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415)
#413 – 트루엔딩
인류연합 의회.
“재적 300, 재석 300, 찬성 300, 반대 0으로 인류연합의 위대한 영도자 김덕성 님의 황제 등극 안을 가결하겠습니다.”
모든 국가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인류연합 의회 의장이 김덕성 황제 즉위 안건을 통과시켰다.
짝짝짝짝짝짝.
땅땅땅.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가 의원들의 기립 박수 속에서 인류연합 의회 본회의장을 울렸다.
안건이 통과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덕성의 황제 즉위에 대한 인류연합 전 시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김덕성 님을 인류연합의 황제로!”
“구세주 김덕성 님이야말로 인류의 등불, 인류연합의 영도자. 그분께서 영원토록 인류연합을 이끌어야 합니다!”
“김덕성 님 만세!”
“김덕성 그는 신이야! 김덕성 그는 신이야! 김덕성 그는 신이야!”
“마침내 이날이⋯⋯. 제 손으로 구세주님을 황제로 모시게 되는 날이 오단., 감격스럽습니다⋯⋯. 어흑흑⋯⋯.”
김덕성을 구세주이자 인류연합의 영도자라고 여기는 지구-2에서는 당연히 열광적인 지지와 함께 찬성표가 쏟아져 나왔다.
그날.
인류의 적, 메사이어를 참살했을 때.
77억 전 인류의 정신이 하나로 연결되었던 여파 때문에 지구-2의 인류는 무의식으로부터 김덕성을 지구-2의 구세주이자 살아있는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구-2에서 김덕성의 황제 즉위 투표는 구세주인 그가 원래 가져야할 당연한 자리를 이제야 되찾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물론 구세주 김덕성을 인류연합의 황제라는 영광된 자리를 되찾는데 자신의 한 표가 도움을 준다는 사실 때문에 요식행위라고 인식되어도 지구-2의 투표율이 낮아지지는 않았다.
이는 지구-2의 사람들이 주로 정착한 화성, 금성, 알파 센타우리를 포함한 다른 개척행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구-1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지구-2와 같이 열광적인 지지나 광적인 찬성표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김덕성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인류연합 오기 전까지 사실상 플레이어들이 귀족 아니었냐?”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살기는 더러운 세상이었지.”
“황제라고는 해도 진짜 독재자는 아니고 입헌군주제처럼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데, 그냥 찬성하는게 나을지도?”
“김덕성 재단 복지사업 때문에 꿀 빤 것도 많은데 그냥 찍어줄까? 어차피 이름뿐인 황제라며?”
인류연합의 도래 전까지 지구-1은 상태창과 마나를 각겅한 플레이어들이 던전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던전에서 나오는 신소재와 자원을 독점해서 특권층으로 군림하는 디스토피아였다.
지구-1의 플레이어들은 일반인의 여론따위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민간인들은 개돼지일 뿐이었다.
물론 소수의 양심있는 플레이어들이 있기는 했지만, 플레이어의 대부분은 갑질과 패악질은 기본으로 부리면서 민중과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 귀족이었다.
무력과 금력, 권력을 모두 갖춘 새로운 시대의 귀족인 플레이어의 갑질과 그와 결탁한 기득권층의 지배 아래 일반인들은 신음했다.
민주주의는 허울만 남은, 기득권층과 결탁한 플레이어들의 밀실 정치로 운영되던 디스토피아 지구-1을 해방한건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연합과 그 수장인 김덕성이었다.
지구-2의 영웅들은 지구-1의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플레이어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선략하고 상냥했으며, 약자를 보호하고 던전의 몬스터와 빌런에게 맞서 싸웠다.
마나와 이능이 등장한 지 이제 10년 밖에 안 된 지구-1과는 달리, 지구-2는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마력이 함께했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다수의 비능력자,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어야 소수의 이능력자 역시 서로 상생하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웅은 지구-2에서 이능력자와 비능력자의 상생과 공존을 위해 태어난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 영웅들이 김덕성의 이름을 외치고 다닌 데다가, 근본적으로 지구-1의 디스토피아를 해방한 것 역시 김덕성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미지는 지구-1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독재자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그가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일도 거의 없었고.
황제가 된다는 것도 말이 황제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고 하니거부감도 없었다.
“개표 시작하겠습니다!”
“지구-2 개표 진행률 90%⋯⋯. 현재 찬성표는 99.9%! 반대표는 0.1% 입니다!”
“지구-1의 개표 진행률은 50%⋯⋯. 현재 지구-1의 찬성표는 55%입니다!”
그렇게 진행된 김덕성 황제 즉위에 관한 전 인류연합 시민 투표의 결과는 당연히 찬성이 과반수를 돌파.
그렇게 전 인류연합 시민의 지지를 받아낸 김덕성은 마침내 본인이 원하지 않던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지구-1
구 북한.
