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4)
그냥 한서진도 공개 동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미천한 제게 벚꽃 축제 인솔을 맡기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착.
그녀가 군인처럼 경례한다.
한서진의 회색 눈동자가 존경심으로 반짝인다.
확실히 국정원 요원답게 유능하기는 하지만, 사이비 종교 광신도 같은 모습을 보면 가끔 부담스럽다.
대체 내가 뭐라고 저렇게 기대를 하는 건지.
“나 말고 먼저 온 사람은 없냐?”
“있습니······.”
“바로 저예요!”
한서진의 말허리를 자르고, 중형버스의 문이 열리며 올리비아가 내린다.
그녀의 화사한 백금발이 오전의 태양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제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구요!”
올리비아가 착하고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아가씨께서는 한서진 씨가 모는 버스가 오기도 전에 미리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 뒤로 올리비아의 전속 메이드, 벨라가 내리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한다.
“벨라! 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구요! 정말!”
어김없이 태클을 거는 올리비아.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다.
프랑스의 황녀로 태어난 올리비아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나들이를 해본 적 없다는 설정.
그래서 원작에서도 벚꽃 축제를 상당히 기대했다.
잠을 설칠 정도로.
“그래. 일찍 와서 고맙네.”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건넨다.
“흥. 당연한 감사 인사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신이야말로 늦었다구요! 정말이지······.”
“아가씨께서는 주인님의 주인님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까 제가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라고 했죠!”
이 정도 말다툼은 이제 괜찮다.
나에게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 메이드랑 투닥대는 거니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익숙해진 하이톤 목소리를 들으면서 남은 일행을 기다린다.
“김덕성 님. 콜라, 여기 있습니다. 목이 마를까 봐 미리 준비했습니다.”
한서진이 내게 공손하게 콜라 한 캔을 바친다.
“그래.”
그녀가 건넨 콜라를 딴다.
치익.
탄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콜라의 청량한 맛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간다.
다른 놈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김! 나 왔어.”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주인공 놈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 금발 태닝 양아치, 이시하라도 함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시하라를 데리고 오겠다더니, 약속을 지킨 모양이다.
“추, 축제 초대해주셔서 영광임다······.”
전형적인 양아치 말투로 어색한 존댓말을 하는 이시하라.
그날 이후 쭉 이런 식이다.
양아치조차 약속을 잘 지키는 라노벨 세계답다.
둘 다 등에 배낭을 메고 있다.
도시락을 싸온 거겠지.
“그래. 어서 와라.”
두 남정네를 차에 태운다.
이제 남은 건 시노자키 린 뿐.
캔 안의 콜라가 다 떨어져갈 때쯤, 저 멀리서 남색 포니테일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노자키 린이다.
“와, 왔다. 늦은 건 아니겠지?”
손에 보자기를 들고 있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타라.”
“알겠다.”
군말 없이 타는 시노자키 린.
일단 공식 멤버는 전부 모였다.
이제 남은 건 불청객을 확인하는 일뿐.
버스에 오르는 척하면서 뒤를 돌아본다.
저 멀리, 바바리코트에 중절모를 푹 눌러쓰고 얼굴에는 선글라스와 하얀 마스크를 착용한 주황 머리 트윈테일 미소녀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스쿠터에 시동을 거는 모습이 보인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미행 복장.
니시자와 에리다.
‘저렇게 입으면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봐도 제일 수상해 보이는 복장인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버스 안에 탑승한다.
멤버가 모두 모였으니,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
도쿄 키치죠지.
이노카시라 공원.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일본 최초의 교외공원이자, 도쿄 시민들의 쉼터이며 벚꽃 축제로 유명한 명소답게 공원 내부 풍경은 꽤 절경이었다.
흐트러지게 피어오른 분홍빛 벚꽃과 어우러지는 잔디밭의 녹음, 공원 내로 흐르는 개울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거랑 똑같이 생겼군.’
나는 관심이 없어서 해본 적 없지만, 새삼스럽게 왜 성지 순례를 하는 건지 알 거 같다.
문제라면 명소답게 관광객들도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다는 점.
찰칵, 찰칵.
길을 걸을 때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린다.
벚꽃길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래서야 풍경 말고는 한국에서 열리던 벚꽃 축제랑 별다를 게 없다.
벚꽃놀이는 중간고사 기간에 딱 한 번 대학교 동기들이랑 공부 때려치우고 가봤는데, 거기서도 노점상에 잔디밭 위에서 막걸리 술판 벌이는 관광객들까지 개판이었다.
