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22)
제 320화
악마의 속삭임
데이트 신청권을 본 한서진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한서진이 평소의 사무적인 말투와는 다른,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녀의 시선이 데이트 신청권에 고정된다.
쟤 왜 저러지?
“데이트······. 라고 말하면 좀 그런가. 아무튼 크리스마스 날 나랑 같이 보내줘야겠어. 이거. 누구 특정한 사람 한 명한테 쓰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안 쓰기도 좀 그래서.”
나는 한서진의 눈앞에서 데이트 신청권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서진이라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지명 대상일 터.
[오오. 파트너. 꽤 영리한 선택인데? 한서진 양이라면······. 그래, 나쁜 선택은 아니야.]머릿속에서 흑태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내 말을 들은 한서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돈다.
매번 사무적으로 대하던 평소와는 다른 반응.
뭐지?
“너 괜찮냐?”
어디 아픈가?
내 시선을 본 한서진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가라앉는다.
“아······. 괜찮습니다.”
한서진이 가볍게 양쪽 뺨을 찰싹 두드린다.
그녀가 허리를 90도로 숙인다.
“심려를 끼친 점, 죄송합니다. 김덕성 님.”
“아니. 죄송할 필요까지는 없고, 그래서 대답은? 할 거야 말 거야. 크리스마스 데이트.”
여기서 한서진이 거절하면 어쩔 수 없이 데이트 신청권을 무효로 만들 수밖에 없다.
“······.”
고개를 숙인 한서진이 침묵을 지킨다.
오늘따라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그녀의 반응.
뭔가 수상한데.
“······죄송하지만 제게 내일까지 김덕성 님의 영광스러운 제안을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한서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어차피 크리스마스까지는 시간이 꽤 남은 상황.
못 기다릴 것도 없다.
“그래.”
한서진의 제안을 수락한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오늘은 이만 일찍 물러나겠습니다.”
한서진이 내게 공손하게 인사한 뒤에 자리를 뜬다.
탁.
기숙사 문이 닫히고, 혼자 남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12월의 밤.
눈이 펑펑 내리는 바깥 풍경이 보인다.
‘벌써 2학기도 끝인가······.’
2학기제를 채택한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고등학교는 3학기제.
2학기를 끝내고, 겨울방학을 지나 봄에 마지막 학기인 3학기를 마무리해야 수료식과 함께 한 학년을 끝낼 수 있다.
‘정말 얼마 안 남았군.’
원작 최종 에피소드인 학원 부수기는 3학기 시점, 정확히는 발렌타인 데이 이후 일어나는 에피소드.
최약영웅 원작 본편 마지막 배경은 3학기 이후 주인공과 히로인들의 1학년 수료식 장면.
원작 스토리도 이제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 것이다.
체육대회 이후 수상하게 리그가 잠잠했지만,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제 곧 메사이어의 면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파트너 얼마 안 남았어. 3학기는 좀 더 힘내보자고.]내가 말했던 끝은 2학기를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굳이 오해를 정정해줄 필요는 없다.
흑태자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나는 눈이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모양이다.
하긴, 원작에서도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지.
*
슈오우 영웅 학원.
기숙사, 사용인 숙소.
탁.
사용인 숙소의 문을 닫은 한서진이 그대로 미끄러져 주저앉는다.
두근, 두근.
고장난 것처럼 뛰는 심장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다.
탁.
한서진이 들어서자 숙소 내부의 불이 저절로 켜진다.
꽤 넓은 방 안, 벽에는 온통 김덕성 포스터가 붙어 있다.
컴퓨터가 있는 책상 위에는 김덕성 장패드, 김덕성 인형이 있는 건 물론, 침대 위에 놓인 이불도 김덕성 이불에 화장실 문 앞에 걸린 김덕성 족자까지.
김덕성 굿즈로 뒤덮인 방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데이트 신청이라니······.’
한서진의 머릿속에 아까 김덕성이 내민 데이트 신청권이 선명히 떠오른다.
더불어 그가 한 제안도.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달라니.
몸과 마음을 바쳐 김덕성을 섬기는 한서진에게 있어서, 그의 제안은 심장을 고장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물론 한서진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김덕성의 제안에 숨겨진 진의가 데이트가 아니라는 점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 누구 한 명을 지명한다는 것은 다른 하렘 멤버들의 반발을 부르기에 충분했으니까.
하렘 계획도 이제 슬슬 막바지에 도달했지만, 군대에서 말년 병장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는 것처럼, 계획 역시 마지막 단계가 가장 조심스러운 법.
지금은 최대한 신중을 기울이는 게 맞다.
그런 의미에서 김덕성이 자신을 지명한 건 최선은 아니고 차선이었다.
‘최선은 모든 분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
한서진이 생각한 최선책은 모두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파티로 보내는 것.
그렇기에 오늘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제안했어야 했건만, 한서진은 그럴 수 없었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뛴다.
한서진의 귓가에 악마의 속삭임이 들린다.
‘그분께서 직접 제안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도 거부할 리 없을 터. 명분도 훌륭하니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서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악마의 속삭임.
그와 함께 계속해서 올라가는 심장 박동수.
한서진의 얼굴이 빨개진다.
“으으으으······.”
한서진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언제나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 데이트 신청권을 받은 순간, 모든 가면이 무너졌다.
지금까지 잘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한 사심이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와 마음을 휩쓸고 있었다.
더욱이 악마의 속삭임에는 틀린 말도 없었다.
지금까지 한서진이 하렘 멤버들 사이에서 사심을 내비친 일은 거의 없었다.
