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56)
“야, 린. 헛소리하지 말고 이거나 입어.”
태클 거는 것도 이제 지친다.
가방에서 챙겨왔던 비옷을 꺼내 린에게 던진다.
투명한 비닐 우의를 받아든 린의 손이 떨린다.
“나, 나한테 주는 건가?”
비닐 우의를 걸치던 내 귓가에 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그러니까 입어라. 감기 걸려서 쓸데없이 사람 빡치게 하지 말고.”
“감기······.”
비닐 우의를 손에 든 린의 손이 떨린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입으라고. 좀.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라.”
“아, 알았다.”
그녀가 비옷을 걸친다.
안쪽이 다 비쳐 보이는 비닐 우의와 흠뻑 젖은 체육복 아래 비치는 승부 속옷이 눈을 어지럽게 한다.
시선을 돌리면서 말한다.
“입었으면 따라와. 이상한 짓 하러 가는 거 아니니까, 망상은 하지 말고.”
“그, 그러겠다······.”
그녀가 내 곁에 바짝 붙는다.
헌터 워치의 홀로그램 지도를 켠다.
아까 표시한 동굴의 위치 좌표가 보인다.
“김덕성······.”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데?”
“그······.”
린이 손을 꼼지락댄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다.
“······소, 손 잡아주면 안 되겠나?”
린이 손을 내민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빨리 동굴로 가서 몸을 녹여야 감기에 안 걸릴 텐데.
얘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목에 턱턱 걸린다.
“안 잡아주면 안 움직일 거지?”
“그, 그건······.”
린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럴 생각이 만만한 것 같다.
그놈의 미인계는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를 못 한 모양.
한숨을 쉰다.
손잡는 거야, 별거도 아니고.
“에휴.”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잡는다.
빗물 때문에 차가워진 손.
“흐, 흐엑?”
손이 맞닿자 린이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네가 카스미 선배냐?
“이제 됐지? 제발 입 닥치고 그냥 가자.”
“······아, 알았다.”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면서 수해 내부를 걷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계종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쏴아아아. 번쩍! 우르릉!
비바람과 번개, 천둥이 계속 휘몰아치는 점만 빼면 말이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애니메이션에서 봤을 때는 그냥 짧게 지나가는 럭키 스케베 에피소드였는데, 직접 겪으니까 이렇게 엿 같은 상황이 따로 없다.
40km 행군 때 폭우를 맞던 바로 그 끔찍한 기분이다.
마침 비옷을 입고 린이라는 짐덩이를 달고 있으니 얼추 행군 비슷하기는 하다.
슬슬 지도에 표시된 좌표와 가까워지고 있다.
저 멀리, 동굴 입구가 보인다.
비를 피할 장소 도착이다.
*
동굴 입구 근처.
쏴아아아.
바깥의 빗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동굴 안.
거기에서 린은 김덕성과 단둘이 있었다.
물론 그녀가 원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거 받아. 비옷은 이제 벗고.”
툭.
김덕성이 가방에서 뽀송뽀송한 와이셔츠와 반바지를 던진다.
“사이즈 안 맞아도 그냥 입어. 너랑 같은 조 될 줄 모르고 그냥 챙긴 거니까. 젖은 옷 입고 있다가 쓸데없이 아프지 말고.”
“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옷으로 가, 갈아입으라는 건가?”
린의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그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와, 와이셔츠라니. 이게 말로만 듣던 알몸 와이셔츠······.’
요즘 여자력을 기르기 위해 열심히 챙겨보고 있는 여성 잡지에서 봤던, 요즘 남자들이 좋아하는 패션 3위에 빛나는 옷차림.
‘이, 이 옷을 입으면 나도 그를······.’
린의 머릿속에서 망상이 폭주한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여, 역시······.”
“헛소리하면 밖으로 내쫓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다.”
냉정하게 잘라내는 김덕성.
린이 고개를 떨군다.
‘역시 그는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걸까.’
울컥.
자괴감이 든다.
당주의 명령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그녀는 김덕성의 곁에 맴돌며 수없이 그를 유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김덕성은 그때마다 그녀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보나파르트한테는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린이 입술을 깨문다.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최근 김덕성이 올리비아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누그러졌다는 사실을.
평소라면 질색팔색할 올리비아의 행위도 어제 저녁 요리대결에서는 왠지 모르게 받아주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린은 기분이 별로였다.
질투였다.
‘내가 왜 질투를······.’
린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그럼 옷을 갈아입겠다. 워, 원한다면 얼마든지 봐도 좋다. 너, 너는 미래의 남편이니까.”
“진짜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밖으로 내쫓는다.”
린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역시 난 당주님의 말씀대로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걸까······.’
최근 들은 당주의 질책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르륵, 사륵.
린이 젖은 옷과 속옷을 벗고, 그에게서 건네받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물기 없는, 뽀송뽀송한 옷의 감촉이 기분 좋다.
왠지 모르게 그의 체향이 묻어있는 것 같아서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린의 얼굴이 붉어진다.
“다 갈아 입었다.”
“그럼 저기 앉아.”
화르륵.
어느새 온기가 느껴진다.
동굴 한복판, 김덕성이 미리 준비해둔 고체연료에 불을 붙인 것이다.
맞은편에는 낚시 방석이 있다.
폭우를 대비해서 김덕성이 임간학교 전부터 준비해둔 물품들.
린이 자리에 앉는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는다.
쏴아아.
그칠 기미가 없는 폭우 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운다.
린의 눈동자가 김덕성을 힐끗힐끗 향한다.
“이거 받아라.”
김덕성이 린에게 초록빛 핫팩과 담요를 던진다.
포장을 뜯어서 이미 뜨끈뜨끈하게 열을 발산하는 핫팩을 받아든 린의 얼굴이 붉어진다.