대격변 당시에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 이세계의 환경에 침식되고 몬스터 무리에 점령당해 필드로 변했던 구 북한 땅은 인류연합의 테라포밍을 통해 다시 인류가 거주 가능한 환경이 되었다.
인류연합의 직할령이 된 구 북한 땅의 중심지인 구 평양. 이제는 인류연합의 수도, 김덕성 특별시로 다시 태어난 이 곳에서는 지금 역사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대동강 물결 앙 옆으로 미래적인 디자인의 마천루가 빽빽히 세워져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화려한 대도시.
독재 정권의 수도였던 옛 평양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한 김덕성 특별시 곳곳에는 김덕성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푸른 하늘에는 김덕성의 얼굴과 김덕성의 이름을 적은 에드벌룬과 비행선이 날아다녔다.
김덕성 특별시 거리 곳곳에는 그의 황제 대관식과 결혼식을 기다리는 군중이 가득 운집해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김덕성 특별시의 풍경은 지금 지구-1과 지구-2를 퐇마한 인류연합의 모든 권역에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김덕성 광장이 있었다.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의 초대형 빌딩, 인류연합 황궁 앞에 조성된, 대형 김덕성 동상이 세워진 넓은 광장에는 추산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있었다.
지구-2의 구세주이자 지구-1과 인류가 거주하는 모든 차원의 보호자이며 인류연합의 황제.
김덕성이었다.
*
하필 자리도 불길한 옛 평양 땅에 세워진 김덕성 특별시.
그 이름도 빌어먹게 촌스러운 김덕성 광장의 무대 뒤에 있는 대기실에서 나는 지금 턱시도를 입은 채로 모니터에서 군중돌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솔직히 독재자나 황제 같은 건 귀찮아서 안 하고 싶었는데, 하도 하라고 해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받아들인거다.
그렇다고 해도 일이 더럽게 커지기는 했네.
“파트너, 기분이 어때?”
대기실 의자에 앉은 내 옆에 흑태자가 섰다.
흑발의 미남자, 흑태자가 내게 찡긋 윙크하면서 말했다.
그렇다.
흑태자가 오늘의 결혼식 주례와 황제 대관을 맡았다.
하긴 흑태자 아니면 이거 할 사람도 없지.
“모르겠고, 빨리 시작이나 하자.”
“좋아. 시작하자고.”
흑태자가 내 옆에 있는 유지를 향해 싸인을 보냈다.
“응, 좋아. 김. 시작할게.”
유지가 양복을 가다듬은 채로,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오늘 사회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대기실에 있는 모니터에 사회자 단상에 선 유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녕하시렵니까? 오늘의 결혼식 및 행사 사회를 맡은 검성, 쿠로사와 유지데스. 바쁘신 와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주고,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생중계를 통해 함께하는 모든 인류연합 시민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잠시 후 신랑 김덕성 군과 신부 쿠로사와 하루 양,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양, 시노자키 린 양, 니시자와 에리 양, 카미야 마코토 양, 호시노 카스미 양, 사이온지 아리스 양, 마유즈미 마유 양, 사토우 레나 양, 빌헬미나 하이젠버그 양, 요시자키 세이라 양, 베아트리체 양, 에반젤린 스토어트 양, 벨라 양, 한서진 양, 유세라 양, 이시하라 사오리 양의 예식을 시작할 예정이오니, 현장에 참석 중인 인류연합 시민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유지가 사회자 멘트를 내뱉었다.
“파트너. 그럼 나도 주례 보러 갈게. 긴장하지 말라고. 오늘은 좋은 날이야. 우리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시집가는 날이기도 하니까, 긴장해서 실수라도 하면 가만 안 둘거니까 명심하고. 하하하하하하.”
흑태자가 협박 아닌 협박을 남긴 뒤에 내 어깨를 툭 치고 대기실을 나갔다.
곧이어 모니터 영상에 주례자 단상에 선 흑태자가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신랑 김덕성 군, 입장해주세요.]모니터에서 유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합동 결혼식.
마침내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대기실 거울을 보았다.
거기에는 내 모습이 있었다.
신경질적인 인상을 지닌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청년.
나는 내 얼굴을 응시하면서, 턱시도의 옷맵시를 가다듬은 뒤에 대기실을 나섰다.
찰칵, 찰칵, 찰칵!
대기실을 나서서 빌어먹을 김덕성 광장에 설치된 예식장의 카페트를 밟자마자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김덕성 님!”
“저를 가져요!”
“황제 폐하!”
“김덕성 폐하 만세!”
“어흑흑흑! 김덕성 폐하의 용안을 두 눈으로 보는 날이 오다니!”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등 뒤에서는 군중들이 연신 내 이름을 외치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돌겠네.
내가 카페트를 밟으며 입장하자, 웅장한 행진곡이 연주됐다.
부웅!
동시에 전투기 편대가 날아올라 푸른 하늘에 형형색색의 구름을 새기는 곡예비행을 펼쳤다.
