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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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사이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후련했다.
나는 마침내 내 진심을 솔직하게 내뱉었다.
내 말을 들은 메사이어의 표정이 멍해졌다.
빙의자.
웹소설 커뮤니티에서는 가끔 이런 말이 나돌았다.
회빙환 중에 제일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클리셰가 빙의라고.
빙의는 멀쩡한 남의 몸을 약탈해서, 그 가죽을 뒤집어쓰고 그 사람 행세를 하는 장르고, 원래 그 사람을 알던 주변인의 감정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주변 사람들이 보자면 귀신이 가족의 몸을 대신 차지한, 호러에 가까운 장르라는 논지의 담론이었다.
전생에 커뮤니티 할 때는 그런 담론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차피 킬링 타임으로 보는 웹소설인데, 회빙환이 어떻건 뭐 어쩌라고 같은 심정이었다.
사이다만 시원하면 됐지,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진짜 빙의를 겪었을 때.
이 세계를 진짜로 인식하고, 주변 히로인들을 캐릭터가 아닌 살아 숨쉬는 사람으로 인식하며 진짜 애정을 주게 되었을 때.
빙의의 본질에 대한 화두가 다시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그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나는 김덕성의 운명을 가로챘고, 쿠로사와 유지의 기회를 약탈했다.
나는 진짜 김덕성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다른 히로인들과 관계를 맺고 이 세계의 사건에 멋대로 개입했다.
그런 내 정체를, 추악한 행위를 알아차린다면 나를 외면할 것이다.
누가 봐도 그럴 것이다.
현실은 웹소설이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빌어먹을 정도로 상냥한 세계는 빙의자라는 내 정체도, 내가 가로챘던 운명과 기회들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원래 주인공인 유지도, 히로인들도 나아가 77억 세계인과 이 빌어먹을 라노벨 세계 전체가 내 존재를 인정했다.
나를 세계 구원자로 인정했다.
그런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진정으로 이 세계를 사랑했다.
“그렇다면 귀환을 포기하고 이 세계에 남겠다는 뜻입니까? 이대로 저를 처단한다면 월드 게이트는 닫힙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귀환할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고향은 버려두고 구원자의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누가 포기한대?”
메사이어의 말허리를 나는 잘랐다.
하여간, 라노벨 빌런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그게 무슨······.”
“둘 다 할 거야. 이 세계의 모두도 책임지고, 원래 세계의 부모님도 책임질 거야.”
“하지만 양쪽 모두를 취하는 건 불가능······.”
“해봤어?”
내 말에 메사이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상에 양자택일은 없어. 그런데도 양자택일처럼 보이는 건, 양쪽 모두의 장점만 체리피킹하고 단점은 버리는 제3의 선택지를 창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야. 그런데 어디서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지랄이야.”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양자택일은 고구마고, 체리피킹은 사이다니까! 라노벨의 말 많은 최종 보스인 네놈은 모르는 사이다! 라노벨이랑 다르게 웹소설에서는 한 편이라도 사이다가 없으면 다들 5700자 박고 하차한다고. 몰라? 그리고 나는 상냥하고 물러터진, 네 슬픈 과거 사연 따위에 공감해서 질질 짜는 라노벨 주인공 따위가 아니야. 나는······.”
나는 듀랜달의 칼자루를 바로 잡았다.
흔들리는 메사이어의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움직이지 않는 듀랜달을 놈의 가슴에 찌르려고 시도하면서 말했다.
“양쪽 세계 전부를 독식해도 배가 고픈 이기적인 사이다패스 소인배 빙의자야. 이 새끼야.”
*
“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김덕성의 말을 들은 메사이어는 웃었다.
그의 입에서 끝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뭐야, 왜 웃어? 이 새끼야. 내 말이 웃겨?”
“아닙니다.”
메사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당신을 오판했군요.”
메사이어는 순순히 인정했다.
김덕성.
그를 자신이 오판했다.
두 사람의 심상이 연결된 상태였기에 알 수 있었다.