“벚꽃 축제, 생각보다 시끄럽군요.”
옆에서 올리비아가 투덜댄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괜찮다.
나도 같은 마음이기도 하고.
사람 많은 데는 딱 질색이다.
원작의 그 일만 아니었으면 오지도 않았다.
“그럼 대체 어떤 걸 기대한 거지? 보나파르트.”
다른 쪽 옆에 서 있던 시노자키 린이 차가운 표정으로 으르렁댄다.
“제가 뭘 기대하던 그쪽이 무슨 상관이죠? 말 걸지 말아 주실래요? 기분 나쁘니까요.”
“너한테 말을 건 게 아니다.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아줬을 뿐.”
“이이이이익!!”
또 이런다. 또.
올리비아가 소리를 지르자 주변인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두 사람이다.
그런데 매번 저렇게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니 어그로가 계속 끌리는 건 당연지사.
머리가 아프다.
정말 매번 겪지만, 그때마다 매번 쪽팔린다.
이게 대체 몇 번째 난리인지.
그냥 둘 중 한 명을 안 데려올 걸 그랬나?
시노자키 린을 맡아야 할 주인공 놈과 이시하라는 길가 옆 개울을 보며 자기들끼리 친목질을 하고 있다.
“여기 풍경 멋있지 않아?”
“내 생각도 그런데. 너,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녀석이구나?”
찰칵대며 폰카로 벚꽃이 핀 개울을 찍는 주인공 놈.
개판이다. 개판.
한숨이 나온다.
혹시나 해서 뒤를 둘러본다.
“!!”
화들짝 놀라며 벚나무 뒤로 황급히 숨는 바바리코트 자락이 보인다.
벚나무 줄기 뒤로 니시자와 에리의 주황빛 트윈테일이 흔들린다.
내가 유도하기는 했지만, 너무 예상대로 나오니까 어이가 없다.
“곧 점심시간이다.”
니시자와 에리를 보고 있던 내 귓가에 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슬슬 돗자리를 깔 만한 장소를 찾아보는 게 어떤가?”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본다.
정오를 가리키는 휴대폰 시계.
린의 말대로 점심시간이다.
“이번만큼은 그쪽 말에 찬성해드리죠.”
“너한테 한 말이 아니다. 보나파르트.”
“그건 제가 할 말이거든요?!”
둘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원작 내용을 떠올린다.
원작 1권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건 주인공이 잔디밭에서 점심을 먹고, 올리비아와 함께 호수에서 나룻배를 타며 뱃놀이를 하던 오후쯤.
물속에서 생성된 게이트가 호수 전체를 뒤덮고, 수생 이계종이 등장하며 평화롭던 공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곧이로군.’
점심을 먹고, 손에 당고를 들고 뱃놀이를 하다 보면 놈이 나타날 거다.
바로 어제까지 직접 카스미 선배에게 확인받은 사항이니 어긋날 일은 없을 터.
게이트가 나타나자마자 클리어하고, 원작과는 다르게 버쳐를 처리하면 모든 게 끝난다.
‘좋아.’
계획을 다시 점검한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잔디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과 올리비아가 점심을 먹던 곳이다.
원래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공터인 모양인지, 많은 관광객이 돗자리를 깐 채로 점심을 먹고 있다.
“저기 가자.”
“좋아요!”
“알겠다.”
옆에서 린과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행을 전부 이끌고 잔디밭으로 향한다.
“돗자리 세팅하겠습니다.”
한서진이 순식간에 자리를 세팅한다.
넓은 돗자리 위에 불청객 니시자와 에리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앉는다.
올리비아와 전속 메이드 벨라. 나와 한서진, 이시하라와 주인공 유지, 시노자키 린까지.
총합 7명의 대인원이다.
따가운 햇살을 가리는 벚나무 그늘.
잔디밭 근처에 흩날리는 벚꽃의 모습과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선선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생각보다 분위기도 풍경도 마음에 든다.
문득 초등학생 시절 갔던 소풍이 떠오른다.
우리 집안이 아직은 아무도 안 아프고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
엄마가 싸준 김밥이 참 맛있었는데. 역시 그때 잘해드렸어야 했다.
“기, 김덕성.”
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너, 너를 위해 내가 직접! 내 손으로 도시락을 만들었다. 어떤가?”
달카닥.
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도시락 두 통을 연다.
한 통에는 새하얀 밥 위에 놓인 빨간 매실 장아찌.
