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57)
“······너는 나쁜 남자다. 김덕성. 최악이다.”
이상형도 아닌 나쁜 남자에게 진심으로 반해버린 나는 더 최악이다.
린은 차마 내뱉지 못한 뒷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고체 연료 위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헐렁한 와이셔츠 자락에 얼굴을 묻는다.
왠지 좋은 향기.
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핫팩을 품에 안은 그녀가 코를 와이셔츠 소매에 파묻는다.
향을 맡는 린의 얼굴이 붉어진다.
“돌겠네. 맘대로 생각해라.”
번쩍! 우르르릉.
천둥 번개와 비바람이 휘몰아치며 김덕성의 한숨을 묻는다.
너는 좋은 친구야
“······너는 나쁜 남자다. 김덕성. 최악이다.”
화르륵.
고체 연료에 붙은 불이 타오른다.
린의 표정이 보인다.
불의 온기 때문인지 빨갛게 상기된 두 뺨.
소맷자락에 반쯤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인지 제대로 된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난데없는 매도라니, 어이가 없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이야.
“돌겠네. 맘대로 생각해라.”
더 골치 아프게 고민하기도 싫다.
하루빨리 이치로를 구원하던가 해야지.
그럼 이 기나긴 악연도 끊길 거다.
번쩍! 우르르릉.
천둥 번개가 친다.
5월이라도 비가 쏟아져서 그런지 날이 제법 쌀쌀하다.
고체 연료를 가져오길 잘했다.
핫팩을 손에 쥐고, 담요를 몸에 두른다.
따뜻하다.
역시 추위에는 핫팩이 최고지.
군대에서 배운 생존전략이다.
손으로 초록빛 핫팩을 흔든다.
꼬르륵.
귓가에 천둥 같은 배꼽시계 소리가 들린다.
“므읏.”
린이 괴상한 신음을 내뱉는다.
“마, 말해두지만 이건 내, 내 배에서 난 소리가 아니다······.”
그녀가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으며 말을 더듬거린다.
그런 거 안 물어봤는데.
헌터 워치를 켜서 시계를 본다.
오후 1시가 좀 넘은 시간.
점심시간이 맞기는 맞다.
가방을 열어 도시락을 꺼낸다.
“배고프면 너도 도시락 먹어라.”
“아, 알겠다······.”
린이 본인 가방을 열어 도시락을 꺼낸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 아직 희미한 온기가 남아있는 유부초밥이 보인다.
역시 도시락은 유부초밥이 국룰이지.
나무젓가락을 뜯어 유부초밥을 하나 입에 넣는다.
맛있다.
소풍 갈 때 엄마가 만들어준 그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유부초밥이 좋다.
“내 건 주먹밥이로군.”
부스럭.
린이 도시락 뚜껑을 열고, 김조각으로 아래를 감싼 전형적인 일본식 삼각 주먹밥을 꺼낸다.
아니, 나 빼고 다 주먹밥 도시락을 싸준 건가?
린이 떨리는 손으로 주먹밥을 한입 베어문다.
“큿······.”
린이 입술을 깨문다.
“분하지만······. 맛있군.”
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게 나와 보나파르트의 차이인가······.”
린의 평가를 듣고 나니 올리비아가 만든 주먹밥 맛이 좀 궁금해졌다.
“야, 린.”
“무, 무무무슨 일이지?”
린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필요 이상으로 더듬는다.
네가 올리비아냐.
“주먹밥 하나만 줘봐.”
“하나만 말인가?”
“내 유부초밥 하나 줄게. 이 정도면 공평하지?”
젓가락으로 유부초밥을 들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본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으, 응······. 굳이 줄 필요까지는 없지만······. 알았다······.”
내 유부초밥 하나와 그녀의 주먹밥 하나를 교환한다.
올리비아가 만든 주먹밥을 베어문다.
주먹밥 안에 있는 명란젓이 밥과 어울려져서 꽤 맛있다.
프랑스인이 만든 일본 주먹밥이 맛있다니.
“맛있네. 주먹밥.”
“역시 그런가······. 큿. 분하게 유부초밥도 맛있군. 역시 미식의 나라 프랑스 출신이라는 건가. 인정하지. 나의 완패다.”
대체 뭘 이기고 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비아가 다방면으로 쓸모 있는 건 사실이다.
도시락을 까먹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비가 그친다.
어느새 노을이 가라앉은 수해.
헌터 워치의 지도를 켜고 린을 데리고 동굴을 나서 베이스캠프로 귀환한다.
텐트 근처에 오자 카레 냄새가 풍긴다.
“주인님! 어서 와! 황녀님이랑 같이 카레 만들고 있었어! 저녁은 에리링의 사랑이 듬뿍 담긴 카레야!”
“당신, 왜 이렇게 늦은······. 뭐죠?”