김덕성이 내뱉는 모든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진심으로 이 세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양쪽 세계 모두를 책임지고 구원한다, 그 터무니없는 대답이 이 세계가 선택한 구세주, 세계 구원자인 당신이 내놓은 대답입니까?”
“독식한다고. 구원이 아니라. 나 소인배라니까?”
김덕성의 말을 메사이어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두 세계 모두를 책임지리라 결심했던 사실을.
단지 부끄러워서 저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저는 여전히 제 구세의 길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신념을 뛰어넘을 구원자가 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메사이어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김덕성이 품은 신념은 자신의 신념을 초월하고 있었다.
최후의 발악으로 그를 심상 세계에 붙들어놓기는 했지만, 이 심상 세계마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한계였다.
“두 개의 세계를 짊어진 세계 구원자여── 저와는 신념도 방향도 다르지만, 그렇지만.”
메사이어가 웃었다.
“저는 당신을 존중하겠습니다. 같은 구원자로서, 이 세계의 구원을 그대한테 부탁합니다.”
메사이어가 마지막 말을 내뱉은 순간.
그의 신념이 꺾였다.
흑백의 세계가 붕괴했다.
그와 동시에 김덕성의 우주검이 메사이어의 심장을 정확히, 소리 없이 찔렀다.
푸욱.
쿨럭.
메사이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가슴에서 죽음의 고통이 올라왔다.
“·········축하합······. 니다. 이 결전, 당신이······. 승리했습니다. 검은 귀축······.”
메사이어가 김덕성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메사이어의 시야가 흐려졌다.
어두컴컴해진 시야 너머, 환영이 보였다.
[······어서 와라. 아들아.] [고생 많았지? 동생?] [보고 싶었어.]저 멀리 반짝이는 빛과 함께 오래전 이계종에게 죽은 부모님, 영웅 때문에 자살한 누나, 빌런의 테러로 죽은 첫사랑 소녀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보고 싶었던, 하지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소중한 이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구하고 싶었다.
부모님을, 첫사랑을, 누나를 되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함께, 아무 걱정도 불안도 없는 신세계에서, 그저 평범하게 첫사랑 소녀와 결혼하고, 평범하게 가정을 꾸려서 딸과 아들도 낳고, 누나와 부모님께 인사하고,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뿐이었다.
메사이어가 환영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환영이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아······.”
메사이어가 단말마를 내뱉은 순간.
푸슉.
김덕성의 듀랜달이 그의 몸을 완전히 관통했다.
듀랜달의 칼끝이 그의 등 뒤로 튀어나왔다.
그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분수가 되어 유적 바닥을 적셨다.
“난 네 과거 사정 따위는 관심 없어. 네 이상에도 관심 없어. 네놈의 인정에도 나는 관심 없어.”
김덕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메사이어의 귓가에 들렸다.
“야, 메사이어. 네가 뒤진 이유는 그냥 네가 좆같이 나쁜 짓만 존나 했고, 그게 나한테 거슬려서일 뿐이야. 넌 대단한 구세주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쓸데없이 끈질긴, 세계 단위로 민폐를 끼친 빌런이고.”
김덕성의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메사이어에게 향했다.
거기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김덕성의 말에 메사이어의 눈앞에 다른 환영이 펼쳐졌다.
소중한 이들이 아닌, 그가 지금까지 신세계 계획을 위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며 테러로 학살한 수많은 무고한 사람의 망령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평범한 민간인부터 헌터, 영웅들까지.
그에게 살해당한 모든 사람이 메사이어에게 귀곡성을 내질렀다.
그 너머에는 지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능도 마력도 게이트도 없는 세계가 이상향, 신세계라고? 내가 바로 거기서 왔는데, 거기서도 전쟁도 갈등도 똑같이 일어나. 단지 사용되는 무기가 이능, 마력이 아니라 총, 폭탄, 핵무기일 뿐이지. 그런 세계가 이상향이라니. 어이가 없네.”
김덕성이 냉소했다.
그의 시선이 메사이어를 향했다.
메사이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능력으로 인해, 마력과 게이트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은 예방······.”