턱시도를 입은 채로 단상 앞에 서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환호성이 울렸다.
주례석에 선 흑태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파트너.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흑태자가 내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살짝 긴장했었는데, 조금 풀린 기분.
“다음은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쿠로사와 하루 양,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양, 시노자키 린 양, 니시자와 에리 양, 카미야 마코토 양, 호시노 카스미 양, 사이온지 아리스 양, 마유즈미 마유 양, 사토우 레나 양, 빌헬미나 하이젠버그 양, 요시자키 세이라 양, 베아트리체 양, 에반젤린 스토어트 양, 벨라 양, 한서진 양, 유세라 양, 이시하라 사오리 양 입장해주세요.”
쿠로사와 유지가 히로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전부 불렀다.
누가 하루 오빠 아니랄까 봐, 하루 이름 제일 먼저 부르는 것 좀 봐라.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하는 결혼행진곡과 함께 17명의 신부가 동시에 입장했다.
새하얀, 하지만 저마다 다른 디자인의 부케를 든 17명의 히로인들이 전투기처럼 편대를 이뤄 카펫을 걷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탁.
행진곡이 끝나면서, 나를 가운데 두고 17명의 히로인이 내 살짝 뒤에 일렬로 도열했다.
“흠흠. 좋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2월 15일. 제 파트너인 구세주 김덕성 군이 인류의 적 메사이어로부터 세계와 인류를 구한 역사적인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이야말로 김덕성 군의 결혼식과 즉위식을 위한 최고의 축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흑태자는 사석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주례사를 읊었다.
그렇다.
오늘은 2월 15일.
메사이어와 내가 결전을 벌였던 그 날이었다.
“신랑인 김덕성 군은 인류의 적인 메사이어로부터 지구와 인류를 수호하였어며, 인류연합을 통해 인류를 결속하고 전쟁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신부인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양은 프랑스의 공주로서 흑태자인 저의 뒤를 이어 프랑스를 수호하고 나아가⋯⋯.”
흑태자의 주례사가 이어졌다.
누가 올리비아의 팔불출 사촌오빠 아니랄까 봐, 올리비아부터 신부약력을 읊는 흑태자.
그렇게 올리비아를 시작으로 17명의 약력을 모두 읊은 흑태자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결혼의 맹세를 진행하겠습니다. 신랑 김덕성 군은 여기 있는 신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양, 시노자키 린 양, 니시자와 에리 양, 카미야 마코토 양, 호시노 카스미 양, 사이온지 아리스 양, 마유즈미 마유 양, 사토우 레나 양, 빌헬미나 하이젠버그 양, 요시자키 세이라 양, 베아트리체 양, 에반젤린 스토어트 양, 벨라 양, 한서진 양, 유세라 양, 이시하라 사오리 양, 쿠로사와 하루 양의 17명 모두를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17명의 아내 모두는 평등하게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흑태자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히로인, 아니 17명의 신부와 사회자 쿠로사와 유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결혼의 맹세.
그 대답같은건 이미 정해놨다.
“네, 맹세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광장에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환호성이 퍼졌다.
내 맹세를 본 흑태자가 씨익 웃었다.
“신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흑태자의 시선이 올리비아를 향했다.
하얀 면사포를 쓰고, 백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올리비아의 시선이 흑태자와 나를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의 황녀이자, 빙의 직후에 학원에 온 나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히로인.
나는 그녀를 조력자로 써먹었지만, 사실 순진하고 호구같았던 올리비아가 내게 별 말 없이 도움을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올리비아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녀의 새침떼기 같은 성격도 사실은 싫지 않았다.
귀여우니까, 매력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전속 시녀 이야기도 이제는 싫지 않다.
겉보기에는 툴툴대면서, 사실은 나를 좋아하고 누구보다 나를 가장 먼저 지지하고 내 비밀을 알아차렸으면서도 기다려줬던 올리비아가 나는 좋았다.
사실 약혼자 이야기를 듣고 프랑스로 바로 향했던 이유도, 그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내 첫 조력자이자, 전속 시녀를 자처하던 새침데기 황녀인 올리비아가 좋았다.
“흥, 전속 시녀인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아니면 누가 저 바보를 거두겠어요! 제 대답은 당연히 합께한다예요!”
오호호호호호호호호호!
올리비아가 의기양양한 아가씨 웃음을 터뜨리면서, 부케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이래야 올리비아지.
“신부 시노자키 린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흑태자의 시선이 이번에는 시노자키 린을 향했다.
린의 모습이 보인다.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묶은 남색 머리카락과 남색 눈동자. 냉막한 인상이 인상적인 늘신한 미녀. 그녀가 입은 노출도 낮은 하얀 웨딩드레스도 린의 폭발적인 폭유와 뇌색적인 몸매를 감출 수 는 없었다.
린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시노자키 린.
