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97)
부실의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수십 년 동안 개인이 아닌 영웅으로만 살았던 삶.
그녀가 인류와 세계에 헌신한 대가로 얻은 건 파멸과 절망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구원이 된 사람이 바로 그 남자였다.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파이브 크라운즈, 백색 여제.
지금까지 이사장이라는 직함에 가려져 잊고 있던 이명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이사장 요시자키 세이라는 30년 전 본인의 전부를 바쳐 인류와 세계를 구원했던 구세주였던 것이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올리비아였다.
“······이사장님한테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진지한 표정.
누구보다 영웅의 자격, 책임감, 의무를 중시하는 올리비아였기에 알 수 있었다.
세이라도 같은 파이브 크라운즈의 일원이었던 흑태자처럼 어깨에 무거운 책무를 짊어지고 살아왔을 거라고.
모두에게 칭송받던, 세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구세주의 마지막이 동료 전부가 죽고 홀로 남겨지는 거라니.
그것은 올리비아가 어린 시절 오라버니를 잃었던 상실감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올리비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역시 무언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한날한시, 같은 날에 죽은 네 명의 파이브 크라운즈.
그리고 유일하게 생존한 요시자키 세이라.
불행한 우연이다, 사고사라고 호사가들은 떠들었고 그것이 정설이었기에 올리비아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기는 했지만.
흑태자로 의심되는 듀랜달의 정령에 이어 아리스가 말한 세이라의 과거 이야기까지 들은 올리비아는 확신했다.
흑태자를 포함한 파이브 크라운즈 네 명의 죽음은 단순한 우연 따위가 아니라,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개입한 결과라고.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그 음모를 꾸민 자들을 올리비아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사장님, 슬퍼······.”
훌쩍.
에리가 눈물을 흘렸다.
“에리쨩. 울지 마.”
옆에 있던 마코토가 그녀의 등을 토닥인다.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몰랐군.”
린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릴 때부터 세이라와 교류는 제법 있었지만, 이 정도로 내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
하루가 침묵한다.
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은 세이라는 언제나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원작 설정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었다.
‘세이라 할머니······.’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언제나 건방지고 장난기 넘치는 하루도 이번만큼은 세이라에게 장난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모두가 숙연해진 상황에서 아리스가 말한다.
“그러니까 후배들도 이사장님, 너무 미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왕 특별 전학생으로 온 거, 잘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리스가 고개를 숙인다.
“부탁드립니다.”
아리스가 고개를 숙이자 에리가 당황한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던, 학생회장이자 학원 최강인 그녀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세이라의 일로.
“아니, 회장 선배. 그렇게 고개 안 숙여도 된다니까. 회장 선배 말대로 하도록 에리링이 노력해볼게! 그치 마코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에리.
그녀가 당황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올리비아만큼은 아니더라도 학원 최강에 학생회장인 아리스 역시 그녀가 내심 동경하던 사람.
그런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에리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어, 응······.”
에리의 말에 마코토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뭐······. 저도 노력해보도록 할게요.”
에리와 마코토 다음으로 반응한 사람은 올리비아.
그녀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인다.
“회장 선배의 말을 따르지.”
“하루도 그럴게.”
마지막으로 린과 하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린다.
“다행입니다. 그럼 우리 이사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후배 여러분.”
아리스의 부탁을 들은 히로인들이 고개를 다시 작게 끄덕였다.
상냥한 라노벨 세상답게 불행한 과거 사정을 듣고 전부 이해하는 히로인들의 모습과 함께 대책 회의가 끝났다.
*
같은 시각.
생도 지도실.
교관과 생도의 일대일 지도를 위해 교무실 옆에 마련된 조그마한 방.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책상 하나를 두고 의자 두 개가 비치된 이곳, 창문을 통해 슈오우 학원의 전경이 비친다.
거기에 한 사람의 교관과 한 사람의 생도가 마주 앉아 있었다.
분홍 머리 미녀 교관, 마유즈미 마유와 보라 머리 미소녀, 호시노 카스미였다.
“마유즈미 선생님. 부르셨어요? 이렇게 선생님이랑 단둘이 있는 것도 꽤 오랜만인 기분이네요. 후후.”
카스미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는다.
“네? 네! 선생님도 오랜만이에요. 호시노 양.”
어색하게 웃는 마유.
“선생님, 제게 무슨 용무라도 있는 걸까요?”
“용무? 네! 물론 있죠!”
다시 돌아온 카스미의 물음에 마유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유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녀의 모습을 본 카스미의 고개가 갸웃한다.
‘마유 선생님, 원래 이런 모습이었던 걸까?’
그녀가 아는 마유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모범적인 교관.
1학년 때, 반에서 겉돌던 그녀를 신경 쓰는 착한 성격이었다.
동시에 눈치 없는 천연 캐릭터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생도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던 그녀였다.
그렇기에 지금 마유의 모습은 카스미에게 어색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마치 뭔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선생님.”
덥석.
카스미가 마유의 손을 잡는다.
마유가 화들짝 놀란다.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마유즈미 선생님은 얼굴에 무슨 생각 하는지 다 티가 나셔서······.”
“네, 네?!”
제자에게 역으로 질문당한 마유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다.
그녀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 그녀가 카스미를 호출한 이유는 요리부에서 정말 검은 귀축이라는 이름 뒤에 따라붙는 소문처럼 파렴치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녀와 친분이 있는 요리부장 카스미에게 요리부 고문 자격으로 은밀하게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고문 교관으로서 부활동 내부의 풍기 문란 행위는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 핑계였다.
