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
*
결론부터 말하자면, 각성은 성공했다.
연습실에서 자해를 한 보람이 있다.
녹슨 롱소드는 마검 듀랜달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했고 이제 내 소유다.
사소한 문제라면, 반나절을 넘게 기절한 탓에 남은 내 스케줄이 줄줄이 취소됐다는 것.
대통령과의 청와대 조찬, 김덕성 후보생 대국민 송별 콘서트, 김덕성 후보생 사인회, 김덕성 후보생 공항 송별식 같은 의전행사 말이다.
‘천만다행이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청와대 조찬은 그렇다 치자.
송별 콘서트? 사인회? 공항 송별식?
그걸 전부 다 했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정신을 차린 나는 겨우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했고, 입학식에 지각을 아슬아슬하게 면하고 참석했다.
“우리 슈오우 영웅 학원은 전국 최고, 세계 최고의 영웅 교육기관으로서 지금까지 인류를 수호하는 우수한 영웅 인재를···.”
고개를 든다.
시야에 생도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본 라노벨이 현실화된 세계답게, 죄다 총천연색 풀컬러 머리다.
아카데미에서 검은 머리 생도는 나와 주인공 유지, 단둘뿐.
‘마력광 빛깔이 그대로 머리색으로 나타나서 그렇다던가?’
조건반사적으로 원작 설정이 떠오른다.
물론 우리 대단한 주인공은 이 법칙에서 예외다.
‘웃기지도 않는 발상이야.’
일본인 캐릭터의 풀컬러 머리색을 합리화하기 위한 편의주의적 설정.
이딴 게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현실이라는 사실이 어이가 없을 뿐이다.
하, 참. 진짜. 시발.
“신입생 대표,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양. 단상 위로.”
교장이 수석 입학생의 이름을 부른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단상 위로 그녀가 올라온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금빛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새하얀 피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국의 미소녀가 단상 위에 선다.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실사화하면 저렇게 될까?
어쨌건 설정대로 더럽게 예쁜 건 틀림없다.
“선서. 우리는 슈오우 영웅 학원의 교칙을 준수하고······.”
올리비아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운다.
모든 생도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힌다.
내 시선도 그녀에게 향한다.
애니메이션 1기 1화의 장면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날이 오다니.
감회가 새롭다.
“······엄숙히 선서합니다.”
선서가 끝난다.
교장과 올리비아가 인사를 주고받는다.
몸을 돌린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가 강당 안의 생도들을 훑는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친다.
착각이라고? 아니다.
“······.”
왜냐면 올리비아의 눈길이 허리춤의 듀랜달에 정확히 머물렀거든.
메인 히로인과의 뜨거운 아이 컨텍트 시간은 짧았다.
올리비아가 생도들을 향해 목례한다.
“······이상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 이 개 같은 세계는 시작부터 헬 난이도야.
내가 이겼어
슈오우 영웅 학원.
도쿄만 인공섬에 세워진 세계 최고의 영웅 아카데미.
영웅 강국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들만 입학이 허락된 명문 중의 명문.
슈오우 영웅 학원의 입학 수석은 천재 중의 천재를 증명하는 보증 수표.
후보생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영광된 자리.
하지만 올리비아에게는 아니다.
‘오라버니···.’
올리비아가 주먹을 꽉 말아쥔다.
흑태자 라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30년 전의 대재해에서 세계와 조국 프랑스를 구원한 영웅이자, 10년 전 오메가 랭크 이계종 파프니르의 위협에서 그녀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한 남자.
사촌남매지만 그녀를 누구보다 친동생처럼 아껴줬던 사람.
죽은 오빠의 빈자리를 메우려면, 고작 수석 입학 따위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만 한다.
반드시.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문다.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가슴 뛰는 입학식도, 그녀에게는 시시한 통과 의례처럼 느껴지는 건.
교장에게 인사하고 등을 돌린다.
형형색색의 머리색을 가진 생도들이 보인다.
들뜬 기색이 역력한 분위기.
‘실망이야.’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영웅.
초상병기를 다루는 이능력자.
이세계 침공의 최전선에서 인류와 세계를 수호하는 방파제.
하지만 여기 그 누구도, 영웅의 그림자에 뒤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직시하지 않는다.
그저 영웅이라는 이름이 주는 약속된 미래의 부와 명예에 도취되어 있을 뿐.
생도들뿐만이 아니다.
대재해를 끝낸 파이브 크라운즈와 1세대 영웅들의 활약과 희생 덕분에 세계 평화가 찾아온 이후, 영웅과 헌터는 책임을 잊었고 인류는 위기를 잊었다.
게이트와 이세계는 통제 가능한 리스크가 되었고, 이계종은 캐시카우로 전락했다.
‘마음에 안 들어. 전부.’
그런 현실을 올리비아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흑태자 라울의 죽음을 모욕하는 행위와도 같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올리비아가 실망한 눈길을 거두려던 그때.
시야에 검은 머리 생도가 들어온다.
‘검은 머리?’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검은 머리.
그건, 그녀가 동경해 마지않던 오라버니, 흑태자 라울의 머리색.
‘오라버니와 같은 마력광······.’
흑색 마력광이 드물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슈오우 학원에서 검은 머리 생도는 저 남자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검은 머리 생도에게 향한다.
양아치 같은 얼굴과 허리춤에 매달린 칼자루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올리비아의 동공이 커진다. 손이 미미하게 떨린다.
‘듀랜달?’
틀림없다.
마검 듀랜달.
그토록 찾아 헤메던, 오라버니의 유품이 저기 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기억해두죠.’
검은 머리 생도를 직시하며 올리비아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입학식은 끝났다.
*
인생이란 좆같은 거라서, 날로 먹기가 좀처럼 어렵다.
