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02)
제 300화
할머니의 손맛
쿠궁.
애니메이션 효과음과 함께 세이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 하루야. 지금 뭐라고 했느냐?”
“메뉴 선정 완전 촌스러워. 초 웃기다고. 니시시시. 홍삼 젤리는 또 뭐야. 완전 웃겨.”
하루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세라땅 할머니 도시락이랑 하루의 초 귀여운 JK 느낌 듬뿍 도시락이랑 완전 비교되잖아? 니시시.”
스윽.
하루가 귀여운 곰돌이 캐릭터 도시락을 내민다.
“흠흠. 확실히 메뉴 선정이 좀 고풍스러운 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의 말에 헛기침하는 린.
“맞아. 이사장님. 에리링도 약간 올드하다고 생각해.”
에리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 그래도 맛은 있지 않을까? 시골 할머니의 손맛 같은······.”
옆에서 마코토가 에리에게 말한다.
하필 시골 할머니의 손맛이라니.
마코토 얘는 진심 위로하려고 저렇게 말한 거 맞나.
“볼 것도 없군요. 제 도시락의 승리예요! 오호호호호호호호! 역시 무적과 불패의 보나파르트 황실!”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승리 선언을 한다.
확실히 그녀의 4단 찬합 한식 도시락은 제법 맛있어 보였다.
“으으으읏······.”
세이라가 입술을 깨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다.
“······꼬마야.”
세이라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저, 정말 내 도시락이 그렇게 벼, 별로더냐······?”
말을 더듬는 세이라.
진심으로 충격받은 모양인지 손이 파르르 떨린다.
세이라가 내놓은 메뉴를 본다.
연근조림, 우엉당근조림, 연어무조림, 전갱이구이, 매실장아찌가 올라간 흰 쌀밥.
보온병에 담긴 말차와 양갱, 홍삼 젤리까지.
확실히 센스가 좀 낡은 느낌이기는 하다.
한국으로 친다면 계란 프라이, 볶음김치, 분홍 소시지, 멸치볶음에 김 가루와 하얀 쌀밥을 양은 도시락통에 담은, 일명 추억의 도시락과 비슷한 구성.
[옛날 생각나는데. 누님, 옛날부터 연근조림을 참 좋아하셨지······. 파트너, 음식에는 죄가 없어. 누님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니까 너무 막 대하지 말라고.]흑태자가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흑태자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실제로 세이라가 좋아하는 음식은 말차, 양갱, 연근조림이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니까 제법 잘 한다는 설정도 있었고.
오랜 경륜 때문인지 설정집에 적힌 세이라의 요리 실력은 압도적 1위인 에리 바로 다음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요리 실력으로 한다는 요리가 죄다 저런 낡은 센스의 옛날 요리라서 그렇지.
막 대하다니,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게다가 나는 추억의 도시락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대학생 시절 점심을 저렴하게 때우려고 종종 사서 먹은 기억이 있었다.
“우선 맛부터 봅시다.”
“그, 그래! 자. 여기 있다.”
세이라가 내게 젓가락을 건넨다.
모두의 시선이 내 젓가락에 향한다.
꿀꺽.
세이라가 마른침을 삼키면서 이쪽을 바라본다.
연근조림을 하나 집어서 입 안에 넣는다.
“어, 어떠냐? 꼬마야.”
단짠단짠한 맛과 연근이 부서지는 식감이 입 안에서 느껴진다.
“맛있네요.”
“후후후. 다행이구나. 역시 이 몸의 요리 실력은 녹슬지 않았어.”
내 칭찬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쭐한 표정으로 가슴을 펴는 세이라.
“우리 덕성 오빠, 사람이 완전 착해. 니시시시. 노인 공경도 할 줄 알고.”
그 모습을 본 하루가 웃는다.
노인 공경?
“하루야. 노인 공경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더냐?”
“니시시시. 세라땅 할머니. 현실 부정하는 거야?”
“훗. 이 몸의 요리를 맛보고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의외로 강하게 나가는 세이라.
척.
그녀가 도시락을 펼쳐놓는다.
“자, 다들 맛보고 감탄하거라! 이 몸의 위대한 요리 실력에!”
하루의 도발에 강하게 나가는 세이라.
“흐응······.”
