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40)
#338
대길(大吉)
세이라가 빌헬미나를 언니라고 부른 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원래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당연한 일이긴 했다.
세이라와 언더테이커는 외관만 보면 서로 동갑처럼 보이지만, 언더테이커가 세이라의 연상.
게다가 서로 얼굴도 알고 친분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관계였으니 언니라는 호칭도 이상할 것 없다.
실제 원작에서도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차이점이라면 상처 때문에 외관이 어려진 세이라와는 달리, 언더테이커는 원래부터 모태 동안이었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처럼 반로환동, 주안술 같은 설정도 없이 아무튼 동안이고 나이를 안 먹는다는 라노벨적 허용의 극단적인 결과물이 빌헬미나인 셈이다.
아무튼 세이라가 질문을 던졌으니 답변은 해줘야 한다.
“아, 네. 이사장님.”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빌헬미나가 살아있다는 소식은 아리스에게 들은 모양이다.
원작에서도 세이라는 언더테이커의 맨얼굴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빌헬미나 하이젠버그의 공식적인 상태는 실종.
말이 생사불명이지만, 10년 이상 실종 상태기에 대다수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알겠다. 세라땅한테 중요 정보 제공 고마워 덕성 오빠!”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세이라가 손을 흔든다.
저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 다 좋으니 제발 컨셉은 하나로 통일해줬으면 좋겠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덕성 군. 김덕성 군도 신년 참배하러 온 겁니까?”
뒤에 있던 아리스가 은빛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며 말한다.
“네. 그렇습니다. 아리스 선배.”
내 대답을 들은 아리스의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새해부터 김덕성 군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귓불까지 빨갛게 물든 아리스.
“선배랑 이사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그런 아리스와 세이라에게 새해 인사를 건네던 그때.
“덕성! 좋은 새해 아침이다!”
저 멀리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남색 포니테일이 인상적인 파란 기모노를 입은 거유 미소녀가 있었다.
시노자키 린.
공식 설정에 따르면 가장 일본적이며 가장 기모노가 잘 어울리는 히로인.
실제로도 화려한 후리소데가 제법 잘 어울리는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후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덕성.”
쪼르르 달려온 린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녀가 내 옆에 스윽 팔짱을 끼려던 순간.
“흥. 젖소. 새해 인사를 빌미로 주인님한테 그 음란한 몸뚱이를 들이미는 건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옆에 있던 에리가 허리에 양손을 얹으면서 찌릿하고 린을 노려본다.
“또 가지지 못한 자의 질투인가? 빨래판. 후후. 이 나의 모성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자력이 충만한 가슴이 부럽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떤가?”
“흥. 그런 무겁고 쓸모없는 지방 덩어리 따위, 절대 안 부럽거든? 주인님은 절대로 슬랜더 쪽을 좋아할 거야. 게다가 에리링은 성장기야! 성인이 되면 지금보다 사이즈가 더 커질 거라고! 그렇지? 주인님?”
입술을 삐죽 내밀던 에리가 화살을 이쪽으로 돌린다.
슬랜더를 좋아한다고?
갑자기 내 이야기는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당황스러운데, 라고 생각하던 그때.
“후배 군! 여기 있었구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보라색 머리와 어울리는 보라색 기모노를 입은 미소녀.
카스미 선배였다.
그녀가 내게 다가와서 후후후 웃는다.
“후배 군은 여전히 인기가 많구나? 이것도 검은 귀축이자 나쁜 남자로서의 숙명인 걸까?”
오자마자 헛소리를 내뱉는 카스미.
머리가 어지럽다.
주변을 둘러본다.
하루, 유지, 올리비아, 린, 에리, 마코토, 카스미 선배, 아리스 선배에 세이라까지.
내가 부른 히로인들은 전부 모였다.
쿠사나기는 유지의 검 안에 들어간 상태.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다 모였으니 신년 참배나 하러 가죠.”
이대로 계속 놔뒀다가는 끝도 없이 이상한 말이나 나올 테니, 이쯤에서 자르고 신년 참배부터 하는 게 맞다.
“알았어. 김.”
내 말에 제일 먼저 동조한 건 의외로 유지.