반찬 통에는 가지런히 정돈된, 문어 모양으로 잘린 비엔나 소시지, 노랗고 두툼한 계란말이와 멘치까스, 새우튀김이 보인다.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일본식 도시락이다.
“직접?”
“그, 그렇다!”
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딱 봐도 구라가 분명하다.
무려 공식 설정집 프로필에 가사를 제대로 못한다고 적혀 있는 히로인이 직접 요리를 만들었을 리가 없다.
보나마나 가문 전속 요리사가 90% 이상, 아니 100% 만들었겠지.
이것도 그 유혹하기 작전인가 뭔가의 일환인 게 분명하다.
음흉한 당주 아재 같으니라고.
“김치찌개는 전골 요리라 싸 오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터. 어서 먹어라!”
강요하듯 결연한 표정으로 도시락을 들이미는 린.
누가 보면 전쟁터 나가는 줄 알겠다.
그런데 웬 김치찌개?
뜬금없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시군요. 시노자키 양.”
그때.
옆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아가씨 웃음을 짓던 올리비아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본인이 싸온 도시락 뚜껑을 개봉한다.
달카닥.
“한국의 인기 도시락 메뉴는 김밥과 유부초밥······. 같은 극동이라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은 엄연히 다른 나라라구요. 시노자키 양.”
올리비아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함께 도시락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린과 마찬가지로 두 통의 도시락.
한 통에는 윤기가 흐르는 김밥이 가득, 다른 한 통에는 유부초밥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김밥에 오이는, 없다.
설마 오이 김밥을 좋아하냐 싫어하냐 물은 게 이거 때문인가?
“큿······.”
린이 입술을 깨문다.
내가 저거 하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 그래도 내 도시락은 일식의 정수를 담은 도시락. 프랑스의 황녀가 싸온 아마추어 도시락 따위와는 비교가 불허할 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김덕성?”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하고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일본인의 조악한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네요. 이봐요 당신. 역시 전속 시녀인 이 제가 만든 도시락이 저 여자보다 낫죠? 그렇죠?”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니, 무슨 그따위 망언을······!!”
“어머, 사실 아닌가요? 혹시 사실을 지적하는 게 마음 아팠다면 사과할게요. 시노자키 양.”
라노벨에서나 나올 법한 도시락 배틀은 그렇다 치자.
서로 지기 싫어하는 두 여자라면 그럴 수도 있으니.
이 정도쯤이야, 얼마 전에 교실에서 둘이 싸울 때보다는 확실히 버틸 만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 한식 도시락으로 일본인을 공격하는 프랑스인?
내가 대체 뭘 보고 듣고 있는 거지?
이쯤 되면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는 걸 넘어 우주로 향하고 있는 기분이다.
“결국 결정은 김덕성이 할 일일 터······. 말해라. 누구 도시락이 더 나은가?”
“당신의 선택이 당연히 이 저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확실히 말해주시죠. 누가 더 훌륭한가요?”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누가 더 낫냐고?
생각할 것도 없다.
“김밥이 더 낫지. 그런데······.”
소풍에는 김밥이 맞다.
우리 엄마도 김밥을 싸줬으니까.
오이 없는 것도 가산점이고.
대답을 들은 린이 큿, 하고 입술을 깨물고 올리비아가 의기양양한 아가씨 웃음을 흘린다.
“도시락, 나도 따로 준비했는데.”
“뭐?”
“그게 무슨 소리예요?”
두 사람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대답 대신 내 옆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있는 한서진에게 눈치를 준다.
“개봉하겠습니다.”
덜커덕.
한서진이 손에 들고 있던 5단 찬합을 개봉한다.
“김덕성 님께서 어떤 음식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미천한 요리 재주로나마 소박하게 준비했습니다.”
한서진의 무덤덤한 말과는 다르게, 최고급 한식이 담긴 찬합이 계단처럼 펼쳐진다.
도시락 통 안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한정식 식당에서나 볼 법한 음식들이 차곡차곡 예쁘게 담겨 있다.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와 린의 얼굴이 굳는다.
“졌다······.”
“이, 이건 말도 안 돼요!”
한서진의 실력에 충격받은 듯 조용해지는 린과 올리비아.
그래, 이제 좀 조용하네.
도시락 배틀은 클리셰대로 역시 실력으로 압살하는 게 답이다.
여긴 라노벨 세상이니, 라노벨의 클리셰에 걸맞게 대응하는 게 맞다.
이게 이독제독이지.
“다 함께 먹을 분량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 일행 여러분들도 식사 맛있게 하시길.”
한서진의 말을 들으면서 나무젓가락을 뜯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