그녀와의 첫 만남은 올리비아와 마찬가지로 별로 좋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이유없이 내게 시비를 걸던 린에게 도게자를 시킬 정도로 그녀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고.
임간학교 때 살짝 관계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린은 귀찮은 존재였다.
가문의 명령이니 어쩌니 하면서 내게 쓸데없는 구혼 행위를 하는 그런 존재.
하지만 여름 학교 때, 무인도에서 그녀가 나를 돌봐준 이후부터.
그때부터 사실은 나는 린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린 역시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되어 있었다.
날 위해서 연마한 요리 실력도, 때때로 보여주는 모성 가득한 미소도, 과감하지만 묘한데서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도, 현모양처를 자처하는 린의 모습도.
나는 전부 좋아한다.
“나는 그의 현모양처이니, 마땅히 그리하겠다고 답하겠다.”
린이 내게 대답하면서 옅게 웃었다.
“신부 니시자와 에리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흑태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시야에 이번에는 에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고, 목에는 여전히 개목거리를 찬 상태에서 부케를 든 주황색 트윈테일 미소녀, 에리의 모습은 17명의 히로인 중에서 미모로는 단연 압도적 1등이었다.
니시자와 에리.
그녀와 나는 다른 히로인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악연으로 얽혀 있었다.
남성 공포증으로 인해 날 싫어하던 에리와 그녀의 시비를 용납할 수 없던 나와의 승부는 결국 그녀의 패베로 끝나면서, 에리는 개목걸이 도게자를 해야했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는 에리를 궁지에 몰기 위해 징계 위원회까지 개최했다
지금 되돌아본다면 그녀가 했던 행동에 비해서 내가 너무했던 게 아닐까 조금 미안해진다.
하지만 에리는 오히려 그런 나를 구원자라고 생각하며 주인님으로 받아들였다.
나를 상냥하다고 말해줬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에리와의 미운 정이 쌓인 결과 어느새 그녀 역시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개목걸이랑 주인님 호칭은 아직도 조금 들을 때마다 꺼려지지만, 그래도 나는 에리가 좋다.
그녀 역시 내 미래에서는 없어서는 안 된다.
“에리링도 물론 오케이야! 주인님의 영원한 노예인 에리링이 맹세를 거절할 리가 없잖아?!”
에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개목걸이를 만지면서 말했다.
그녀의 주황생 트윈테일이 흔들렸다.
역시 쪽팔린다.
문자 그대로 전 세계인이 보고 있는 앞에서 노예선언을 하다니.
미치겠다 정말.
“신부 카미야 마코토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다음 차례는 마코토.
짧은 초록빛 머리카락 위에 씌워진 면사포와 린과 맞먹을 정도로 커다란 폭유를 지닌 녹안의 미소녀, 카미야 마코토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마코토와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당황했었다.
원작보다 빠른 타이밍에 그녀가 전학을 왔었으니까.
방 재배치를 신청했다가 그녀와 같은 방이 되었던 첫 만남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설마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그녀 역시 내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짧은 머리도, 수줍은 많은 성격도 전부 귀엽고 매력적이다.
마코토 역시 다른 히로인들과 마찬가지로 내 소중한 신부다.
“네, 그 분의 검으로서 주, 주군을 영원히 지키겠습니다!”
마코토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더듬었다.
“신부 호시노 카스미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흑태자의 시선이 이번에는 카스미 선배를 향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보랏빛 생머리와 자안이 인상적인 청순한 미모의 미소녀.
카스미 선배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카스미 선배가 작게 후배 군이라고 입 모양으로 나를 부르며 얼굴을 붉히고 웃었다.
카스미 선배는 린, 에리, 올리비아처럼 빙의 초반에 만났던 히로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녀의 약점을 통해서 카스미 선배를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빌어먹을 상냥한 라노벨 세계답게 그녀는 내게 멋대로 반해버렸다.
아니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 구원을 약속했을 때부터 카스미 선배는 그랬던 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내가 카스미 선배를 구원했으니, 내가 그녀를 당연히 책임져야 한다.
카스미 선배의 후배 군이라는 호칭도 이제는 별로 싫지만은 않다.
초대면에 들었던 그녀의 어질어질했던 말투도 이제는 괜찮다.
그녀가 어떤 모습이건 전부 매력적이다.
그러니 나는 마지막까지 카스미 선배를 책임질 것이다.
“네! 후, 후배 군의 아내가 될 거에요. 후에에에⋯⋯.”
카스미 선배가 얼굴을 붉히면서 손가락을 꼼지락했다.
“신부 사이온지 아리스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흑태자의 주례사가 귀에 울렸다.
시야에 아리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 신비로운 눈동자가 매력적인 하얀 피부를 지닌 늘씬한 모델 체형의 미녀.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은 아리스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사이온지 아리스.
유일하게 빙의 전부터 최애캐로 좋아했던 히로인.