하루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쿠로사와 일족의 막내딸이던 하루는 당연히 세이라와 린, 협회장과 모두 안면이 있다는 설정.
어렸을 때 세이라의 손요리를 맛본 기억이 있을 텐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지금도 같이 사는 걸로 아는데, 혹시 세이라가 하루에게 요리를 안 해 주나?
하루가 젓가락을 집어서 연어무조림을 맛본다.
“어떠냐? 하루. 이 몸의 진심 요리는?”
“······쳇. 뭐야, 세라땅 할머니. 왜 평소보다 훨씬 맛있어? 설마 세라땅 할머니, 끼 부린 거야? 덕성 오빠한테? 초 어이없어. 니시시시.”
하루가 웃으며 말한다.
그녀의 말에 세이라의 얼굴이 굳었다가 풀린다.
“훗. 그래도 맛있었지? 이 몸의 음식. 자, 다른 아이들도 함께 먹어도 좋으니라. 후후. 도시락은 모두가 먹고도 남을 만큼 싸 왔으니까 말이다.”
세이라가 음식을 펼친다.
“세라땅 할머니도 어쩔 수 없는 할머니구나? 음식 만들 때 손이 큰 걸 보면. 니시시시.”
그 모습을 본 하루가 웃고, 세이라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던 그때.
“잘 먹겠습니다. 이사장님.”
싸늘해진 분위기를 린이 깨뜨린다.
그녀가 젓가락을 들어 세이라의 우엉당근조림을 집어 먹는다.
“맛있습니다.”
“훗.”
린의 칭찬에 기분이 살짝 좋은 것인지 얼굴을 붉힌 채 부채를 펼치는 세이라.
그 모습을 보며 젓가락을 든 그때.
“이봐요 당신! 제 도시락도 먹어봐요!”
“주인님! 나랑 마코삐 도시락도! 맛봐줘!”
“주군······.”
올리비아, 에리, 마코토가 각자 만든 도시락을 내 앞에 들이댄다.
“덕성, 내 것도······.”
“오빠! 귀여운 JK의 수제 도시락, 맛 안 볼 거야? 니시시시. 모두가 초 부러워하는 JK의 수제 도시락을 맛볼 절호의 기회라고!”
뒤이어 린과 하루까지.
내 앞에 놓인 도시락통을 보니 속으로 한숨이 나온다.
오후에 기마전도 해야 하는데.
이걸 다 먹고 가능하려나?
그래도 나름대로 정성껏 차린 도시락인데 안 먹는 건 좀 그렇다.
‘맛이라도 봐야지.’
[오, 파트너. 많이 상냥해졌는데? 매일 조금씩 이상적인 신사의 모습을 향해 다가가고 있어.]흑태자의 헛소리를 무시하면서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입 안에 넣는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다.
“맛있네.”
누구의 도시락 할 것 없이 모든 음식이 대부분 다 맛있다.
심지어 한때 독극물을 내놓던 요리치였던 린의 도시락마저도 오늘은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히로인들의 표정이 활짝 펴진다.
그녀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도시락을 먹는다.
그래서 오후는 결국 어쩌지?
*
점심을 모두 먹은 후.
파라솔이 만들어낸 서늘한 그늘 밑에서 올리비아가 후식으로 준비한 과일, 세이라가 후식으로 준비한 양갱과 말차를 마시고 있을 때쯤.
“주인님!”
에리가 나를 불렀다.
“기마전 조, 어떻게 할 거야?”
에리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체육대회의 마지막 종목이자 유일하게 기프트, 마력 사용이 허가되는 종목인 기마전은 슈오우 학원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
규칙은 일반적인 기마전과 별로 다를 바 없다.
4인 1조로 구성되며, 위에 올라탄 기수의 머리띠를 빼앗으면 해당 조는 탈락하는 규정.
차이점이라면 슈오우 학원의 기마전은 홍팀과 백팀의 모든 인원이 4인 1조로 나뉘어 참전하는 흡사 전쟁을 연상시키는 대규모 이능력 전투라는 거겠지.
애니메이션에서도 화려한 작화로 구현된 체육대회 에피소드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라이트 노벨 에피소드 절정이 다 그렇듯, 기마전 도중에 메인 빌런인 무라마사가 난입해서 체육대회는 도중에 중단된다.
