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87)
어스름한 새벽빛이 붉은 세계를 밝힌다.
파츠츠츠츳!
서로의 심상이 부딪히며 세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허공이 유리처럼 금이 가고, 덧씌워진 주변 풍경이 조각나기 시작한다.
붉은 세계를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침식하기 시작한다.
“심상전개······. 라고?”
베르세르크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의 얼굴이 굳고 여유가 사라진다.
심상전개를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심상전개뿐.
서로 다른 두 심상전개가 부딪히면 더 강력한 심상전개가 공간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그리고 지금, 베르세르크는 그가 펼친 끝없는 투쟁의 세계(Blood Valhalla)가 김덕성이 펼친 밤을 부수는 여명의 서광(Dawn Breaking Night)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베르세르크가 더 놀란 사실은.
“어떻게······. 어떻게······. 네가 흑태자의 심상전개를?!”
김덕성이 다른 누구도 아닌 흑태자의 심상전개를 사용했다는 것.
심상전개란, 하나의 영웅이 살아온 인생, 경험, 심상, 마음, 능력을 쌓아 올려 완성한 소우주의 총아, 심상의 극의를 진언을 통해 세계에 덧씌워 섭리를 초월하는 것.
인간 개개인이 지닌 심상은 저마다 다르기에, 심상의 극의에서 탄생하는 심상전개는 개인마다 제각기 다른 풍경을 지닌다.
따라서 하나의 심상전개를 서로 다른 두 명의 타인이 공유하는 건 불가능하다.
가까운 친구, 가족, 아니 설령 유전적으로 가장 닮은 일란성 쌍둥이라 할지라도 서로가 지닌 심상도 능력도 인생도 경험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 상식이 송두리째 부서졌다.
김덕성.
그가 흑태자의 심상전개를 사용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파스스스.
김덕성의 머리를 감싸던 검은 투구가 연기로 화해 사라진다.
그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푸르스름한 서광을 등지고 선 김덕성의 눈빛에 검은 안광이 반짝인다.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작게 중얼거린 김덕성이 듀랜달을 들어 올린다.
그의 등 뒤에 흑염이 뭉쳐 만들어진 검은 태양이 떠오른다.
번쩍! 번쩍!
검은 태양에서 내리꽂히는 푸른 서광이 붉은 대지를 강타한다.
베르세르크의 영역이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검게 물든다.
김덕성의 등 뒤로 흑기사 형태의 반투명한 인영이 떠오른다.
[감히 내 사랑스러운 동생을 공격하다니, 야 인마. 넌 이제 끝났어. 이 꽉 깨물어라.]검은 기사, 흑태자의 입에서 경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목소리는······? 설마 흑태자 본인? 설마 그때 죽은 게 아니라 정령으로······.”
베르세르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저 모습과 목소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흑태자 본인.
10년 전, 오메가 랭크 이계종 파프니르와 동귀어진해서 죽었다고 알려진 흑태자였지만, 사실은 죽지 않고 정령의 몸으로 살아남았던 거다.
그의 머릿속에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눈앞의 김덕성이 흑태자의 심상전개를 사용하는 이유.
정령인 흑태자와 합일한다면.
100% 일체화를 넘어 심상까지 하나가 된다면.
사용자인 김덕성이 정령인 흑태자의 심상전개를 사용하는 것도 이론상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
일어날 리 없는, 상식을 파괴하는 터무니없는 기적.
그런 기적을 미리 대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파츠츠츠츠츳!
스파크와 함께 붉은 세계가 조각난다.
타오르는 검은 태양에서 비치는 여명의 서광이 세계를 갈라놓는다.
순식간에 뒤집힌 우위.
반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우뚝 선 김덕성과, 그 뒤에 반투명한 형체로 나타난 흑태자.
두 남자의 시선이 베르세르크에게 향한다.
[그래. 이 몸이 바로 흑태자 님이시다!]흑태자의 목소리가 세계를 울린다.
검은 태양에서 흑염이 일렁인다.
불리해진 상황.
승산이 실시간으로 줄고 있다.
자칫하면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는 상황.
두근.
베르세르크의 심장이 뛴다.
두근, 두근, 두근.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뛴다.
“크, 크흐흐흐, 크흐흐흐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베르세르크가 광소를 터뜨린다.
흥분으로 피가 들끓는다.
진정으로 목숨이 걸린 싸움.
그것이야말로 전투광인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가?
“파이브 크라운즈! 흑태자 라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너라면, 이 나의 목숨을 걸고 신성한 결투를 할 가치가 있다!”
베르세르크가 웃음과 함께 열변을 토해낸다.
“파이브 크라운즈, 30년 전의 대재해를 끝내고 종말에서 세계를 구원한 구세주의 신화적인 실력! 이 몸한테 지금 당장 보여라! 흑태자아아아아아!”
파이브 크라운즈.