오늘만큼은 고맙다.
“흐, 흥. 당신이 하자면······. 뭐, 어쩔 수 없죠. 저는 당신의 전속 시녀니까요!”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면서 답한다.
전속 시녀 이야기는 이제 포기했다.
전속 시녀 같은 거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할 위인이 올리비아니까 말이다.
“니시시시. 신년 참배하는 거야? 좋아. 그럼 하루는 신님한테 올해야말로 하루가 오빠의 최애캐가 되게 해달라고 소원 빌 거야.”
뒤이어 하루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걸 왜 입 밖에 내냐고.
돌겠네.
“흠흠. 그럼 나는 반드시 미래에 덕성의 현모양처인 김 린이 되게 해달라고 빌어야겠군.”
하루의 말을 들은 린이 얼굴을 붉히면서 헛기침한다.
그 빌어먹을 기무린은 아직 포기 안 한 거냐?
“에리 쨩은 어떤 소원 빌 거야?”
마코토가 에리의 허리를 쿡하고 찌르자, 에리가 본인의 가슴을 슬쩍 보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더듬거리며 말한다.
“······그, 그건 비밀······.”
딱 봐도 새해에는 가슴 좀 커지게 해달라는 소원이 틀림없다.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후후후. 니시자와 양도 꽤 귀여운 일면이 있구나?”
그 모습을 본 카스미 선배가 불쑥 나타나 에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히익!”
카스미 선배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에리가 그녀의 손길을 피해서 마코토에게 붙은 그때.
“그럼 김덕성 군의 말대로 신년 참배도 하고, 소원도 빌도록 하죠.”
짝.
아리스가 손뼉 치면서 주변을 환기한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세-라땅도 소원 빌고 싶어.”
아리스 앞에 있던 세이라가 혀 짧은 목소리로 말한다.
[누님······.]탄식을 터뜨리는 흑태자.
그 세라땅 컨셉은 아직도 포기 안 한 건가.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안고 히로인들과 함께 아리스의 인도를 따라 신년 참배를 하러 갔다.
애니메이션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긴 신사 건물.
기모노와 정장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한참을 대기한 끝에 마침내 신년 참배를 할 수 있었다.
새전함 앞에 선다.
방울을 울리는 커다란 밧줄이 보인다.
줄을 서는 도중 가위바위보 끝에 내 옆에서 같이 신년 참배를 하게 된 히로인은 에리.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주인님. 신년 참배 방법은 먼저 새전함에 동전을 넣고 밧줄을 당겨서 방울을 흔든 뒤에 인사를 두 번 하고 손뼉을 두 번 친 뒤에 기도를 통해 소원을 빌고 다시 인사를 하는 거야.”
내가 모를까 봐 귓가에 친절하게 속삭이는 에리.
신년 참배 방법 정도는 애니메이션에서 워낙 많이 나와서 알고 있지만, 그냥 모른 척 듣기로 했다.
“어, 그래. 고맙다.”
“에헤헤헤, 주인님한테 칭찬받아서 에리링 기분 최고야!”
내 영혼 없는 칭찬에 얼굴을 붉히면서 좋아하는 에리.
린에게 선물 받은, 그녀가 직접 새긴 곰돌이 자수가 인상적인 동전 지갑에서 5엔짜리 동전을 꺼내 새전함에 넣은 뒤 밧줄을 당긴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울린다.
허리를 두 번 숙인 뒤에 손뼉을 친다.
짝, 짝.
그리고 기도한다.
칸다묘진의 신이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새해에는 제발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원래 세계와 이 세상을 잇는 양방향 게이트를 열 수 있기를.
소원을 빈 나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 뒤에 내려왔다.
“자, 그럼 주인님! 에리링이랑 같이 운세 뽑기하러 가자!”
에리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면서 나를 이끈다.
운세 뽑기라.
미신은 안 믿지만, 재미로 한 번쯤 해보고는 싶었다.
설마 대흉이 나오지는 않겠지?
원작에서 운세 뽑기를 했던 유지의 점괘는 대흉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에리와 함께 운세 뽑기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가격은 200엔.
한국 돈으로 2천 원 남짓이다.
