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84)
주님
올리비아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히로인들이 전부 집합한다.
린, 에리, 마코토, 에반젤린, 하루부터 베아트리체까지.
올리비아를 포함한 일곱 명의 미소녀가 엉망이 된 벳푸 시내에 서 있었다.
“여는 대체 왜 여기에······.”
베아트리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위협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최소 EX랭크의 위험이 지금 여기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트릭시 스미스라는 신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녀의 진짜 신분은 빌런 조직 진리의 교단의 성녀.
홍련의 마안의 비밀을 밝히려면, 자연스럽게 성녀라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
‘그런 결말은······. 맞고 싶지 않노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빌런, 나아가 진리의 교단의 최고위직인 성녀라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지금까지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줬던 생도들, 나아가 온 세상이 그녀를 손가락질할 게 분명했다.
이용당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빌런이었으니까.
베아트리체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빌런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교단 깊숙한 곳에 사실상 감금 상태였던 과거와는 달리, 생도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는 지금의 일상이 이제는 그녀의 전부가 되었으니까.
결코 잃고 싶지 않은 행복을 이제야 찾았으니까.
그것이 설령 거짓말이고, 언젠가 사라질 꿈이라 하더라도 베아트리체는 지금의 행복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절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파르르.
베아트리체의 손이 떨리던 그때.
꼬옥.
그녀의 손에 온기가 느껴진다.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간다.
거기에는 에반젤린이 있었다.
그녀가 윙크하면서 베아트리체의 귓가에 속삭인다.
“트릭시 양. 괜찮사와요.”
에반젤린은 이미 베아트리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영국 왕실의 공주이자, 윌리엄 사망 이후 영국 왕실의 유일한 영웅이자 아스칼론의 주인으로서 사건 이후 베아트리체의 정체를 MI6에서 보고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베아트리체의 정체를 정보기관과 자신만 아는 특급 기밀로 묻었다.
베아트리체는 어디까지나 이용당하는 신세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친구를 존중하기 위해 이 사실은 베아트리체에게도 일체 함구했기 때문에, 베아트리체는 아직 에반젤린 본인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 알겠도다. 계약자여······. 훗. 여는 홍련의 성녀. 계약자에게 기댈 정도로 나약하지 않으니라.”
베아트리체가 허세를 부린다.
그와 함께 그녀의 심장 박동이 가라앉는다.
언제부터인가 베아트리체는 에반젤린의 생각을 읽는 걸 그만뒀다.
굳이 읽지 않아도, 지금처럼 그녀의 우정과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베아트리체는 에반젤린의 생각을 읽지 않았다.
김덕성의 개입 때문에 비틀린 원작의 흐름이 정사에서는 주인공을 제외하면 아무하고도 인연이 없던 베아트리체에게 하나뿐인 친구를 만들어준 것이다.
‘역시 김덕성님은 상냥한 것이와요.’
에반젤린이 웃는다.
김덕성은 그녀에게 끝까지 EX랭크 빌런의 위험을 숨기라는 명령을 내렸고, 에반젤린은 그 명령의 이면에 숨겨진 진의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베아트리체의 정체가 들키는 것을 염려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사실을.
별다른 인연조차 없는 베아트리체의 정체를 숨겨주기 위해, 나아가 베아트리체가 위장신분인 ‘트릭시 스미스’로 누리고 있는 지금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김덕성은 EX랭크 빌런과 홀로 맞서는 일을 자처한 것이다.
[용서고 뭐고 원래부터 그냥 놔둘 생각이었으니까······.]에반젤린의 머릿속에 김덕성의 말이 맴돈다.
온천에서 단둘이 혼욕했을 때, 베아트리체를 용서해달라는 그녀의 말에 김덕성이 했던 대답.
그 답변을 김덕성은 문자 그대로 살신성인을 통해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근.
에반젤린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분이야말로 상냥함과 용기, 그리고 책임감을 겸비한 진정한 영웅······.’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에반젤린 역시 영국의 공주 이전에 한 사람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다.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단 사람은 많지만, 사전적 의미의 영웅에 가까운 사람은 그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대재해를 극복한 이후 게이트는 더 이상 불가해의 재앙이 아닌 통제 가능한 리스크이자 돈벌이 수단으로 변했고 영웅은 게이트 산업의 일부로 전락했다.
현대의 영웅들은 대재해 때와는 달리 약자와 인류 문명이 아닌 부와 명예를 위해 싸운다.
바야흐로 진정한 영웅이 실종된 시대.
김덕성은 그런 시대에 나타난 진정한 영웅인 것이다.
‘소녀, 또다시 김덕성님께 반했사와요.’