그런데 지금 카스미에게 선수를 당한 것이다.
“선생님. 저한테는 숨길 필요 없어요. 선생님과 저는 친하잖아요. 그러니까 고민을 마음껏 털어놔도 괜찮답니다.”
카스미가 환하게 웃는다.
“호시노 양······.”
카스미의 모습을 본 마유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녀의 머릿속에 1학년 시절의 카스미가 떠오른다.
반에서 겉돌던, 아무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던 음침한 소녀.
타인에게 간섭하는 것도, 간섭받는 것도 싫어하던 그녀가 이렇게 변하다니.
“호시노 양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하다니, 선생님. 기뻐요!”
와락.
마유가 카스미를 끌어안는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안긴 카스미가 답답한 듯 마유를 떼어내며 말한다.
“빠, 빨리 말씀해주세요. 선생님.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마시고요.”
카스미는 여자의 직감을 통해 본능적으로 느꼈다.
마유의 태도 변화에는 김덕성이 관련되어있을 거라는 사실을.
안 그래도 수학여행에서 김덕성이 마유를 구했다는 정보를 들은 그녀였다.
그런데 수학여행 이후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면서 고문으로 이름만 올려뒀던 부활동을 이유로 자신을 호출하다니.
역시 수상하다.
‘혹시 선생님께서 후배 군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그럴 수 있다.
후배 군은 나쁘지만 완벽한 남자니까. 그런 남자가 백마 탄 왕자처럼 구원해준다면 반하지 않을 여자는 없다.
게다가 마유즈미 선생님은 24살 독신 노처녀.
그러니 구원받았을 때 더더욱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그건 후배 군한테 구원받은 내가 보장할 수 있어.’
의심은 추측으로,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카스미의 머리가 돌아간다.
지금 그녀는 하렘 계획에 참여한 상황.
하지만 강력한 입지를 구축한 올리비아, 에리, 린이나 유지라는 아군이 존재하는 하루, 에리의 친구인 마코토와는 달리 하렘 계획 내부에서 카스미의 입지는 미약했다.
‘동맹이 필요해.’
하렘 내부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녀에게도 동맹이 필요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카스미의 시야에 들어온 마유 선생은 더없이 훌륭한 전략적 파트너였다.
“호, 호시노 양. 선생님은요, 그 다른 의도는 없고요. 그냥 순수하게 세간에 도는 김 군의 소문 때문에 부장인 호시노 양한테 부활동 고문으로서······.”
그리고 마유 선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은 순간.
카스미는 여자의 감을 통해 확신했다.
“마유즈미 선생님.”
“네?”
“후배 군. 좋아하죠?”
“네, 네에에에?!”
당황하며 놀라는 마유즈미 선생.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 모습을 본 카스미가 그녀의 양손을 덥석 잡으며 말한다.
“그렇다면 혹시······. 저 도와주실 수 있어요?”
“어, 어떻게요?!”
얼떨결에 답한 마유즈미 선생을 본 카스미가 말했다.
“하렘······. 계획이요.”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진 카스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순간.
마유즈미 선생이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한 마유즈미에게 카스미가 무언가 속삭였고, 마유즈미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진의 하렘 계획이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
이인삼각 파트너 뽑기 이후 시간이 꽤 흐른 날 아침.
“······나.”
한참 자는 중인 내 귓가에 아련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침이야! 빨리 일어나 덕성 오빠! 지각이라구! 지각!”
익숙한, 하지만 이 시간에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
이사장의 목소리였다.
이사장?
세이라가 지금 왜 여기 있어.
꿈인가?
비몽사몽한 와중에 내가 다시 잠들려던 순간.
흔들.
“지각이야! 지각!”
누군가 내 몸을 흔든다.
번쩍.
난데없는 스킨십에 눈꺼풀이 떠진다.
그렇게 눈을 뜬 내가 본 것은.
“이제 일어났구나, 꼬마야. 후후. 좋은 아침이니라.”
바르게 누워 있는 내 배 위에 체육복 차림으로 올라탄 백발 적안 미소녀.
요시자키 세이라였다.
잠깐, 내 위에 올라탔다고?
[누님······.]아침부터 흑태자의 탄식이 울린다.
매일 모닝콜처럼 아침잠을 깨우던 흑태자의 목소리가 왜 안 들렸는지 이제 알겠다.
하긴 내가 흑태자라도 이사장이 내 위에 올라타서 아침잠을 깨우는 라이트 노벨, 아니 미연시에나 나올 법한 상황을 눈앞에서 본다면 당황할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세이라가.
“잘 잤느냐? 세라땅은 잘 잤느니라.”
세이라가 요염한 척, 살짝 붉어진 얼굴로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그녀의 무게감이 배 위로 느껴진다.
“아니 이사장님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그건 한서진 씨한테 오늘은 이 몸이 꼬마의 아침잠을 깨워주고 싶다고 말했더니 흔쾌히 들여보내 주더구나.”
한서진이 범인이었다고?
황당하다.
이사장이라는 권력자에게 막 대할 수도 없고.
“잠 다 깼으니까 내려오십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려오라는 말뿐이었다.
“알겠느니라.”
스윽.
내 배 위에서 내려오는 세이라.
그녀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면서 붉어진 얼굴을 검은 레이스 부채로 가리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꼬마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세이라의 말에 내 시선이 반사적으로 달력을 향한다.
오늘 날짜 아래 빈칸에 적힌 학사일정은 체육대회.
그렇다.
오늘이 바로 빌어먹을 체육대회 당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