100엔짜리 동전 두 개를 동전함에 넣은 뒤에 아래에 있는 나무통을 흔든다.
통 안의 운세 제비가 뒤섞이는 소리가 들린다.
[파트너. 이제 뽑아보자.]흑태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무통에서 제비를 뽑는다.
제비에 적힌 번호는 13번.
약간 불길한 숫자인데.
옆에 있는 서랍장에서 13번 서랍을 연다.
거기에 있는 점괘 종이는.
“우와, 주인님 대길이야! 대길!”
대길이었다.
대길(大吉)이라니······.
‘운이 좋군.’
운세 뽑기 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흉보다는 대길이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운세 뽑기를 마지막으로 신년 참배를 마무리했다.
신년 참배가 끝난 뒤.
우리 일행은 칸다묘진을 나온 뒤에 린의 권유로 시노자키 저택에 도착했다.
도시 한복판에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지닌 시노자키 저택의 별채.
일본 전통식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다다미방 안에 모인 히로인들과 유지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탁자 위에는 우롱차와 화과자가 놓여 있었지만,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덕성 군. 할 말이 무엇입니까?”
다다미방 안에 흐르던 정적을 깬 사람은 아리스.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이제 겨울 방학도 얼마 안 남았으니······. 모두의 친목 도모를 위해서······.”
친목 도모라니.
내가 회사에서 사내 워크샵을 기획하는 부장님 같은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디에고 모랄레스는 최종장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처리해야만 한다.
놈을 처리할 함정을 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스키 여행을 가야 한다.
원작 16.5권에서는 유지가 상점가 이벤트 추첨에서 홋카이도 스키 리조트 초대권에 우연히 당첨돼서 히로인들과 함께 스키 여행을 가게 되었다는 계기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계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낯간지러운 친목 도모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다 같이 스키 여행을 갑시다. 한국으로.”
기어이 내 입으로 한국을 가자는 말을 하게 되다니.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치사량 수준의 국뽕을 생각하니 벌써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스키 여행인가, 그렇다면······.”
내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세-라땅은 갈래! 덕성 오빠랑 같이 스키 여행!”
벌떡.
세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그녀가 제일 먼저 찬성할 줄이야.
“에리링도! 에리링도 갈거야! 주인님이랑 스키 여행이라니, 벌써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는걸? 주인님이 먼저 나서서 여행하자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더 설레!”
에리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면서 얼굴을 붉힌다.
“나도 주군이랑 스키 여행 갈래!”
에리 옆에 있던 마코토가 소리친다.
“나쁜 남자 후배 군, 미소녀들과의 두근두근 스키 여행을 기획한 거야? 후후. 하렘왕으로서 하렘 관리가 철저하네. 나도 찬성이야.”
카스미 선배가 우롱차를 홀짝이면서 말한다.
하렘 관리?
대체 카스미 선배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스키 여행에 내가 빠질 수는 없지. 후후. 좋다. 이번 기회에 덕성의 모국인 한국에 가서 확실히 덕성의 현모양처로 눈도장을······.”
“······저도 가겠습니다. 김덕성 군.”
린이 웃으면서 말하고, 아리스가 살짝 홍조가 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한다.
“니시시시. 덕성 오빠의 스키 여행에 초 카와이 JK 갸루 여동생인 하루가 빠질 수는 없지. 유지 오빠도 따라올 거지? 하루의 짐꾼으로?”
뒤이어 하루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말한다.
“아, 응······.”
하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지.
유지가 짐꾼 취급이라니.
약간 불쌍해졌다.
“흥······. 스키 여행이라면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빠질 수 없죠! 알프스에서 단련한 보나파르트 황실의 스키 실력을 마음껏 선보이도록 하겠어요! 다들 각오하도록 하세요. 오호호호호호호호호호!”
마지막으로 올리비아가 아가씨 웃음을 흘리면서 찬성한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모두 들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좋아. 그럼 결정됐네. 스키 여행. 모두 다 가는 걸로.”
에반젤린과 베아트리체는 한서진을 통해 초대하기로 했으니 괜찮다.
여행은 결정되었다.
이제 남은 건 한국으로 스키 여행을 가는 것뿐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오한을 느끼면서 우롱차를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