30년 전, 이세계의 침공으로 종말의 위기에 몰린 세계와 인류를 구원하고 대재해를 막아낸 다섯 명의 위대한 영웅.
동시에 EX랭크 중에서도 따를 자가 없다는, 정점의 자리에 선 영웅 중의 영웅.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베르세르크였지만, 그의 기술을 직접 받아본 적은 없었다.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강자의 기술을 체험할 수 있다면.
설령 패배해도, 이 자리에서 죽어도 상관없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삶의 방식.
“나는 얼마든지 자신 있다. 자 와라, 흑태자! 크흐흐흐흐흐흐흐!! 지금 당장 겨루자!”
베르세르크가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친다.
그 모습을 보던 흑태자가 말한다.
[실력을 보여라?]어이가 없다는 목소리.
화르르륵.
흑태자의 목소리에 장단을 맞추듯 검은 태양이 더 세차게 타오른다.
[이 흑태자 님이 살아있을 때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칠 핏덩어리 따위가. 실력을 보여라? 하.]흑태자가 혀를 찬다.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화르륵.
듀랜달의 칼날에 흑염이 타오른다.
[귀 파고 똑똑히 들어라. 애송이. 지금부터──]흑태자의 목소리가 세계에 울린다.
[이 흑태자 님과 네놈 사이에는 싸움이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지! 파트너!]*
흑태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아니 온 세상에서 들린다.
누가 라노벨 캐릭터들 아니랄까 봐, 싸우기 전에 쓸데없이 주고받는 대화가 긴 것 봐라.
이게 무슨 삼국지 일기토도 아니고.
어이가 없지만, 나야 좋다.
왜냐하면 덕분에 합일을 통해 습득한 흑광검식의 최종오의를 준비할 시간을 벌었으니까.
[지금이야!]흑태자가 지시를 내린다.
검을 들어올린다.
■■■■■■■■■!!
하늘에 떠오른 검은 태양이 듀랜달과 공명하며 기묘한 울림을 토해낸다.
검은 태양에서 퍼진 마력 충격파가 주변을 휩쓴다.
번쩍.
검은 달을 연상시키는 구체가 듀랜달의 끝에서 피어올라 모습을 키운다.
푸른 빛을 뿜어내는 검은 태양을 듀랜달의 마력 구체가 가린 순간.
[흑광검식] [최종오의] [금환일식]검은 태양과 마력 구체가 합일하며 그대로 지상을 향해 낙하한다.
화르륵! 화르륵!
검은 불길이 지상에 떨어지고, 푸른 섬광이 번개처럼 내리친다.
단지 떨어지는 동안에 부가적으로 방출된 마력 충격파가 공간을 찢고 주변을 불태운다.
흑태자가 내 몸을 통해 자신의 심상전개를 펼친 순간, 나는 그의 심상전개 능력을 깨달았다.
흑태자의 심상전개인 밤을 부수는 여명의 서광(Dawn Breaking Night)의 능력은 하늘에 뜬 검은 태양에서 내리꽂히는 푸른 서광으로 적을 공격하고 내 몸을 치유하는 것.
그리고 흑광검식 최종오의 금환일식의 위력을 배가시키는 것.
흑태자의 결전스킬이자, 10년 전 프랑스를 멸망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오메가 랭크 이계종 파프니르와 동귀어진한 스킬이 지금 내 손에서 현현한다.
천재지변.
주변 일대를 먼지로 만들 만한 광역 공격이 베르세르크를 향해 쏟아진다.
“크흐흐흐흐! 대단하군, 대단해! 과연 흑태자! 과연 파이브 크라운즈! 과연 인류의 구세주! 그렇다면 이 몸도 최강의 스킬을 쓸 수밖에!”
베르세르크가 광소를 터뜨리며 검을 치켜든다.
끔찍한 핏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듯 모여든다.
“블러드── 사이클론!!”
근본 없는 스킬명과 함께 핏빛 마력의 폭풍처럼 일어나 주변을 초토화하며 휘몰아친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놈의 심상 전개를 이루던 마력이 흡수되며 태풍이라 일컬을만한 마력 칼날의 광풍이 피어오른다.
“받아라! 이것이 내 전력이다! 흑태자!”
베르세르크의 말이 끝난 그 순간.
핏빛 폭풍과 검은 태양이 부딪힌다.
콰-과-과-과-광!!
눈이 멀 듯한 섬광과 함께 폭음이 주변을 떨어 울린다.
스파크가 공간을 찢어발기고 지축을 흔든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무너진다.
“하하하하하하하······.”
베르세르크의 목소리가 점차 흐려지던 순간.
팟!
붉은 색이 완전히 사라지며 검은 섬광이 번쩍인다.
쩌-저-저-정!
공간이 유리처럼 깨지며 현실의 풍경이 드러난다.
서로의 심상전개가 해제된다.