빙의 이후에도 그녀와는 별로 나쁜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아리스는 올리비아와 마찬가지로 나를 가장 많이 도와준 히로인이었다.
아리스와의 특훈이 없었더라면, 그저 날로 먹고 싶다고만 생각했으면 나는 진작 빌런과의 대결에서 패배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녀와의 특훈이 있었기에 나는 리그의 13사도, 포 호스맨, 나아가 메사이어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화제에서 나는 깨달았다.
아리스 역시 그 나이대의 소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에게는 별것 아닌 고민이라도, 아리스에게는 심각한 고민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전부 책임지기로.
그 이후부터 아리스 역시 내 히로인이었다.
그녀의 매력적인 은빛 눈동자도, 찬란한 은빛 머리가락도, 이지적이고 차가워 보이는 미모도, 당황하면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모습도 전부 내 소유다.
그러니 아리스 역시 내 최애캐, 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맹세합니다.”
아리스가 차분하지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하얀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신부 마유즈미 마유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마유 선생, 아니 마유의 모습이 보였다.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애니메이션에서도 바스트 모핑으로 강조됐을 정도로 커다란 가슴이 인상적인 미녀의 시선이 나와 흑태자를 향했다.
마유즈미 선생.
수학여행에서 그녀가 생도들을 위해 희생했던 장면은 아직 뇌리에 선명했다.
이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은 사람들이 죄다 호구라서 큰일이다.
24세 때부터 노처녀라고 스스로 자책하던, 전혀 노처녀가 아닌 마유 역시 내 소중한 히로인이었다.
“네! 마유도 맹세해요!”
마유즈미가 웃으면서 힘찬 목소리로 답했다.
“신부 사토우 레나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사토우 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연두색 머리, 연두색 눈동자를 지니 병약한 인상의 미소녀. 카스미 선배의 친구이자, 교토 연수회에서 내가 구원한 소녀.
최근에야 하렘으로 편입되었지만, 카스미 선배의 친구이자 내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니 만큼 그녀 역시 소중한 아내였다.
“네, 맹세해요.”
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부 빌헬미나 하이젠버그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다음 타자는 빌헬미나.
미소녀인 그녀의 아이보리색 머리와 황금빛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얼굴을 붉히는 빌헬미나의 모습이 보였다.
언더테이커, 마크 윌리엄 캘러웨이.
원작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히로인이자 흑태자와 세이라의 지인이며, 아리스의 어머니와 세이라, 그리고 내 어머니를 치료해준 은인.
그녀 덕분에 우리 어머니는 삶을 좀 먹던 병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베아트리체, 사오리와 함께 양방향 게이트 개발의 핵심 연구자.
그녀가 없었더라면 양방향 게이트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이모탈 하트를 이용하려 접근했고, 거래로 맺어진 관계였지만 지금은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빌헬미나가 화들짝 놀랐다.
저런 모습도 귀엽다.
“⋯응⋯. 맹세해⋯⋯.”
빌헬미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부 요시자키 세이라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흑태자의 목소리와 함께 요시자키 세이라가 요염하게 웃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백발과 루비를 닮은 적안이 반작였다.
요시자키 세이라.
학원 이사장인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위기 때마다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왔던 그녀의 조력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다.
내게 있어 세이라는 올리비아, 아리스와 함께 가장 도움이 된 히로인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꺼려졌지만, 이제는 그녀의 진심을 알고있기에 괜찮다.
이제 나는 세이라가 좋았다.
다른 히로인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눈이 마주친 세이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맹세한다.”
세이라가 훗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신부 베아트리체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이번에는 베아트리체가 있었다. 샛노란 금발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안대가 인상적인, 웨딩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신선이 나와 마주했다.
베아트레체.
진리의 교단의 성녀.
에반젤린의 친구이자 양방향 게이트 연구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자인 그녀에게도 나는 빚을 졌다.
게다가 겉으로는 오만한 중2병을 연기하지만, 사실 허접 성격이라는 반전 매력이 귀엽다.
지금도 나랑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는 모습이 매력 포인트다.
베아트리체 역시 내 신부다.
“물론, 홍련의 성녀인 여의 반려가 될 남자라면 마땅히 구세주 정도는 되어얒. 후후후후.”
베아트리체가 중2병 멘트를 내뱉었다.
“신부 에반젤린 스튜어트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흑태자의 다음 멘트가 에반젤린을 향했다.
허리 부근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분홍색 트윈테일이 인상적인 온화한 인상의 거유 미녀.
에반젤린이 핑크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화사하게 웃었다.
에반젤린 스튜어트.
원작에서는 비중도 인기도 없던, 올리비아 하위호환 소리를 듣던 서브 히로인 캐릭터.
하지만 현실의 에반젤린은 서브 히로인도 누군가의 하위 호환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말투가 많이 이상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좋고 무엇보다 일면식도 없는 날 지키려고 스스로 서슴없이 희생한 그녀에게 나는 아직도 마음의 빚이 남아있엇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에반젤린 역시 내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내가 좋아하는 내 신부엿다.