착.
에반젤린이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다.
그녀의 심장이 뛴다.
지금까지 에반젤린의 마음은 고작해야 자신을 구원해준 사람, 팬으로서 동경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를 좋아하는 건 맞았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전부를 바칠 정도로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사람은 위기 상황에 본모습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급박한 상황에 김덕성이 보여준 영웅적인 면모는 영국 왕녀를 진심으로 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에반젤린의 시야에 올리비아의 모습이 보인다.
화르륵.
불타는 벳푸 시내를 배경으로 밤하늘에 백금발을 휘날리며 선 늘씬한 미소녀의 푸른 시선 끝에는 파괴된 료칸이 있었다.
“······.”
올리비아와 에반젤린의 시선이 다시 마주친다.
에반젤린은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과는 달리 흑태자의 후계자로서, 전 프랑스의 기대를 받던 유망주.
어릴 때부터 영웅으로 키워졌기에, 자신 이외의 사람은 영웅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던 그녀가 김덕성을 인정하고 그의 전속 시녀가 된 이유를.
올리비아는 자신과는 달리 오래전부터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알아차렸던 걸지도 모른다.
그의 진가를 진작 알고 있었던 올리비아와 겉모습밖에 모르다가 이제야 알아차린 자신.
어쩌면 신뢰의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에반젤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뭘 보는 거죠? 스튜어트 왕녀?”
에반젤린과 시선이 마주친 올리비아가 한 마디 던진다.
“하와와와. 별것 아니어요. 그냥······.”
에반젤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시야에 다른 히로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래서, 보나파르트. 우리를 소집한 이유가 뭐지?”
척.
손에 일본도를 쥔 채, 늠름한 자세로 되묻는 시노자키 린.
“황녀님. 주인님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나, 조금 불안해······.”
서로 손을 잡은 에리와 마코토.
“······하루, 처음부터 수상했어. 역시 덕성 오빠한테 무슨 일 있는 거지? 올리브 언니. 그런 거지?”
마지막으로 평소와는 달리 얼굴에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따지는 하루의 모습이 보인다.
공통점으로는 모두가 김덕성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그를 좋아한다는 점.
‘역시 김덕성님. 여자라면 누구나 그분한테 반할 수밖에 없어요. 영웅호색에 걸맞는 모습인 것이와요.’
에반젤린이 한쪽 손으로 빨개진 뺨을 만지면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다들 조용히.”
탁.
올리비아가 플랑베르쥬를 바닥에 내리친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다.
“지금 료칸 쪽에서 그 바보가 EX랭크 빌런과 혼자 싸우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어요.”
올리비아의 말에 싸늘한 침묵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현장 지휘권을 쿠로사와 유지한테 이양한 뒤······. 전속 시녀로서! 그를 구하러 가겠어요!”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인다.
“당신들이 정말 그 바보를 생각한다면······. 절 따라오세요!”
올리비아의 시선이 히로인들을 훑는다.
자신 넘치게 말은 했지만, EX랭크 빌런과 적대하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정말로 그를 도우러 갈······.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보나파르트.”
올리비아의 상념이 린의 목소리에 끊긴다.
린의 남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널 따라가는 게 아니다. 내가 앞장서겠다. 덕성을 위해서.”
“나도! 나도 주인님 구하러 갈래!”
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손을 번쩍 드는 에리.
“나도 갈 거야······. 주군의 검이니까!”
입술을 깨물면서 의지를 다지는 마코토.
“덕성 오빠는 초 카와이 갸루 여동생인 하루가 구할 거야. 언니들은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구. 니시시시.”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머금은 하루.
“저도 가겠사와요! 트릭시 양이랑 같이!”
“므읏?!”
마지막으로 에반젤린과 당황했지만, 거부 의사는 밝히지 않은 베아트리체까지.
그녀들의 모습을 본 올리비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당신들······.”
김덕성을 제외한 타인에게 영웅으로서의 책임감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속 시녀인 자신만 단신으로 지원갈 가능성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전원이 그녀를 따를 줄은 몰랐다.
“뭐야, 황녀님. 감동한 거야?”
“아, 아아아니거든요!? 흥! 전속 시녀인 제 지시에 당신들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에 불과해요! 아무튼 그럼 일단 작전회의부터 하죠!”
에리의 지적에 황급히 말을 돌리는 올리비아.
그녀의 지시에 히로인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작전회의를 마친 히로인들의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녀들의 목적지는 파괴된 료칸.
김덕성이 있는 곳이었다.
*
쿨럭.
입에서 피가 쏟아진다.