김덕성과 단둘이 무언가 사적으로 시간을 보낸 적도 아예 없었다.
거기에 그녀의 포지션은 공교롭게도 김덕성의 전담 보좌 요원.
전속 시녀 같은 역할이기 때문에, 설령 크리스마스에 자신이 선택받는다 한들 불만을 터뜨리는 하렘 멤버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응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악마의 속삭임을 한서진이 고개를 젓는다.
자신 따위가 감히 그분과 단독으로 사적인 시간을 보내다니.
그것도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에.
그건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는 자격이 없다.
그러니 크리스마스 파티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한서진의 마음속 악마가 속삭인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당황한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한서진이 혼잣말을 내뱉은 그때.
딩동.
초인종 소리와 함께 인터폰이 켜진다.
[한서진 씨. 계십니까?]인터폰에 비친 사람은 메이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올리비아의 전속 시녀 벨라.
그녀의 옆방 입주민이었다.
벨라의 등장에 한서진이 화들짝 놀란다.
“흠흠.”
그녀가 헛기침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문을 연다.
“있습니다. 벨라 씨. 무슨 일입니까?”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 한서진.
그녀의 표정을 살핀 갈색 보브컷 무표정 메이드 미녀, 벨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는다.
벨라가 말한다.
“······아가씨께 드릴 다과를 구웠는데 여분이 조금 남았습니다. 그래서 한서진 씨와 함께 사용인 휴게실에서 함께 차라도 한잔 들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벨라가 한쪽 손에 과자와 찻주전자가 든 바구니를 들어 보인다.
“그렇군요.”
한서진의 시선이 벨라의 얼굴과 다과가 담긴 바구니로 향한다.
하렘 계획 멤버만큼은 아니지만, 벨라는 B랭크 영웅인데다 하렘 계획의 주요 인물인 올리비아의 전속 시녀이니만큼, 우호적인 친분을 쌓아야만 하는 사이.
그렇기에 한서진은 입학 직후부터 옆 방에 배치된 벨라와 이웃이라자 같은 사용인이라는 명분으로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친분을 쌓고 있었다.
그녀들의 관계는 올리비아의 약혼 소동을 계기로 한층 진전되었고, 이렇게 서로 티 타임을 가지는 관계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벨라와의 티 타임은 하렘 계획의 설계자로서, 그리고 김덕성의 전담 비서와 국정원 요원으로서 빠질 수 없는 일.
하지만 오늘만큼은 머리가 복잡한 탓에 차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저는 오늘 괜찮습······.”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한서진의 말허리를 자르는 벨라.
그녀의 무표정한 시선이 한서진을 향한다.
“아닙니다. 그건······.”
“있어 보이는군요. 이럴 때는 차라도 한잔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리고 모처럼 잡은 등장 기회인데 제 분량을 여기서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서진 씨.”
벨라가 영문 모를 말을 하면서 한서진의 손목을 잡아서 방에서 끌어낸다.
탁.
한서진의 방문이 닫힌다.
그렇게 한서진이 반쯤 강제로 벨라에게 끌려 와서 도착한 곳은 사용인 숙소 건물 내부 휴게실.
최신식,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슈오우 영웅 학원답게, 사용인 휴게실 역시 웬만한 대기업 사원 휴게실 뺨칠 정도로 고급스러운 시설을 자랑했다.
잘 갖춰진 실내 정원, 눈이 펑펑 내리는 교정이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를 배경으로 벽난로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휴게실 내부 테이블.
한서진을 자리에 앉힌 벨라가 바구니에서 주섬주섬 다과를 꺼낸 뒤,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내놓고 홍차를 따른다.
쪼르르르.
따뜻한 홍차가 한서진 앞에 놓인 하얀 본차이나 도자기 찻잔에 담긴다.
“그래서, 어떤 고민을 품고 있는 겁니까? 당신이 고민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한서진 씨.”
벨라의 갈색 눈동자가 한서진에게 향한다.
프랑스를 통치하는 명예로운 보나파르트 황실의 전속 시녀인 그녀의 시선에도 한서진은 그야말로 완벽한 사용인이었다.
보나파르트 황실을 보좌하는 이름 높은 시종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을 수준으로 우수하고 유능한 사용인.
그런 만능 사용인인 한서진에게 고민이라니.
한서진과 오래 알고 지낸 벨라였지만, 저런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한서진이 움찔한다.
한서진이 손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매만진다.
“고민이라니요······.”
그녀가 말끝을 흐린다.
한서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벨라는 무조건 우호적으로 지내서 포섭해야 하는 인물.
여기서 나쁜 인상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고민을 털어놔도 괜찮은 것인가?
“한국 속담에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서진 씨가 품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함께 고민해드리겠습니다. 혼자 고민해서는 아무 것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벨라가 그렇게 말하면서 우아하게 홍차를 마신다.
“······.”
벨라의 말에 한서진이 침묵한다.
그런 한서진을 바라보던 벨라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한서진이 저렇게 동요하는 고민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그녀가 모시는 주인, 김덕성에 관한 고민일 터.
게다가 곧 크리스마스라면······.
머릿속에서 모든 가능성을 조합한 벨라가 한서진을 향해 말한다.
“혹시 주인님의 주인님께서 한서진 씨께 크리스마스 밀회라도 제안한 것입니까?”
푸웁.
벨라의 말에 한서진이 먹던 홍차를 뿜어냈다.
한서진이 뿜어낸 홍차가 벨라의 얼굴과 어깨에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