카레 묻은 국자를 든 니시자와와 죽통으로 화로에 바람을 불어넣던 올리비아가 나를 반긴다.
올리비아의 푸른 시선이 린에게 향한다.
“이봐요. 그쪽이 왜 그의 옷을 입고 있는 거죠?”
“황녀님 말이 맞아. 젖소. 왜 네가 주인님의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아, 이거 말인가?”
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그녀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보고도 모르겠나? 오늘 김덕성과 나는 비를 피하려고 들어간 동굴 안에서 기정사실을······.”
뭐? 기정사실?
“헛소리고, 쟤 젖은 옷 입고 감기 걸릴까 봐 내 옷 빌려준 거야. 야, 린. 도착했으면 네 옷으로 갈아입어라. 좀.”
“······싫다. 오, 오늘은 계속 이 옷을 입고 있고 싶다.”
린이 붉어진 얼굴로 소맷자락을 만지작댄다.
“사람이 말을 좋게 하면 좀 들어라.”
“······알겠다.”
아쉬운 얼굴로 텐트 안으로 들어가는 린.
한번 말해서 재깍재깍 알아먹는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주인님의 셔츠를 입다니, 오늘은 젖소가 부러워. 내일은 에리링이 주인님이랑 같은 조 할래.”
“흐, 흥. 천박하게 외간 남자 옷을 빌려 입은 꼴이 부럽다니요? 역시 그쪽도 천박하군요. 몸가짐을 좀 바르게 하시라구요!”
“혹시 황녀님도 젖소가 부럽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
“무무무무슨 제가 그런 천박한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요! 으으으으으!!”
옆에서 올리비아와 니시자와의 파멸적인 대화가 들려온다.
젖소라니.
들을 때마다 현기증이 치민다.
피크닉 테이블에 앉는다.
“이봐요. 니시자와 양. 쓸데없는 헛소리 할 시간에 카레나 제대로 만들라구요!”
올리비아가 빨개진 얼굴로 니시자와를 향해 소리친다.
그렇지. 잘하고 있어. 올리비아.
역시 초호기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최고다.
“알았어. 황녀님 말 들을게.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에잇. 얍.”
니시자와 에리가 카레 냄비를 국자로 저으며 파멸적인 주문을 중얼대던 그때.
“······가, 갈아입었다. 전부.”
스르륵.
텐트 입구가 열리며 여벌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시노자키 린의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부르마를 입은 상태.
아까와는 다르게 파란색이 아닌 빨간색 부르마다.
빌어먹을 미인계는 아직도 포기 못 한 모양이다.
“갈아입었으면 내 옷 내놔.”
“그건······.”
린이 얼굴을 붉힌다.
그녀가 곱게 접은 내 셔츠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안 내놔?”
“아, 알겠다······.”
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에게서 내 옷을 탈환한다.
“오쓰! 형님! 저 돌아왔슴다!”
“나 왔어. 김.”
비에 쫄딱 젖은 꼴을 한 쿠로사와와 이시하라가 마지막으로 귀환한다.
“주인님! 에리링의 사랑이 듬뿍 담긴 카레 완성했어!”
“흥. 누구 맘대로 그쪽의 사랑이 담긴 카레인가요? 이봐요. 당신.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직접 만든 카레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라고요! 아시겠나요?”
곧이어 다가온 저녁 시간.
달카닥.
라노벨식 만담 끝에 내 앞에 카레 라이스가 놓인다.
군말 없이 카레를 한술 뜬다.
괜찮다.
이것만큼은 전생에서 먹던 한국 카레와 맛이 별반 차이가 안 나는 거 같기도 하다.
“맛있네.”
역시 임간학교는 카레지.
*
저녁을 먹은 뒤.
오늘의 설거지 당번 일을 하기 위해 나는 주인공 놈과 함께 베이스캠프 근처 개울가로 향했다.
자취하던 경험을 살려 그릇을 씻고 있는 내 옆에서 주인공 놈이 냄비를 닦는 모습이 보인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설거지 거리도 어느새 반 정도 줄어든 상황.
지금이 얘기를 꺼낼 적기다.
“야, 쿠로사와.”
“응. 김. 불렀어?”
쿠로사와 유지가 웃는 얼굴로 답한다.
매사 상냥한 라노벨 주인공다운 호구력 만땅 미소.
그를 보며 살짝 심호흡을 한다.
시노자키 린.
그녀와의 악연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이치로를 구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치로를 쿠로사와 가문에 대한 집착과 검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쿠로사와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주인공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그를 잘 설득해야 한다.
내가 일부러 유지와 함께 설거지 당번을 자처한 이유다.
일단 단둘이 있는 곳에서 감언이설로 주인공 놈을 구워삶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 린이 지금 곤란한 사정에 처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냐?”