“하와와와. 물론이와요!”
에반젤린이 그녀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로 답했다.
“신부 벨라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메이드복이 아닌 웨딩드레스를 입은 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하지만 살짝 긴장된 표정을 한 벨라.
올리비아의 전속 시녀이자, 날 주인님의 주인님이라는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그녀 역시 내 소중한 아내이다.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기도 하고.
빙의 초반에 그녀가 몇 번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주인님의 주인님께 평생토록 봉사할 엇을 맹세합니다.”
벨라가 맹세하며 옅게 웃었다.
평생토록 봉사가 뭐냐고.
어이가 없다.
“신부 한서진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이번에는 한서진이었다.
한서진의 회색 단발이 보엿다.
한서진.
원작에서는 나온 적도 없던, 하지만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줬던 히로인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와 한국의 백업이 없덨다라면, 나는 꽤 고생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렘 계획을 실행해서 모두를 책임진다는 내 발언에 법적 근거를 더해준 것도 한서진이었다.
항상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처리하는 유능한 비서면서도, 막상 애정표현에는 면역이 없어 부끄러워하는 반전 매력이 귀여운 한서진이 나는 좋았다.
그녀는 지금도 부정하겠지만, 한서진 역시 당당한 내 아내 중 한명이다.
“⋯⋯맹세합니다.”
한서진이 살작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신부 유세라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다음은 유세라였다.
한류 아이돌답게 아름다운 미모와 인상적인 코토리 베이지 머리를 가진 미녀 유세라가 하얀 웨딩 드레스 차림으로 나를 응시했다.
국뽕 너튜브에서 지겹게 엮일 때만 하더라도, 나와 그녀가 진짜 인연으로 엮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서진만큼은 아니었지만 유세라 역시 재단 이사장으로 알게 모르게 나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기에 지금은 유세라 역시 내게 없어써는 안 될 귀중한 히로인이었다.
“네! 맹세할게요!”
유세라가 활기찬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신부 이시하라 시오리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평소와는 달리 빨간 머릴 단정하게 정리한 모습이 보였다.
이시하라 사오리. 이시하라 다이키의 여동생이자 쵸-천재 과학자.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양방향 게이트는 물론, 지구-2의 기술 문명이 SF 수준까지 발전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보면 사오리야말로 내 진짜 은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내 팬이라고 해서 당황했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다.
게다가 스스로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착각과는 달리, 실제 사오리는 꽤 매력적인 미소녀였으니까.
그녀역시 내가 사랑을 맹세한 내 신부다.
참고로 안경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네! 매, 맹세할게요⋯.”
사오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 귀여운 미소가 떠올랐다.
“신부 쿠로사와 하루 양은 김덕성 군을 신랑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신랑을 사랑하고 다른 아내들을 존중하며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마지막, 쿠라사와 하루의 차례가 돌아왔다.
나와 하루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윙크했다.
끝을 빨간색으로 물들인 검은 머리를 사이드 테일로 묶은 적안의 미소녀.
쿠로사와 하루.
원작의 주인공이자 이제는 내 친구가 된 쿠로사와 유지의 여동생이자 처음으로 내 모든 비밀을 알아차린 히로인.
하지만 비밀을 알아차렸는데도, 둘만의 비밀이라며 정말로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지켰던 어떻게 보면 내 모든 면을 알고도 나를 좋아해준 히로인.
동시에 가장 어지러운 말투를 지녔지만, 그런 면도 귀여운 하루야말로 내 가장 소중한 신부 중 하나였다.
하루가 웃었다.
“니시시시. 그럼! 당연하지! 하루는 덕성 오빠의 쵸-카와이한 갸루 신부가 될 거라고 태어날 때부터 결심했으니까!”
하루가 으쓱 어깨를 올리면서 말했다.
“신락 김덕성 군과 신부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양, 시노자키 린 양, 니시자와 에리 양, 카미야 마코토 양, 호시노 카스미 양, 사이온지 아리스 양, 마유즈미 마유 양, 사토우 레나 양, 빌헬미나 하이젠버그 양, 요시자키 세이라 양, 베아트리체 양, 에반젤린 스토어트 양, 벨라 양, 한서진 양, 유세라 양, 이시하라 사오리 양, 쿠로사와 하루 양은 각 가문의 부모님 및 친인척과 인류연합 소속국의 지도자, 인류연합의 모든 시민을 모신 가운데 일평생 희노애락을 함께할 부부가 되기를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저 흑태자 라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인류연합의 모든 시민 앞에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증인이 되어주신 모든 인류연합의 시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흑태자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와 함께 함성이 울리고 폭죽이 푸른 하늘을 수놓앗다.
전투기 편대의 곡예비행은 덤이었다.