하여간 아카데미물이고 학원물이고 간에 제대로 끝까지 진행되는 학교 행사는 하나도 없다.
이쯤 되면 학교 행사를 안 여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건 원작과는 달리 무라마사는 이미 서울에서 격퇴당한 상황.
수학여행 때처럼 다른 빌런이 쳐들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여기는 도쿄 한복판.
일본의 수도다.
그때와는 다르게 일본 영웅 협회를 비롯한 일본 영웅 전력 대부분이 모여 있고, 일련의 사건 때문에 학원 보안 역시 강화됐으니 돌발 상황에 수학여행 때처럼 무기력하게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게 내 희망 사항이다.
또 일이 터지면 그때는 수습해야겠지만.
“주인님. 역시 기마전에서는 당연히 에리링이랑 같은 조 할 거지? 에리링! 주인님 밑에 깔리고 싶어!”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에리의 목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깨운다.
잠깐 뭐?
내 밑에 깔리고 싶다고?
당당하게 번쩍 손을 들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에리 덕분에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인다.
“히익! 은하 랭크 미소녀를 기마전에서 깔고 앉는다니?!”
“검은 귀축, 밤에도 모자라서 이제는 낮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해버릴 작정인 거야?! 학원의 아이돌을 발닦개 취급하다니!”
“은하 랭크 미소녀이자 학원 제일의 아이돌인 에리 님의 몸도 마음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셈인 거야?! 검은 귀축, 정말 피도 눈물도 없어!”
“어쩐지 주인님이라는 호칭부터가 수상했어.”
“검은 귀축······. 완전 색골! 색마!”
엑스트라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군! 나도! 나도 에리쨩이랑 같이 잘 깔릴 자신 있어!”
뒤이어 마코토가 눈을 반짝이면서 손을 든다.
잘 깔릴 자신이 있다고?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듣는 거지?
머리가 어지럽다.
이건 원작에서도 없던 전개.
원작 주인공은 히로인들 대신 이시하라를 포함한 남자 3명과 한 조가 돼서 선봉에서 백팀과 맞선다.
히로인들은 히로인들이나 엑스트라 여생도와 같은 조로 기마전에 참여했고.
그런데 이제 와서 다들 나랑 같은 조가, 심지어 나를 기수로 떠받들겠다고?
원작을 초월한 라노벨 전개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다.
“다들 비켜라! 덕성. 나야말로 너에게 깔릴 적임자다. 너만 원한다면 내 푹신하고 풍만한 가슴과 몸으로 너의 전부를 떠받치겠다!”
린이 입술을 깨물면서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흔들린다.
아니 뭘 떠받쳐, 떠받치기는.
“니시시시. 언니들 비켜. 덕성 오빠, 당연히 하루를 선택할 거지? 초 귀여운 JK를 깔고 앉을 절호의 기회!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구! 하루,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덕성 오빠라면 기쁘게 몸을 허락해줄 수 있을지도? 니시시시.”
하루가 얼굴을 붉히면서 손으로 입을 가린다.
“다들 조용히 해요! 흥! 저 바보를 시중드는 건 전속 시녀인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의무! 당연히 기마전에서 저 바보를 떠받치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당신들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요! 아시겠나요?!”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말한다.
올리비아, 너마저.
그 빌어먹을 전속 시녀 이야기는 이제 좀 그만 듣고 싶은데.
[······.]라노벨 세상에서도 받아들이기 버거운 전개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흑태자마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내 밑에 깔리고 싶다는, 차마 귀로 듣기 참담하고 쪽팔리는 논쟁이 이어지려던 그때.
“다들 그만. 이게 무슨 짓이더냐.”
세이라가 조용히, 근엄한 목소리로 한 마디 내뱉는다.
[오오······. 누님! 드디어······. 연장자의 연륜을······.]머릿속에서 흑태자가 탄성을 터뜨리던 그때.
촤르륵.
세이라가 검은 레이스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말한다.
“······너희들이 그렇게 우겨대면 꼬마 입장에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모두한테 공평하게 제비뽑기로 결정하자꾸나.”
탁.
세이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돗자리 위에 제비뽑기 통을 내려놓는다.
[아아······. 누님······.]머릿속에서 흑태자의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이사장님도 하는 거였냐고.
기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