떡밥을 던진다.
“시노자키의 사정······? 어떤 곤란한 사정 말이야? 시노자키한테 무슨 일 있어?”
예상대로 내가 던진 떡밥을 덥석 무는 쿠로사와 유지.
그가 진지한 표정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묻는다.
원작 2권 내용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주인공, 쿠로사와 유지는 시노자키 린이 고백하기 전까지 그녀가 처한 상황을 몰랐다.
이치로는 가문의 위신을 중요시하는 인물.
적어도 외부에는, 특히 쿠로사와 가문에는 화목한 가족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라는 뒷설정 때문이다.
“린이 실은 시노자키 가문의 수양딸이며, 가문 내부에서는 일족의 위신을 높여주는 도구 취급받으며 인간 대우조차 못 받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그건······.”
유지가 말끝을 흐린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가문에서는 제대로 된 사랑조차 받아본 적 없이 학대당하며 자랐다더군.”
“······역시 그랬던 건가. 시노자키의 얼굴에 있던 그늘은 그것 때문······.”
유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원작 2권 내용에 따르면 주인공 놈도 눈치가 없지는 않아서, 소꿉친구 시절부터 린이 뭔가 어두운 부분을 숨기고 있다는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단서가 없었을 뿐이다.
원작에서는 린이 직접 고백하지만, 원작이 비틀리고 린과 유지의 접점이 사라진 지금은 내가 말해줄 수밖에 없다.
“큭. 나란 놈은······. 소꿉친구가 괴로워하는데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유지가 입술을 깨문다.
첨벙.
그의 주먹이 분한 듯 수면을 내려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오버액션 연기를 현실로 보다니.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유지의 애니메이션 같은 혼잣말이 이어진다.
그의 뺨이 파르르 떨린다.
유지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한다.
“있지. 김. 어떻게 해야 하지? 시노자키를 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알려줘. 나한테.”
상냥한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내 의도나 정보의 출처 따위는 의심하지 않고, 소꿉친구인 린을 구할 방도를 물을 거라 생각했다.
주인공이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는 지극히 라노벨스러운, 하지만 예상했던 상황.
미끼를 문 대어가 입질을 시작한 순간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주인공 놈을 구워삶을 시간이다.
“시노자키 이치로, 협회장한테 대련을 신청해.”
“갑자기 협회장님한테?”
유지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예상했던 기출 문제가 출제됐으니, 이번에도 정확한 정답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나 대신 주인공 놈이 굴러서 협회장도 개과천선시켜서 팔불출 아빠로 만들고, 린과의 악연도 끊어줄 거 아닌가.
“협회장이 린을 학대한 이유는 네 아버지, 검성에 대한 열등감과 쿠로사와 가문의 그림자를 지워내기 위해서야. 만년 2인자로서 1인자였던 검성을 평생 뛰어넘지 못했던 협회장이 린한테 본인의 삐뚤어진 욕망을 투영하고 있는 거지.”
“······.”
유지가 침묵한다.
협회장의 열등감에 대해서는 유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설정.
내가 주인공 놈과 첫 만남에서 시노자키 얘기를 언급했을 때, 유지가 동요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랬던 건가. 시노자키가 차가워진 것도 단순한 경쟁심이 아니라······. 학대의 결과······. 협회장님의 속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까지 타락했을 줄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제멋대로 납득하는 주인공 놈.
이래서 느슨한 라노벨 세상이 편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한 신뢰 최고다.
심호흡을 한다.
여기서 한마디를 더 해서, 주인공을 움직여야 하는데.
라노벨적 대사를 또 내뱉어야 한다니, 끔찍하다.
“······협회장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쿠로사와. 임간학교가 끝난 뒤 협회장한테 쿠로사와 신검류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줘라.”
어색한 말투로 라노벨 대사를 내뱉는다.
내 말에 유지가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김. 네 말대로 내가 협회장님을 멈출게. 고마워. 역시 넌 내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야.”
주인공 놈이 내게 웃어 보인다.
저렇게 쉽게 넘어가도 되는 건가?
아무튼 목적은 달성했으니 그걸로 됐다.
이제 린의 지긋지긋한 미인계를 안 봐도 되겠지.
이번 건도 날로 먹기 성공이다.
속이 다 후련하네.
그릇을 수세미로 닦는다.
오늘따라 설거지가 더 잘 되는 기분이다.
*
유지의 시선이 김덕성을 향한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묵묵히 설거지에 몰두하고 있는 김덕성의 옆모습.
‘김은 입은 거칠어도 속은 상냥한 사람이구나.’
유지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자신도 몰랐던 소꿉친구 시노자키 린의 사정을 김덕성은 굳이 알려줬다.
더불어 그녀를 구원할 해결책까지 자신에게 제시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