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411)
#409
명절 증후군
지구-2의 인류연합이 지구-1과 접촉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지도에서 사라진 역사적인 그날 이후, 세계는 완전히 변화했다.
플레이어의 시대를 맞아 승승장구하며 마정석과 던전, 마나의 축복을 통해 현대 문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자평하던 지구-1의 문명은 더 높은 차원의 문명인 지구-2의 인류연합을 만나면서 완전히 주저앉았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그 말처럼 지구-1에서는 자연재해로 인식되던 게이트와 던전을 도구로 사용해 차원을 항해하고 평행우주간 상설 양방향 게이트를 뚫는 지구-2의 기술 수준은 기껏해야 마나와 과학을 이제 막 접목해서 플레이어 능력 측정, 던전 출력 측정 같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지구-1과 비교하면 마법과도 같았다.
지구-1의 현대 문명은 모든 면에서 지구-2의 인류연합을 따라갈 수 없었다.
양방향 차원 게이트 연구에서 파생된 각종 첨단 신기술과 30년 넘게 게이트와 이계종 침공에 맞서오며 축적된 이세계 관련 과학기술, 그리고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이능력이 존재했던 덕분에 일만 년이 넘는 인류 역사 동안 발전을 거듭한 지구-2의 이능력 활용법은 지구-1의 초보적인 마도공학, 마나 활용법을 아득히 초월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상태창에 의존해 성장한 지구-1의 EX급 플레이어는 초상병기와 발전된 기술로 무장한 지구-2의 EX랭크 영웅에 대적할 수 없었다.
하물며 인류연합의 정점급 강자, 단신으로 인류의 위기를 극복한 구세주 김덕성과 그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지닌 검성 쿠로사와 유지에 이르러서는 EX급 플레이어가 무더기로 덤벼도 발끝조차 건드리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초인뿐만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병기들 역시 차원 입자포, 플라즈마 어뢰, 함선 전체를 뒤덮어 물리 공격을 경감시키는 마력장, 게이트를 열어 플라즈마 폭탄을 투하하는 차원폭격 등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지구-2의 미래 병기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류연합은 그 막강한 힘을 갖고도 김덕성 관련 일과 선제공격한 러시아, 중국에 대응한 무력행사를 제외하고는 지구-1과는 약속대로 평화적인 교류만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김덕성의 부모님과 관련된 한국의 사채업자, 조직폭력배, 빌런과 그 뒤를 봐주던 한국의 고등급 플레이어, 유력 정치인, 한국 대형 플레이어 길드들이 하루아침에 전부 정리되어 사라지는 사소한 일도 있었지만, 격변의 지구-1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날 지구-1의 유엔 대표들이 예상하고 절망한 것처럼 지구-1의 경제, 정치, 문화는 빠르게 자발적으로 소프트 파워와 하드 파워 양쪽 모두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 지구-2에 종속되어갔다.
외계인처럼 아예 다른 인종이 아닌, 같은 인류와 같은 문화권의 평행세계라 더더욱 그랬다.
변화의 시작은 지구-1의 대한민국이었다.
인류연합의 미래 수도인 김덕성 특별시가 조성 중인, 이제는 인류연합의 직할령이 된 구 북한 땅과 접경하고 있으며, 인류연합에 의해 대형 플레이어 길드와 고등급 플레이어 상당수를 잃은 지구-1의 대한민국.
그 나라가 가장 먼저 유엔을 탈퇴하고 인류연합의 옵저버 국가로 가입한 이후 수많은 지구-1의 국가들이 대한민국을 따라 유엔을 탈퇴하고 인류연합의 옵저버 국가로 가입했다.
“저희 지구-1의 미국은 현 시간부로 유엔을 탈퇴하고 인류연합의 옵저버 국가 가입을 신청하겠습니다.”
모두 탈퇴해 사실상 허수아비가 된 유엔을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며 유지하던 지구-1의 미국 역시 차원적 고립을 버티지 못하고 대통령의 성명 발표를 통해 지구-2의 인류연합 옵저버 국가로 합류하면서 지구-1은 완전히 지구-2에 종속되었다.
동시에 지구-1의 유엔과 독립 국가는 완전히 멸망했다.
