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89)
시노자키 이치로?
이 아저씨가 여기 왜 있어?
주변을 둘러본다.
깔끔하고 잘 정돈된 새하얀 병실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2인 VIP 병실인 모양.
[오, 잘 일어났어? 파트너.]머릿속에 뒤늦게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내가 여기 왜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로군.”
이치로의 얼굴에 메마른 미소가 걸린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라노벨 국룰처럼 토끼 사과 깎는 히로인이 아니라 웬 아저씨가 옆에 누워 있어서 당황하기는 했지만, 전후상황을 살펴봤을 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내가 협회에 지원 요청을 했을 때, 협회에도 적이 쳐들어왔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부상 당한 거라면 지금 나랑 같이 입원한 것도 이해가 된다.
문제는 이치로가 부상당했다는 사실 자체다.
이치로는 EX랭크 영웅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강자.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강자는 이 세상에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다 협회장만 아니라 거의 90% 확률로 부협회장까지 동행했을 게 분명하니까.
EX랭크 영웅 둘을 상대할 정도의 강자면.
“누구입니까? 협회장님한테 상처를 입힌 상대가?”
메사이어, 언더테이커, 디에고 모랄레스.
셋 중 하나가 그날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메사이어는 아직 본거지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남은 범인은 언더테이커와 교단 대장로 둘뿐.
아니면 프로페서와 독타 쉬나벨 두 명이 왔을 확률도 있지만······.
머릿속에서 추측이 이어지던 그때.
“언더테이커.”
이치로가 입을 연다.
“그자가 찾아왔어.”
그가 환자복 차림으로 진지하게 말한다.
“······부협회장과 함께 전력을 다해 놈과 싸웠지만 결과는 양패구상. 놈을 쫓아내는 건 명왕과의 협력 끝에 겨우 성공했지만 무리하게 기술을 사용한 덕분에 조금 내상을 입었고······.”
이치로가 말끝을 흐린다.
“그래서 여기 입원한 것일세. 자네와 함께.”
대기하던 지원 병력에게는 언더테이커를.
그리고 생도 상대로는 베르세르크를.
등골이 서늘해진다.
흑태자와의 합일과 그의 도움이라는 변수가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앉아서 당했을 것이다.
메사이어, 놈은 처음부터 나를 생포하고 나머지는 전부 죽일 작정으로 계획을 짠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놈의 손에서 놀아났고.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각성하는 라노벨 세상에서나 나오던 기적이 아니었더라면.
내 몸은 이미 벳푸 땅바닥에서 차가운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을 것이다.
아찔하다.
[파트너. 괜찮아?]머릿속에서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자칫하면 나도 죽고 다른 히로인들도 다 같이 죽을 뻔했다.
여기서 운이 좋군, 이라고 해줘야 하나?
“표정이 왜 그렇지?”
이치로가 묻는다.
“아닙니다. 협회장님이 다쳤다니 조금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빠르게 표정을 바꾼다.
“하하하하! 벌써 장인인 이 나를 걱정해주는겐가? 역시 내가 사윗감 하나는 잘 골랐어.”
탕탕.
이치로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한다.
그냥 해본 말에 왜 급발진하냐고.
차라리 팔불출보다 갱생 전의 냉철하고 싸늘했던 협회장이 낫다.
이럴 거면 그냥 평소처럼 토끼 사과나 먹을 걸.
염병.
“나는 아주 멀쩡하다네! 내상을 좀 입긴 했지만······. 이제 거의 다 나았고. 상대도 꽤 상처를 입었고 상대의 인형도 대파했으니 이만하면 잘 싸운 셈이지. 사실 곧 퇴원인데 의사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워낙 고집을 부려서······.”
말문이 트인 이치로가 별로 안 궁금했던 다른 이야기까지 전부 털어놓는다.
덕분에 나는 내가 쓰러진 이후의 일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일단 수학여행은 일시적으로 전면 중단되었다는 것.
나와 협회장은 현장에서 응급조치를 마친 뒤 도쿄의 일본 영웅 협회 부속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는 것.