심상전개 안에서 느껴졌던 전능감이, 감각과 인지의 확장으로 느껴졌던 전율이 순삭간에 신기루처럼 증발한다.
심상전개 해제의 후폭풍으로 일어난 마력 충격파가 하늘로 치솟는다.
번쩍.
한밤중인데도 대낮처럼 주변이 밝아진다.
콰-과-과-광!
두 번째 폭발과 함께 섬광 속에서 베르세르크로 추정되는 인영의 몸이 가루로 변해 흩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이겼어. 파트너.]흑태자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싸움, 내가 이겼다.
스스스.
섬광이 걷히고, 연기가 옅어진 후.
지반이 내려앉아 움푹 패인 크레이터.
그 안에 묘비처럼 꽂힌 흐룬팅이 보인다.
시체는 이미 가루가 되어 날아간 상태.
빌어먹을 싸움이 드디어 끝났다.
베르세르크는 죽었다.
“윽.”
긴장이 풀린 탓일까.
두통이 밀려온다.
오랜만에 머리가 어지럽다.
번쩍.
마력 부족으로 합일도 전투 모드도 전부 해제된다.
푹.
듀랜달을 폐허가 된 바닥에 꽂아넣는다.
[파트너.]흑태자가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흑태자 님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그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린다.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가는 천재인 이 흑태자 님이라도, 타인의 몸으로 심상전개를 펼치는 건 존재에 상당한 무리가 가는 일이니까. 두 번째는 없어. 이 몸도 소멸되는 건 싫거든.]심상전개에 대한 설정은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흑태자의 심상전개를 내가 사용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의 소멸을 각오하고 사용한 것일줄은 몰랐다.
[파트너. 오늘의 애송이는 다행히 이 흑태자 님보다 약한 놈이라 바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런 형편 좋은 적만 나타나리라는 보장은 없어.]‘알고 있어.’
베르세르크는 포 호스맨에서 사천왕 최약체를 담당하고 있는 캐릭터.
다른 포 호스맨인 프로페서와 독타 쉬나벨만 해도 전성기 모드 세이라, 이치로와 동수를 이룰 정도의 강자고, 리그의 2인자인 언더테이커, 그리고 최종 보스인 메사이어는 생전의 흑태자마저 압살할 정도의 초강자다.
[앞으로 강적을 상대하려면 파트너는 과거의 나를, 오늘의 우리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져야 해.]흑태자가 소년만화 주인공 스승 캐릭터 같은 말투로 말한다.
과거의 흑태자를, 오늘의 우리를 뛰어넘는다.
[그래야 모두를 지킬 수 있어.]흑태자가 말한다.
모두를 지킨다.
라이트 노벨에서, 소년만화에서 지긋지긋하게 봤던 상투적인 대사.
웹소설 사이다를 상징하는 나를 위해 살겠다와 완전히 반대되는, 호구에 고구마 투성이인 라노벨의 트레이드마크.
그렇기에 내가 싫어하는 말.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대사가 가슴에 와닿았다.
흑태자의 심상전개가 아닌, 나 자신의 심상전개를 향해서.
[오늘의 감각, 잊지 말기를 바라. 파트너.]흑태자의 말을 들으면서 손을 쥐었다 편다.
흑태자가 내 몸을 빌려 심상전개를 펼치던 감각.
인지와 감각이 확장되고, 의식이 한 차원 높은 단계에 오르던 전율감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허깨비처럼 전부 사라졌다.
그 감각은 분명 몸에는 각인됐지만, 실제로 펼치는 건 아직 할 수 없다.
지금의 나는 아직 EX랭크에 도달하지 못했다.
심상전개에는 분명히 닿았지만, 자력으로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무협소설에서 깨달음을 얻어 벽을 넘으려던 순간 외부의 방해 때문에 무산돼서 깨달음의 실마리만 잡은 그 느낌.
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정작 닿지 못하는 느낌.
하지만 이 감각을 계속해서 재현하려고 수행한다면, 언젠가는.
그의 말대로 EX랭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래.”
흑태자의 말에 입 밖으로 소리를 내서 대답한다.
휘청.
다리에 힘이 빠진다.
합일에 이어 심상전개까지, 막대한 마력을 소모한 반작용이 이제야 몰려든다.
온몸에 무력감이 썰물처럼 덮친다.
그대로 의식이 전구처럼 꺼지던 그 순간.
“······신! 괜찮아요?”
귓가에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물을 흘리는 푸른 눈동자가 보인다.
그 뒤로 정신을 차린 린, 하루, 마코토, 에반젤린, 베아트리체, 에리.
마지막으로 마유즈미 선생님까지.
모두가 내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하여간, 다들 호구밖에 없다.
[잘 자라고, 파트너.]머릿속에 울리는 흑태자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내 의식이 컴퓨터 전원이 종료되는 것처럼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