평화적인 수단으로 지구-1을 완전히 세력권에 편입시킨 인류연합은 지구 궤도에 궤도 엘레베이터와 스페이스 콜로니, 상설 대형 양방향 게이트를 건축하고, 화성과 금성을 테라포밍해서 인류의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인류연합은 알파 센타우리를 비롯한 외계 행성계에 개척 함대와 이주민을 보내 외계 행성들을 테라포밍해서 연합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렇게 인류연합은 순식간에 성간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인류연합은 지구-1의 던전과 게이트를 역이용해 중세 판타지, 무림 등 타 차원과 제한적인 교류를 시작, 판타지 세계의 이종족과 무협 세계의 무림인들이 인류연합의 세계로 일부 이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우주가 달라지는 와중에도 인류연합의 신성한 수도인 김덕성 특별시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오늘부터 전 인류의 대명절인 추석 연휴가 시작됩니다. 지구부터 알파 센타우리까지 인류연합 소속 160억 인류 모두가 3일간 쉬는 추석 연휴, 인류연합의 모든 행성에서는 인류연합의 위대한 영도자 김덕성 님을 기려 송편 빚기를······.]인류연합의 임시 수도인 지구-2 서울특별시.
김덕성 사저 옆에 세워진 그의 부모님의 거처.
인류연합의 영도자이자 사실상의 황제로 취급받는 그에게도 지금 민족, 아니 인류의 대명절 추석이 찾아왔다.
*
[······인터넷에서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김덕성 님을 기리기 위한 송편 챌린지, 한복 챌린지 태그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대명절을 보내는 각 구역의 분위기도 천양지차인데요. 우선 지구-2의 미국에서는 김덕성 님을 본받아 고향으로 가는 행렬이 대폭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행기 티켓이 매진되어 급히······.]부모님 저택 거실.
말이 거실이지 거의 운동장만큼 큰 공간.
그곳 가운데 있는 대형 TV에서 아직 현실감이 없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눈물을 흘리며 내 이름을 부르며 명절 보도를 이어가는 아나운서를 보니 여기가 북한인지 남한인지 헷갈릴 수준이었다.
게다가 인류연합의 대명절?
대체 왜 한국의 명절을 인류연합 전체가 기념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지구-2의 일본에서도 한국식 송편의 인기가 대폭 상승, 전통 화과자 점포들 역시 송편 메뉴를 만들어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원작의 후일담에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이제는 원작이 사실 평행세계의 정보를 수신해서 만들어낸 일종의 기록일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 인류가 기념하는 추석이라니.
이건 좀 광기 그 이상의 영역인 것 같다.
참다 못 이긴 내가 TV를 끄려고 한 그때.
“하와와와와! 어머님! 소녀! 송편 만드는 법이 궁금한 것이와요!”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젤린이었다.
풍성한 핑크 트윈테일이 인상적인 그녀가 새댁처럼 한복을 입은 채로 주저앉아 송편 반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 그래 오늘 추석 연휴 첫날이라 아내들이랑 같이 부모님 댁에 방문했었지.
부모님 댁이라고 해도 바로 옆집이기는 한데, 우리 집이나 부모님 댁이나 워낙 초대형 저택이라 그런지 별로 옆집 같은 느낌은 없다.
하도 정신 나간 뉴스가 TV에서 흘러나와서 그런지 잊고 있었다.
“맞아요! 어머님! 에리링! 에리링도 송편 만드는 법 궁금해요! 알려주세요!”
에반젤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리가 찡긋 윙크하면서 웃었다.
“호호호. 우리 며느리들. 송편 빚는 법이 궁금했어요? 이제부터 알려줄게요.”
대야에 담긴 커다란 송편 반죽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히로인들을 보면서 어머니가 웃었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17명의 며느리에 난색을 표했지만 시간이 꽤 흐른 지금은 그녀들에게 익숙해져서 오히려 나보다 히로인들을 더 아낄 때도 있었다.
농담이기는 하지만 종종 나더러 히로인들이 나에게 아깝다는 말까지 할 정도.
하긴 얘네가 말투가 이상한 거지 인성이 나쁜 건 아니니까.
“빨래판. 어디서 모르는 척 어머님한테 꼬리를 치려는 거지? 김씨 가문의 현모양처라면 송편 빚는 법 정도는 미리 알아 오는 것이 상식 아닌가?”
마찬가지로 파란 한복을 입은 린이 에리를 노려보며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매번 기모노만 입던 린이 한복 입는 모습은 오늘 거의 처음 본 것 같은데.
“흥. 젖소. 누가 그걸 모른대? 에리링은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 레시피가 아니라 어머님만의 송편 빚는 비전 레시피가 궁금한 거야. 하긴, 젖소 너는 영양분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만 몰려 있으니 멍청해서 에리링의 깊은 뜻을 모를 수도 있겠구나? 에베베베벱.”
린의 말을 들은 에리가 혀를 내밀며 린에게 메롱했다.
“모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절벽 가슴의 보유자인 빨래판 주제에······. 모성의 상징인 가슴을 폄하하다니. 내 풍만하고 커다란 가슴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라. 빨래판.”
