올리비아. 나 식당까지 부축 좀 해줘······.”
그녀의 귀에 힘없이 말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누가 나를 부축할지 여기서 계속 싸우다가 밥도 못 먹을 게 분명하다.
차라리 내가 부축할 상대를 지명하는 편이 낫다.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지금 제일 가까이 있는게 올리비아라서 그녀를 지명한 것일뿐.
다른 의도는 없다.
화악.
올리비아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면서 말한다.
“그, 그그그그그렇다면 어, 어어어쩔 수 없죠! 며, 명령이라면! 전속 시녀인 저는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요!! 그, 그래요! 명령이니까요!”
묘하게 자기합리화를 마친 그녀가 나를 안고는 번쩍 들어 올린다.
공주님 안기다.
아니 다 좋은데 하필 왜 이 자세야?
뭐라 하고 싶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서 그러기도 힘들다.
“지이이이이······.”
“잊고 있었어. 주인님. 황녀님만 편애한다는 사실을.”
“큿······.”
“올리브 언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하루, 조금 다시 봤어.”
“소녀도 좀 더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와요······.”
공주님 안기를 당하는 내 귓가에 다른 히로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코토, 에리, 린, 하루, 에반젤린의 목소리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로, 나는 대욕탕을 나왔다.
탈의실.
내 옷이 들어있는 장소에 도착하자 올리비아가 나를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자, 여기. 당신 옷이에요. 팔 좀 들어봐요.”
올리비아가 내 사물함에서 유카타를 꺼내서 내게 말하다가 얼굴을 붉힌다.
“으, 으으으으으으으······.”
당연한 말이지만 옷을 입으려면 우선 벗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옷을 입기 전 상태.
내 모습을 보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전속 시녀한테 이런 일을 시키다니······! 이 변태! 파렴치한!!”
올리비아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친다.
“그냥 내가 갈아입을······.”
“됐어요!”
찰싹.
내가 팔을 들자 그녀가 팔뚝을 가볍게 친다.
아니 거절할 거면 왜 물어보냐고.
내 몸을 반쯤 일으킨 올리비아가 내게 유카타를 천천히 입혀준다.
그렇게 환복이 모두 끝난 나를 올리비아가 다시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린다.
공주님 안기, 포기 안 한 거냐고.
“자, 그럼 다시 식당으로 가겠어요.”
올리비아와 내가 나서고, 뒤이어 다른 히로인들이 대욕탕을 나선다.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자 주변 엑스트라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검은 귀축, 공주님 안기 당하고 있어!”
“어디? 헉. 진짜네?”
“하렘 멤버들이랑 혼욕도 했다는데?”
“온천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것도 모자라서 이젠 공주님 안기까지?”
“이젠 걷는 것조차 기사공주님한테 대신 시키는 거야?”
“무서워. 대체 어디까지 조교한 걸까? 진짜 귀축이야.”
뭐? 조교?
어이가 없네.
뭐라 해주고 싶지만, 힘이 없다.
그렇게 나는 엑스트라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올리비아의 품에 안겨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
료칸 식당.
입식이 아닌, 한국 식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좌식 형태로 이루어진 테이블이 늘어선 곳.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보던 다다미가 깔린 방과 미닫이문이 있는 자리에 나는 앉아 있었다.
4인 1조였기에 테이블도 4인 1테이블인 상황.
당연하게도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우리 조원들이 앉아 있었다.
“후후후. 소녀. 김덕성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어서 무한한 영광인 것이와요!”
내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은 에반젤린.
막 온천욕이 끝난 핑크색 머리를 원래대로 풍성한 트윈테일로 묶은 그녀는 유카타를 입은 채 기분 좋은 모양인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행히 식당에 왔을 때쯤에는 기력이 상당히 회복된 상황이라, 혼자 앉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흠. 덕성. 가이세키 요리는 혹시 처음인가? 가이세키 요리는 일본 전통 코스 요리로 전채 요리인 사키즈케부터 후식까지 순서대로 나오는······.”
바로 앞에는 린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가이세키 요리 설명을 시작한다.
한창 일본 여행을 계획할 때 검색에서 나온 블로그에서 봤던 내용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수준.
딸칵.
요리가 여러개 나온다.
“김덕성님. 아 하고 드셔 보시어요!”
“덕성! 여기 먹어보거라.”
린과 에반젤린이 경쟁적으로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내 입 앞에 들이댄다.
그런데 에반젤린 얘는 외국인인데 왜 이렇게 젓가락질을 잘하지?
덥석.
그녀들이 내민 전채 요리를 받아먹는다.
가격이 꽤나 비싸다고 들었는데 맛은 있다.
가이세키 요리는 식기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더니, 책상 위에 차려진 도자기 그릇도 꽤 예쁘다.
“에리링도 주인님한테 음식 먹여주고 싶었는데.”
“식사 시중 역할을 빼앗기다니······. 이건 전속 시녀로서의 굴욕이에요! 역시 조 편성이 잘못된 게 틀림없어요.”
“지이이이이······.”
“하루도 오빠랑 같이 밥 먹고 싶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에리, 올리비아, 마코토, 하루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음식 서빙은 계속된다.
“검은 귀축, 부러워. 나도 미소녀가 밥 먹여줬으면 좋겠네.”
“걷는 것도 모자라서 밥 먹는 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 검은 귀축······. 대단해. 이쯤 되면 존경스러워지려고 해.”
“목욕 시중에 이어 식사 시중. 다음은 밤 시중이겠지?”
“꺄아아아아아!”
엑스트라들의 수군거림도 들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생선구이, 회, 튀김, 생선조림 등.
그런데 왜 다 생선뿐이지?
아무튼 계속해서 나오는 음식들을 옆에서 린과 에반젤린이 먹여주고 있던 그때.
“크윽!”
베아트리체가 안대로 가려진 왼쪽 눈을 감싸면서 고개를 숙인다.
“여의 마안이······. 마안이 폭주······! 끄으으윽! 끄아아아악!”
주륵.
베아트리체의 안대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베아트리체가 지닌 성물인 홍련의 마안, 그 기능은 소유자에게 앞으로 닥칠 위험을 고통의 형태로 예지하는 것.
위험의 강도에 따라 사용자가 겪는 고통의 수준도 달라진다.
그리고 지금.
“끄으으윽······.”
“트릭시 양. 괜찮은 것이와요?”
여름 학교 때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베아트리체를 볼 때 최소 EX랭크, 그 이상의 확정적 위험이 닥칠 예정이라는 신호다.
모든 상황 판단이 끝나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다.
드디어 왔다.
리그 놈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