그리고 내가 쓰러진지 이제 사흘이 지났다는 것 정도였다.
사흘이라.
그동안 대체 어떤 국뽕 유언비어가 국내에 퍼졌을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걸 확인해야 하나.
꿀꺽.
마른침을 삼킨다.
베르세르크를 상대할 때보다 더 강한 용기가 필요하다.
심호흡한 나는 그대로 휴대폰을 조작해 너튜브 어플을 실행했다.
[(단독) 일본 벳푸에서 EX랭크 빌런 단신으로 격퇴한 K-영웅 성웅 김덕성님의 위대한 활약상 전격 공개! 일본을 단숨에 제압할 비밀 병기, 성웅 김덕성님의 심상전개 드디어 등장!]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소련이 한국 때문에 눈물 흘린 이유! “한국은 성웅 김덕성의 나라,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미국과 일본도 K-영웅 김덕성님 덕분에 안보를 지켰다! 인류 최강 영웅 김덕성님 집중분석!] [한국 무시하던 전세계 영웅계 대참사! 성웅 김덕성님 심상전개에 다들 “벌벌”! 일본 영웅 협회 긴급 회의 소집! K-영웅 김덕성, 한국을 넘어 이제는 전 세계가 사랑하는 진정한 월드 클래스, EX랭크 등극하다!] [프랑스 황실 익명 관계자 인터뷰 “김덕성이야말로 흑태자의 진정한 후계자, 올리비아 황녀님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 프랑스는 김덕성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프랑스가 사랑하는 K-영웅 김덕성! 김덕성-올리비아 사이 묘하게 도는 핑크빛 기류?] [또다시 김덕성이 구원한 일본! 전 세계 네티즌들! 일본은 김덕성과 한국에 감사해야 한다. 김덕성이 없었다면 일본은 침몰했을 것!] [(분노주의) 일본이 전 세계에서 비난받는 이유. 일본 네티즌 “김덕성? 별것 아니다. 일본의 영웅들이 훨씬 대단하다” 배은망덕한 일본의 현실! 김덕성님 분노!]머리가 핑 돈다.
월드 클래스라고?‘
거기에 내가 언제 분노했다고 그래.
난 화나지 않았다.
핑크빛 기류는 또 뭐야.
돌겠네.
내가 머리를 부여잡던 그때.
“흐음. 이상하군. 나는 협회 긴급 회의를 소집한 적이 없는데 말이지.”
귓가에 이치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예?”
“협회 긴급 회의. 나는 소집한 적이 없다고. 그나저나 흥미롭군. 그렇다고 전부 아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고······.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자네를 바라보고 있는 건가.”
척.
이치로가 손가락으로 썸네일 중 하나를 가리킨다.
일본 영웅 협회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는 썸네일이었다.
일본 영웅 협회장 본인에게 협회 회의 소집이 가짜 뉴스라고 직접 듣다니.
머리가 새하얘진다.
당황스럽다.
아니 이걸 왜 옆에서 보고 있냐고.
“한국어 읽을 줄 아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사위의 나라 말을 익히는 것 정도는 기본 소양이지. 크흠.”
이치로가 헛기침한다.
그게 왜 기본 소양이냐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또 무슨 국뽕 너튜브가 뽑혀 나올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국뽕 제발 그만.
너튜브를 끈다.
“흠. 저는 이렇게 생각 안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시고······.”
우선 변명부터 해야 한다.
국뽕 너튜브 내용이 내용이라서 이치로가 보기에는 불편할 만한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일본 영웅 협회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이치로랑 관계가 나빠지면 나만 손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이사장과 함께 내 가장 유력한 조력자니까.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니 염병할 짓은 국뽕 너튜브가 한 건데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이지?
“그렇게 생각 안 하네.”
탁.
이치로가 어깨를 두드린다.
“그저 자네가 자네 조국의 유일한 영웅으로서 참 고생이 많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이치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 네. 뭐······.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너무 불편해할 것 없네. 편하게 있어도 돼. 편하게.”