온몸이 만신창이로 변했다.
[파트너!]머릿속에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이 지경까지 버티다니······. 조금 놀랍군. 그 꺾이지 않는 의지에 찬사를 표하지.”
귓가에 베르세르크의 목소리가 들린다.
빈정거림 따위는 없는, 순수 100% 호의가 깃든 목소리.
그래서 더 엿같다.
누가 라노벨 빌런 아니랄까 봐, 이런 데서까지 칭찬하고 난리야.
그딴 칭찬 들어봤자 하나도 안 기쁘다.
“끄윽.”
이미 료칸 건물의 형체는 온데간데 없어진 상황.
잘 꾸며진 일본식 정원도, 뜨거운 온천수가 인상적인 노천탕도 전부 전투 여파에 박살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어서기 싫다.
하지만 일어나야만 한다.
푹.
듀랜달을 바닥에 박아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온몸이 후들거린다.
“찬사의 대가로, 이 몸의 진명해방을 보여주지. 영광으로 알도록.”
귓가에 베르세르크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깐, 뭐?
진명해방이라고?
“흐룬팅, 진명해방──”
우우우우우우웅!놈이 치켜든 대검에서 핏빛 마력이 소용돌이친다.
칼날이 진동한다.
“──피를 마시는 마검!!”
쩌-저-저-정!
놈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진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베르세르크를 중심으로 붉은 바람이 소용돌이친다.
펄럭.
놈의 몸에 걸친 도복형 전투장갑이 바람에 나부낀다.
파츠츠츠츠츳!
소용돌이에서 붉은 마력 스파크가 뻗친다.
압도적인 마력의 폭풍이 베르세르크에게 휘몰아친다.
뚝, 뚝.
고농도로 압축된 붉은 마력이 마치 피처럼 바닥에 떨어진다.
마검형 초상병기 흐룬팅.
신화 속 흐룬팅처럼 이계종과 영웅, 헌터를 가리지 않고 적의 피를 흡수할수록 기능이 향상되는 어빌리티를 지닌 고유무장.
흐룬팅의 진명해방 피를 마시는 마검의 능력은 지금까지 흐룬팅이 마신 피를 일시적으로 전부 해방해서 사용자의 신체능력과 마력을 증폭하는 단순하고도 강력하고 효과적인 능력.
거기에 부가적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수록 회복하는 흡혈 능력도 더해진다.
놈의 붉은 갈기가 붉은 마력 오오라와 하늘로 치솟는다.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 충격파가 주변을 휩쓴다.
“지금부터는 조금 진심으로 상대해주마! 김덕성!”
번쩍.
놈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빛난다.
씨발.
라노벨 빌런답게 처음에 봐주다가 안 될 것 같으니까 단계적으로 힘 해방하는 거 봐라.
합일은 아직.
승산은 거의 0%.
입맛이 쓰다.
이래서 도박 같은 건 하면 안 된다.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
고구마가 따로 없다.
역시 나는 라노벨보다 웹소설식 사이다가 좋다.
라노벨 따위, 엿이나 쳐먹으라지.
“울어라!! 마검 흐룬팅이여──! 블러드──! 스트라이크!!”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베르세르크의 중2병 멘트와 함께 흐룬팅에서 진짜 울음 같은 진동소리가 터진다.
애니메이션에서도 봤던 광경.
하지만 원작 주인공과는 달리 아직 합일도 심상전개도 없는 나는 저 공격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죽는다고?
원래 세상도 못 가보고.
이렇게······.
눈앞이 아득해지던 순간.
“캐슬 오브 브리타니아──!!”
익숙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가른다.
번쩍.
그와 함께 분홍색 방어막이 내 앞을 뒤덮는다.
콰-과-과-광!!
방어막과 붉은 마력파가 충돌하며 굉음이 터지고 지축이 흔들린다.
“당신!”
저 멀리 여기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번쩍.
백금빛 섬광과 함께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약간 부스스하지만 여전히 윤기가 넘치는 백금빛 머리카락.
눈물을 머금고 있는 푸른 눈동자.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내 뺨에 닿는다.
“이 우주 제일 바보 같으니······.”
이 상황에서도 우주 제일 바보 이야기냐고.
거기까지 생각한 내 시야가 기울다가 거꾸로 뒤집어진다.
휘청, 꼬옥.
올리비아의 품이 내 쓰러지던 몸을 받아낸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피부에 닿는다.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올리비아의 귓가에 속삭인다.
“······빌어먹을 츤데레 공주님 같으니. 오지 말랬잖아.”
쓸데없이 울고 난리다.
그러니까 여기는 나 혼자 맡는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