내 시야에 17명 히로인 모두의 모습이 보였다.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시노자키 린 , 니시자와 에리 , 카미야 마코토 , 호시노 카스미 , 사이온지 아리스 , 마유즈미 마유, 사토우 레나, 빌헬미나 하이젠버그, 요시자키 세이라, 베아트리체, 에반젤린 스토어트, 벨라, 한서진, 유세라, 이시하라 사오리, 쿠로사와 하루까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과 함께 이쪽을 감격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부모님, 그리고 모든 지인과 하객들에게 인사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다음은 인류연합의 위대한 영도자 김덕성 님의 황제 대관식이 인류연합 황궁에서 열리겠습니다.”
유지의 말고 함께 식장 앞에 예식용 세단이 한 대 도착했다.
나를 황궁까지 데려갈 전용차였다.
나는 조용히 차에 탑승했고,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꺄아아아아아아!”
“김덕성 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울고불고 난리가 난 대중들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광장을 지나 도착한 황궁.
웬만한 마천루보다 훨씬 높은 고도를 자랑하는 피라미드 모양의 레드카펫이 깔려있었다.
광장과는 달리, 황궁에는 조용히 촬영하는 촬영기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레드카펫을 따라서 걸었다.
곧이어 도착한 차에서 내린 열일곱 명의 히로인들이 나와 함께 걸었다.
그렇게 황궁 정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샹들리에가 허공에 걸려 있고, 각종 예술품이 전시된 초대형 그랜드 홀.
거기에는 인류연합 소속 모든 국가의 국가원수와 시노자키 이치로를 포함해서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유력인사들, 내 친구인 쿠로사와 유지와 이시하라 다이키,
마지막으로 대관식을 담당할 흑태자가 있었다.
“하트너. 이리 오라고.”
흑태자가 웃었다.
나는 천천히 레드카펫을 걸어 그 앞에 다가간 뒤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리 파트너, 많이 컸네. 이 흑태자 님도 못한 황제를 다 해보고 말이야.”
흑태자가 농담을 던지면서, 웃으며 보석으로 장식된 금관을 내 머리 위에 씌웠다.
“자. 파트너 이제부터 파트너가 인류연합의 황제야. 잘해보라고.”
비록 실권이 없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황제였지만 아무튼 황제는 황제.
내가 황제라니.
아직도 실감이 안 났다.
흑태자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의 뒤에는 인류연합 헌장이 올려진 화려한 탁자가 있었다.
나는 탁자에 다가가 헌장 위에 손을 엊고 미리 외워둔 선서문을 말했다.
“선서. 나는 인류연합의 황제로서 인류연합 헌장을 준수하고 인류연합과 모든 시민을 보위하며 황제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인류연합 시민 앞에서 엄숙히 선서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화려한 실내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인류연합 황궁에서 즉위위원회가 김덕성 폐하의 황제 즉위를 마침내 승인했습니다.] [마침내 위대한 영도자 김덕성 님께서 인류연합의 황제에 즉위하셨습니다.] [김덕성 황제 폐하의 즉위를 지켜보던 지구-2의 길거리에서는 지금 환호성과 눈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지구-1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지만 축제의 열기는 여기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덕성 특별시의 현장 분위기는 더욱 뜨겁습니다. 김덕성 폐하의 은덕이 벌써 전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김덕성 황제 폐하의 즉위를 축하하는 기념으로⋯⋯.]황궁 한쪽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즉위 축하 뉴스가 흘러나왔다.
뉴스에서 보이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지구-1에서는 이미 내 얼굴을 새긴 초상화를 들고 흔들며 열광하던 세계 시민들이 실신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국은 물론 일본, 미국, 소련, 유럽, 영국,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인도, 남미를 가리지 않고 세계 모든 곳에서 김덕성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며 내게 열광했다.
세계 곳곳에 세워진 내 동상은 덤이었다.
그것은 광기였다.
소름이 돋네.
지구-2뿐만이 아니었다.
알파 센타우리, 화성, 검성을 포함한 외계 개척 행성에 세워진 개척 도시에는 이미 내 이름을 딴 광장과 내 동상이 즐비했다.
개척행성에서도 모두가 내 이름을 부르고 열광하고 있었다.
지구-1은 지구-2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지지자들이 행진하며 기쁨의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인류연합의 미래, 이래도 괜찮을까?
“이로서 즉위식을 끝내겠습니다.”
유지의 말을 끝으로 즉위식이 끝난 그때.
“이봐요 당신! 이제 정식으로 당신의 아내가 되었으니 당연히 첫 아이는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만들거죠? 그렇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아였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첫 아이?!
황제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엄숙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너져 당황하고 있던 그때.
“보나파르트, 그게 무슨 소리지? 김덕성의 첫 아이는 둘도 없는 현모양처인 내가 가지는게 당연하지 않느냐?”
린이 에리를 노려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방금 결혼식 올렸다고.