“자기 합리화 좀 하지 마. 세탁도 정도껏 해야지. 넌 구세주가 아니라 학살자야.”
학살자.
김덕성의 말이 사형 선고처럼 메사이어에게 떨어진 순간.
그가 지금까지 죽인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망령이 되어 그의 팔다리를 붙잡고 지옥 불로 끌어내렸다.
지옥의 화염이 메사이어의 영혼을 불태웠다.
자신의 전부를 부정당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아니야, 나는, 나는! 구세주! 나는······. 모두를 구하는······.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은 불가피했어!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는, 신세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나도 희생은 싫었다고!”
메사이어의 뺨이 떨렸다.
구세주가 아니라고?
그냥 빌런이라고?
내가 했던 모든 테러가 그저 의미 없는 학살에 불과했다고?
아니다.
나는 구세주다.
내가 죽인 무고한 사람들은, 신세계 창조에 뒤따르는 어쩔 수 없는, 고귀한 희생이었을 뿐이다.
아니, 아니었다.
나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도 사실은 전부 구하고 싶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학살자라는 사실을.
피로 물든 손으로는 결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목적이 얼마나 고귀하건, 그 과정에서 무고한 타인을 희생해야 한다면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모두의 생명은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구세주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메사이어는 최후의 순간에야 깨달았다.
“······그랬군요. 저는 학살자······.”
메사이어는 마지막에야 인정했다.
나는 구세주 따위가 아닌 학살자다.
무고한 이들을 도륙한 최흉최악의 테러리스트다.
그러니까.
“······진정한 구원자인 당신의 손에 죽는 것은 필연······.”
목숨으로, 죽은 이후에도 지옥에서 영원불멸 죄값을 치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얼마나 죄 많은 인생이었단 말인가.
나는 대체 무엇을 착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 메사이어는 김덕성에게 진정으로 완전히 패배했다.
최후에야 본인의 무거운 죄업을 깨달은 메사이어의 얼굴이 굳었다.
서걱.
김덕성이 몸에 박힌 듀랜달을 휘두르며 메사이어의 몸을 양단했다.
메사이어의 시야가 피로 물들었다.
그의 시야가 거꾸로 뒤집혔다.
죽음 직전, 메사이어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절단당한 자신의 하반신과 본인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망령의 손길이었다.
메사이어는 지옥행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
“후.”
스르릉.
나는 메사이어의 피가 묻은 듀랜달을 칼집에 꽂아넣었다.
내 눈앞에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메사이어의 시체가 있었다.
그 아래 피바다가 된 유적의 바닥이 보였다.
메사이어의 생명 반응은 없다.
놈은 확실히 죽었다.
그그그그그.
그 증거로 하늘에 열린 월드 게이트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그 너머에 있던 평행우주의 지구, 내 고향의 모습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쯤 되면 파트너, 고생했다고 하면서 말을 걸어줄 흑태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허전하다.
마음에 뻥하고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흑태자가 정말로, 없다고?
그 인간이 사라졌다고?
시야가 흐려졌다.
눈에서 쓸데없이 눈물이 흘렀다.
“하······.”
나는 고장난 것처럼 삐걱거리는 팔을 간신히 들어서 눈물을 닦아냈다.
눈물을 닦아내니 이제는 웃음이 나왔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끝났다.
전부.
그 사실이 이제 실감이 났다.
슬프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것저것 뒤섞인 복잡한 감정.
이런 걸 보고 웃프다고 하는 건가.
실없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 나를 향해 달려오는 히로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입 모양을 보면 날 본 그녀들이 뭐라 소리치는 것 같기는 한데, 귓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까 일격에 마력을 많이 소모해서 그런가.
‘어?’
하늘이 노랗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번쩍.
검은 섬광과 함께 전투 모드가 강제로 해제됐다.
휘청.
온몸에 힘이 빠졌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무력감과 피로가 나를 덮쳤다.
털썩.
나는 그대로 내 앞까지 다가온 올리비아의 푹신한 가슴 위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 느낀 건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올리비아의 예쁜 얼굴과 그녀의 품에서 전해지는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체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