하지만 린은 흔들리지 않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펑퍼짐한 한복 저고리 위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폭유 위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뭐? 젖소? 너 말 지금 다 했어? 그리고 에리링 절벽 아니거든? 꽉 찬 B컵에 슬랜더 몸매거든?! 거기에 은하 제일 미소녀거든?!”
린의 말에 도끼눈을 뜨는 에리.
다른 때면 모를까, 추석 명절 날, 그것도 부모님 앞에서 가슴 사이즈를 주제로 파멸적으로 싸우고 있는 린과 에리를 보자니 내 얼굴이 다 뜨거워졌다.
오랜만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라노벨 말투에 익숙해졌기는 했지만, 그 빌어먹을 라노벨 말투를 부모님에게 생생하게 라이브로 중계하는 건 다른 문제다.
제발 그만 좀 하면 안 될까?
쪽팔려 뒤지겠네.
움찔.
실제로 어머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호호호호. 그만해요. 에리, 린. 두 사람 다 사이좋게 지내야지요.”
하지만 역시 노련한 어른답게 당황하지 않고 린과 에리를 중재하는 어머니.
“알겠습니다. 어머님의 부탁이라면, 현모양처답게 따르겠습니다.”
“흥! 어머님 부탁이라서 봐주는 거야. 젖소! 다음은 없어!”
어머니의 중재에 린과 에리가 볼을 부풀리며 물러섰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원래 명절이 이런 날이었나?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자, 송편 만드는 법 가르쳐 달라고 했죠? 우선 반죽을 칼로 잘라서 넓게 원모양으로 꾹꾹 눌러서 편 뒤에 미리 준비해둔 송편 속 재료를 넣고 이렇게 예쁘게 빚어내면 완성이에요.”
어머니가 시범으로 송편을 만들어 보였다.
속 재료는 당연히 깨였다.
콩 송편 같은 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대야 안에는 하얀 밀가루 반죽뿐만 아니라 쑥색 반죽, 분홍색 반죽, 노란색 반죽 등 다양한 색의 반죽이 있었다.
“이렇게 말이죠? 그렇죠? 어머님?”
가장 먼저 송편을 빚은 건 올리비아.
다소곳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금발 새댁 미소녀가 된 올리비아가 정석적으로 빚어서 완성한 송편을 내놓았다.
“네. 맞아요. 우리 올리비아, 어쩌면 이렇게 참하게 빚었는지. 이렇게 예쁜 송편을 빚었으니 장차 예쁜 딸을 낳을지도 모르겠네.”
어머니가 감탄할 정도로, 올리비아의 송편은 제법 모양이 잘 잡혀 있었다.
“예, 예예쁜 딸이라고요?!”
어머니의 칭찬에 놀란 올리비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네. 한국에서는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거든요.”
어머니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머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한국에 그런 미신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여기는 평범한 한국이 아니었고, 17명의 며느리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라노벨에서 이런 미신이 등장하면 그걸 진짜 믿은 히로인들이 폭주하는 건 당연히 클리셰다.
나는 앞으로 펼쳐질 참상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오호호호호호호호! 역시 프랑스의 황녀, 보나파르트 황실의 적장녀인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고귀한 손길로 손수 빚은 송편의 진가를 알아주시는 분은 어머님뿐이군요!”
어머니의 칭찬을 들은 올리비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가씨 웃음을 터뜨렸다.
칭찬을 들어 기쁜 모양인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백금발이 흩날렸다.
“송편,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
한복을 입은 아이보리 머리 미소녀, 빌헬미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형형색색의 반죽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예쁜 딸이라니, 그냥 묵과할 수 없는 말이구나. 그렇죠? 언니?”
그녀 옆에 앉아 있던, 하얀 한복을 입은 백발 적안의 미소녀, 세이라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빌헬미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언니 아니야······. 부우······.”
세이라의 말에 빌헬미나가 볼을 부풀렸다.
“예쁜 딸, 좋아요! 마유도 예쁜 딸을 위해서라면······!”
“현모양처로서 예쁜 딸을 놓칠 수는 없지!”
그녀 옆에 있던 마유즈미 마유가 눈을 별빛으로 반짝이고, 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반죽을 들었다.
“나도! 나도 송편 예쁘게 빚어서 주군의 예쁜 딸 낳을래!”
“······미신에는 관심이 없지만, 송편을 예쁘게 빚어서 나쁠 건 없죠.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뒤이어 마코토, 아리스의 한마디와 함께 수많은 히로인들이 경쟁하듯 반죽에 돌격했다.
우당탕탕.
반죽을 두고 일어나는 교과서적인 개판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그 명절 증후군인가 뭔가 그거냐?
추석이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