이제 황제 됐는데 이게 무슨⋯⋯.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에잇! 에리링이 선수칠 거야! 주인님! 에리링이랑 아이만들기 하자! 에리링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인님이 원하면 언제건 가능하니까!”
풀썩.
웨딩드레스를 입은 에리가 그대로 나를 덮쳤다.
그녀가 요염하게 웃으면서 목에 채워진 개목걸이를 만졌다.
어이가 없다.
넌 시간과 장소를 좀 가리면 안 될까?
데구르르르.
내 머리에 씌워져있던 왕관이 벗겨져 황궁 그랜드 홀 바닥을 뒹글었다.
“잠깐! 에리쟝! 새치기는 반칙이야! 에리쟈이라도 용서할 수 없어!”
뒤이어 마코토가 나를 덮쳤다.
이거 어디서 본 패턴 같은데.
내가 기시감을 느끼던 그때.
“에리링 언니! 마코삐 언니! 둘 다 비켜! 처음은 당연히 초 카와이 갸루 신부인 하루의 차지라고! 니시시시시!”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쿠로사와 하루.
“하와와와와! 소녀도, 소녀도 질 수 없사와요! 소녀도 김덕성님의 아이를⋯⋯.”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를 덮치는 영국 공주님 에반젤린 스튜어트.
“반려여! 설마 홍련의 성녀인 여 이외의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건 아니겠지? 홍련의 성녀인 여 이외에 황태자의 어미가 될 인간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입으로는 당당한 중2병 대사를 내뱉지만, 얼굴을 새빨개진 베아트리체.
“꼬마야! 이 몸도⋯⋯, 네 아, 아이를 갖고 싶구나⋯⋯.”
요염한 척 부끄러워하는 요시자키 세이라.
“나도⋯⋯. 안 질 거야⋯⋯.”
뒤에서 더 부끄러워하는 빌헬미나 하이젠버그.
“선생님도! 선생님도 김 군의 아이를⋯⋯.”
활기찬 목소리로 외치는 마유즈미 마유.
“후배 군⋯⋯. 후배 군은 나쁜 남편이지만⋯⋯. 그래도 나는 후배군의 아이가 갖고 싶어⋯.”
얼굴을 붉히는 호시노 카스미.
“다른 분들은 레나가 먼저 임신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카스미 선배 옆에서 끼어드는 사토우 레나.
“김덕성 님! 설마 절 그냥 방치하실 건 아니죠? 서진이랑 같이 저도 김덕성 님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저, 저는 세라가 그냥 끌고 와서⋯⋯. 나중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자신감과 인싸력 넘치는 목소리의 유세라와 대조적으로 부끄러워하는 한서진.
“주인님의 주인님. 아가씨 다음에는 저를 선택해주시길.”
조용한 목소리의 벨라.
“덕성쟝! 나도 덕성쨩이랑 아이 만들기 할래!”
갑자기 끼어든 사오리.
“김덕성 군. 제가 최애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내, 내가 먼저제? 그, 그렇제?!”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사투리를 내뱉는 아리스까지.
열일곱 아내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녀들이 나를 덮친 채로 바라보면서 내게 말했다.
“””””””””””””””””누구를 선택하실 건가요?!”””””””””””””””””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시노자키 린 , 니시자와 에리 , 카미야 마코토 , 호시노 카스미 , 사이온지 아리스 , 마유즈미 마유, 사토우 레나, 빌헬미나 하이젠버그, 요시자키 세이라, 베아트리체, 에반젤린 스토어트, 벨라, 한서진, 유세라, 이시하라 사오리, 쿠로사와 하루까지.
열일곱 신부의 외침이 내 뇌리를 뒤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내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나는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인류연합의 황제니 어쩌니 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엄숙한 의식 뒤에 펼쳐진 김빠질 정도로 어이없으면서도 첫 아이라는 주제로 파멸적으로 경쟁하는 이 광경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질색했지만, 동시에 가장 좋아했던 라노벨 클리셰 같은 광경이자, 내가 가장 바랐던,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미래였다.
2월 15일.
메사이어를 격살하고 학원을 졸업하고, 양방향 게이트를 열고, 어머니를 치료하고 부모님과 재회한 뒤에도 시간이 흐른 오늘에서야.
나는 모드를 책임진다는 말을 모두와의 결혼으로 실현헀고, 라노벨답게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상냥한 에필로그에 도달했다.
나는 마침내 도달한 트루엔딩과 다가올 미래를 떠올렸다.
이제야 나는 이 빌어먹을 정도로 상냥한 라노벨 세계가——
내가 찾아낸 결말을 본 뒤에야,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들의 육탄공세에 파묻히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
쪼르르르, 딱.
수라장 사이로 귓가에 시시오도시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누가 황궁에 이런걸 설치⋯⋯.
아니 됐다.
이제는 익숙하다.
그래.
이래야 상냥한 라노벨이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