‘따뜻해.’
온기가 느껴진다.
물기 때문에 차갑게 식었던 몸에 생기가 돌아오는 기분이다.
초록빛 담요를 망토처럼 두른다.
차가웠던 체온이 점차 올라가는 기분.
그녀의 시야에 김덕성의 모습이 보인다.
양아치처럼 생긴 얼굴, 물에 젖어서 그런지 착 달라붙은 체육복은 그의 근육질 상체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린의 얼굴이 붉어진다.
“므으······.”
그녀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김덕성.”
“왜.”
“역시 나는······. 여자로서 매력이 부족한 건가······. 요리도 모, 못하고······. 유, 육탄 공세도······.”
린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린의 입술이 떨린다.
자괴감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닿지 않았다.
오히려 구박만 잔뜩 받았다.
집안에서도, 그에게도.
린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낀다.
그녀의 귓가에 김덕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요리랑 육탄 공세랑 매력이 무슨 상관이야.”
“그렇지만······. 나는 요리도 못하고······. 육체적 매력도 없는······. 그래서 네가 나를······.”
“야, 너 내 말 진짜 귓등으로 들었냐? 내가 그딴 거 때문에 너 싫어하는 줄 아냐?”
“정말······. 아무 상관 없다고······?”
“그래, 아무 상관 없다고. 그딴 거랑.”
김덕성의 말에 린의 눈동자가 커진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내가 너 안 좋아하는 이유는 네가 날 진짜 좋아하는 거도 아니고, 전에 시비 걸고 그런 거도 하나도 반성 안 해서라고.”
“그건······.”
린의 말문이 막힌다.
그제야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의 말이 맞다.
“너도 솔직히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냥 협회장이 시켜서 하는 거잖아.”
“그건······.”
린이 입술을 깨문다.
처음에는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도······. 마찬가지다.”
“무슨 헛소리야?”
“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다, 당주님 건을 해결해준다고 하고······. 내, 내 감기도 걱정해주고······. 소, 손도 잡아주고······. 옷도 준비해주지 않았는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럼 대체 왜······!”
린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천애고아로 태어나서 시노자키 가문에 입양된 지금까지.
린은 제대로 된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가문에서 받은 건 질시와 구박.
이치로의 친자식들, 그녀의 양오빠들은 후계자의 자리를 꿰찬 그녀를 질투했고, 괴롭혔다.
당주인 이치로 역시 마찬가지.
애초에 도구로서 입양됐던 린이다.
그녀에게 이치로는 아무런 애정도 주지 않았다.
‘당주님, 아빠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난 네 아버지가 아니다. 너는 내 딸이 아니고. 너는 그저 가문의 검일 뿐. 도구가 내 자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한 번만 더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널 파양하겠다.’
린은 이치로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다.
‘당주님. 저 시노자키 일도류를 벌써 이만큼 익혔어요. 칭찬해주세요.’
‘칭찬···. 그런 쓸데없는 소릴 지껄일 정신머리가 남아있나. 일족에 감정이 실린 검은 필요없다. 어리광 피우는 도구는 폐기처분이지. 그러니 노력해라. 버려지기 싫으면.’
린은 그 어떤 칭찬도, 호의도, 애정도 받을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뜻한 칭찬 한 마디 들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건 차디찬 냉대와 학대뿐.
외부에서야 시노자키 가문의 아가씨, 일본 최고의 기재라고 떠들어댔지만.
시노자키 가문은 린에게 있어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차가운 지옥.
린은 가문과 세상,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평생을 보냈다.
기껏해야 어린 시절, 쿠로사와 가문과의 교류회에서 만난 소꿉친구 유지와의 추억이 그녀가 가진 좋은 추억의 전부였다.
‘당주님 일을 해결해준다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협회장 시노자키 이치로.
일본에서 그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린이 가문에서 학대받으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이유다.
현역 영웅조차 두려워하는 괴물.
일본 총리조차 고개를 숙이는 거물.
일본이라는 나라를 흑막 뒤에서 지배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권력자.
하지만 김덕성은 그런 협회장을 상대로 해결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약소국 한국의 생도가 농담으로라도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시노자키 이치로라는 이름의 무게는 그 정도로 무겁다.
하지만 그는 맞서겠다 선언했다.
‘나를 해방해주기 위해서······.’
그건 시노자키 린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폭력적인 호의.
그뿐만이 아니다.
입은 거칠지만, 되돌아보면 그는 오늘 한결같이 자신을 배려해줬다.
비에 젖은 그녀가 감기에 걸릴까 봐, 그녀를 세심하게 신경 썼다.
손을 잡아달라는 억지를 들어줬다.
감기에 걸리지 말라고 직접 걱정까지 했다.
여자력을 걱정하며 꼴사납게 울던 자신에게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는 말까지 했다.
‘그렇게 말하면······.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린이 입술을 깨문다.
아니다.
어쩌면 니시자와와 보나파르트를 질투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조금씩 호감이 자라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린은 이제야 비로소 본인의 마음을 자각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큿.”
두근, 두근.
그녀의 가슴이 뛴다.
그녀는 이제야 이해했다.
자존심 높은 프랑스의 기사공주가 대체 왜 그의 전속 시녀를 자처하고 있는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착각, 아니 됐다. 말을 말지.”
김덕성이 입을 닫는다.
어차피 시노자키 린은 소꿉친구 히로인.
적의와 냉대, 학대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 유일하게 호의를 베풀었던 쿠로사와 유지에게 아직도 남몰래 호감을 품고 있다는 캐릭터 설정.
그러니 쿠로사와 유지가 이치로를 구원해서 최종적으로 린을 가문에서 해방한다면, 어차피 그와 이어질 거라 김덕성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