탕탕.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리는 이치로.
마치 생활관에 방문해서 불편하게 있을 필요 없다며 너스레를 떠는 사단장을 보는 느낌이다.
높은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의 말에 어색하게 웃는 그때.
끼이익.
병실 문이 열린다.
“덕성! 무사했구나!”
남색 포니테일을 휘날리는 거유 미소녀, 린이 나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그녀의 남색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인다.
“덕성······!!”
린이 나를 부르면서 달려와 와락 안긴다.
윽, 아직 덜 나았는데.
뼈마디가 울린다.
아프다······.
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병원에 입원한 주인공을 병문안 온 히로인이 안겼을 때 주인공이 아파하는지 이제 알겠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덕성······.”
품에 안긴 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포니테일이 떨린다.
이렇게 나오니 괜히 또 마음이 약해진다.
염병.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던 그때.
“이봐요! 시노자키 양! 먼저 그렇게 달려드는 건 반칙이에요!”
저 멀리서 익숙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와 함께 열린 문 너머로 올리비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올리비아의 백금발이 흩날리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인다.
이제 슬슬 히로인 선수들 입장 시간인 모양이다.
*
일본 도쿄.
뉴 월드 리그의 은신처.
어두컴컴한 지하에 도착한 검은 로브의 인영, 언더테이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다.
“헉······. 흐윽······.”
뚝.
검은 후드 안에서 피가 떨어진다.
협회장 검귀 이치로와 부협회장 명왕 소지로.
썩어도 준치라고 일본을 대표하는 두 EX랭크 영웅의 협공에는 천하의 언더테이커라 하더라도 온전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마지막 공격.
시노자키류의 최종오의는 제법 위험한 공격이었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위험했을 정도.
지금도 꽤 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입에서 피가 흐른다.
탁.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언더테이커의 후드가 벗겨진다.
어두운 와중에도 빛을 발하는, 찬란하면서도 탁한 아이보리색 머리카락이 바닥에 은하수처럼 쏟아진다.
창백한 피부, 아름다운 미모의 얼굴이 드러난다.
“아파······.”
그, 아니 그녀의 입에서 아름다운 미성이 흘러나온다.
로브가 푹 꺼지면서, 세이라와 동년배로 보이는, 외관 나이 15세 정도의 미소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평소에는 남자인 척, 음성 변조와 로브를 통해 본신의 모습을 숨겨온 그녀였지만 지금은 내상이 심하기도 하고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흐윽······.”
인형을 닮은 고스로리 드레스 복장, 작은 섬섬옥수에 피가 묻어난다.
“테디쨩······.”
테디 베어.
그녀가 오메가 랭크 이계종의 시체를 소재로 만들어낸 역작 마리오네트는 명왕 나카야마 소지로의 공격에 대파되었다.
완전히 파괴된 건 아니기에 시간을 들인다면 수복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심각한 전력 이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테디 베어의 핵은.
“누나가······. 미안해······. 동생아······.”
이미 죽은, 그리고 그녀가 다시 살려야 할 동생이 그녀의 어린 시절 생일에 선물해줬던 소중한 곰 인형.
그것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더테이커가 입술을 깨물었다.
“불쌍한 내 동생······.”
아둔한 누나인 그녀와는 달리 동생은 착하고, 잘생기고, 사교성도 좋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세상 사람들은 동생을 자랑스러워했다.
세상에서는 동생을 이렇게 불렀다.
파이브 크라운즈의 일좌를 차지하는, 미국의 EX랭크 영웅.
데스페라도, 데미안 하이젠버그.
하지만 10년 전, 그의 죽음 이후 세상은 그를 잊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그녀를 세상은 미친 사람 취급했다.
오직 그녀만이 동생을 기억할 뿐이었다.오직 그녀만이 동생을 살리고 싶어할 뿐이었다.
“누나가 꼭 구해줄 테니까······.”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언더테이커는 그렇게 다짐하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