기연도 마찬가지다.
듀랜달은 그냥 물건이 아니다.
메인 히로인이 평생을 찾아 헤멘 아이템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영웅이 쓰던 초상병기다.
그런 물건을 날로 먹었는데, 뒤탈이 안 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따라서, 지금과 같은 상황도 충분히 예상했던 바.
당연히 대책도 있다.
“그 검. 어디서 구했죠?”
단지, 그 시기가 지나치게 빨라졌다는 게 문제다.
입학식이 끝난 강당.
사람이 전부 빠져나가 휑한 장소에서 지금 나는 메인 히로인과 뜨거운 애프터를 가지고 있다.
올리비아의 차가운 시선이 내게 꽂힌다.
자격 없는 자가 힘을 가지는 걸 가장 혐오하는 그녀다운 표정.
아, 애니로 봤을 때는 업계 포상이었는데.
“나라에서 사줬는데.”
입에서 유창한 일본어가 튀어나온다.
내가 흡수한 김덕성의 기억과 경험 중에서 가장 쓸모 있는 부분이 원어민 뺨치는 일본어, 영어 실력이다.
“나라에서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못 믿겠으면 여기 보증서 있으니까 확인해보던가.”
미리 준비해둔 보증서를 그녀에게 내민다.
이 세계의 한국은 영웅 약소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엄연한 국가.
자국의 유일한 영웅 후보생을 위해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주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이 설령 일국의 신용을 나라는 개인을 위해 사용하는 일이라도 말이다.
‘보증서 발급 정도야, 아주 쉬운 일이지.’
일본어와 영어로 된 보증서를 읽는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떨린다.
“이제 궁금증은 좀 풀렸냐?”
“······듀랜달은 오라버니의 유품···.”
그녀가 입술을 우물댄다.
한숨이 나온다.
이럴 줄 알았다.
그 올리비아가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지.
오히려 여기서 물러났으면 캐붕이다. 캐붕.
“그래서?”
“자격 없는 자의 손에는······. 절대 맡길 수 없어요.”
“힘의 논리로 나오시겠다?”
나는 팔짱을 끼며 비아냥댔다.
“힘의 논리가 아니에요.”
올리비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결투로 당신의 자격을 시험하겠어요.”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힘의 논리로 가야겠죠.”
올리비아가 통보하듯 말하며 입을 닫는다.
내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내가 한국에서 절대 갑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에서의 얘기.
세계 레벨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올리비아가 영웅 강국 프랑스의 후광을 등에 업고 날 압박한다면?
보증서는 휴지 조각으로 변하고, 나는 듀랜달을 토해내야겠지
그녀가 말하는 힘의 논리란, 그런 거다.
방구석 여포는 오늘도 서럽다.
“하, 씨발 좆같네.”
한국어로 욕을 내뱉는다.
상황은 딱 예상대로 흘러간다.
문제라면, 내 기분이 더럽다.
날강도가 따로 없네.
“뭐라 말하셨나요?”
올리비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심호흡을 한다.
달아오른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흥분은 안 된다. 일을 그르친다.
나는 아무 대책 없이 듀랜달을 집어먹은 게 아니다.
해볼 만하니까 한 거지.
이제 거의 다 왔다.
다시 일본어로 말한다.
“아냐. 아무것도. 시험? 그래. 좋아. 다 좋은데. C랭크인 내가 A랭크인 너랑 결투? 이거 너무 불공정한 거 아니냐?”
그녀의 얼굴이 굳는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네 마력량에 핸디캡을 두자고. 나랑 같은 수준으로.”
마력량 핸디캡.
내가 준비한 독이 든 미끼를, 그녀는 물 것이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왜냐면.
“···그 정도라면.”
여기는 인간의 선의를 절대 의심하지 않는 ‘상냥한’ 라노벨 월드니까.
어처구니없지만, 그렇게 돼먹은 세계다.
“상관없어요.”
그녀의 대답이 떨어진다.
“좋아.”
웃음이 나온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설마 이기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무승부.”
올리비아가 딱 잘라 말한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런데 내가 널 이긴다면?”
“그럴 일은 없어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 집요한 질문에 올리비아가 경멸어린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된다면······. 그때는 제가 당신의 전속 시녀라도 되어주죠.”
“진심이지?”
“황가의 이름을 걸고, 허언은 하지 않아요.”
재차 묻자 다시 돌아오는 확답.
뭐, 그녀의 확신이 틀린 건 아니다.
아무리 마력량 핸디캡 결투라고는 해도, 그녀는 프랑스 최고의 기재.
운 좋게 듀랜달을 얻은 약소국의 후보생과 자신은 기본적인 재능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듀랜달의 전력을 이끌어낼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게 아닌데 말이야.
뭐 내 알 바는 아니다.
그녀가 전속 시녀 운운하는 라노벨 클리셰 대사를 한 것도, 내 알 바 아니고.
하여간, 누가 라노벨 월드 아니랄까 봐.
“알았어.”
허리춤에 매달린 듀랜달을 뽑는다.
스르릉.
서늘한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움찔.
듀랜달을 본 올리비아의 동공이 흔들린다.
“귀찮으니까 후딱 끝내자고.”
우웅.
마력을 일으킨다.
가슴 속 마력로가 달아오른다.
마력 회로를 통해 흐르는 마력을 듀랜달이 아귀처럼 집어삼킨다.
푸슉.
마력을 집어삼킨 칼날에서 증기가 피어오른다.
철컥, 철컥.
검을 쥔 오른손부터 시작해서 순식간에 온몸에 흑광이 반짝이는 장갑이 뒤덮인다.
우우웅.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흑색 전신 장갑 위로 마력장이 한 꺼풀 덧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