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58)
그건 분명, 시노자키 린을 구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괴감과 상냥함에서 나온 행동이리라.
그러니 유일한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지금까지 학대당했던 시노자키 린을 구원해주기 위해.
그의 말대로, 협회장의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쿠로사와의 신검뿐이니까.
유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아닌 척해도 너도 시노자키를 신경 쓰고 있었구나. 김.’
시노자키 린이 김덕성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학원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교실에서 공개 고백을 한 그녀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유지도 린의 연심을 알고 있었고, 그에게 린은 소중한 소꿉친구였기에 그녀의 바람대로 김덕성과 이어지기를 속으로 응원도 했다.
그러나 김덕성이 린의 적극적인 애정공세에도 계속해서 그녀를 지나치게 밀어내는 모습에 솔직히 살짝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유지 자신의 착각이었다.
김덕성 역시 소꿉친구 린의 마음을 신경 쓰고 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녀의 사정을 자신에게 얘기해줄 이유가 없었다.
‘김, 너는 좋은 친구야.’
유지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진다.
과연 소꿉친구인 린이 반할 만한 남자다.
그라면 린을 가질 자격이 있다.
유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기쁜 소식을 김을 좋아하는 시노자키한테도 알려야겠어.’
김덕성이 들으면 절대 그러지 말라고 식겁할 발상을 떠올리며 유지는 그릇을 수세미로 닦았다.
동상이몽의 꿈이 깊어가는 저녁이었다.
나는 정말 엉망인 여자였구나
“일어나라. 김덕성.”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불침번은 네 차례다.”
불침번?
갑자기 군생활의 추억이 떠오르며 잠이 확 달아난다.
눈이 번쩍 떠진다.
“일어났군.”
넓으면서도 어두운 텐트 안.
거기에는 작은 손전등을 든 남색 포니테일 미소녀, 린이 있다.
하필 들어도 손전등이야.
군대 생각나게.
“······오늘 내가 말번초였지.”
비몽사몽한 머릿속에서, 오늘 불침번 순서가 생각난다.
나는 말번초, 린은 불쌍하게도 말번초 바로 앞이었다.
군대에서 가장 야간 근무 서기 싫은 시간대가 2번초와 말번초 바로 앞인데, 그걸 걸리다니.
“수고했다. 린.”
오늘만큼은 린이 불쌍해 보인다.
침낭을 열고 일어난다.
“고, 고맙다······.”
린이 얼굴을 붉힌다.
신발을 신는다.
밖으로 나간다.
말번초라 그런지 밤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대.
한밤의 맑은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윽.”
기지개를 켜면서 텐트 앞에 타오르는 캠프파이어 앞에 주저앉는다.
화르륵.
너울대는 주홍빛 불꽃이 눈에 비친다.
차가운 새벽 공기와 따뜻한 캠프파이어의 불기운이 뒤섞여 적절한 온도를 만들어낸다.
빌어먹을 장작을 팬다고 이시하라, 쿠로사와와 함께 도끼로 낑낑댔던 거 생각하면 어휴.
‘마지막 날까지 별다른 이벤트는 없겠군.’
원작 내용이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물론 라노벨답게 어제의 럭키 스케베와 마지막 밤 담력훈련 사이에도 여러 일상 이벤트가 있지만, 딱히 스토리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사건들이다.
지금처럼 얌전히 묻어가면 그만이다.
‘담력훈련이라······.’
임간학교에서 빠질 수 없는 이벤트.
물론 은 일상물이 아닌 학원 배틀물이니만큼, 담력훈련도 단순한 공포 이벤트는 아니다.
임간학교 집행부에서 기감을 제약하는 대규모 마술 결계인 환상 안개를 펼치고, 그 안에서 각종 장애물과 환영을 피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게 목표인 게임.
생도들의 기감을 테스트하는 훈련이라 할 수 있겠다.
라노벨답게 처음에는 린이 주인공에게 무섭다며 달라붙으면서 럭키 스케베로 시작하지만 사실은······.
“김덕성.”
원작 내용을 떠올리던 내 귓가에 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 깜짝이야.
고개를 든다.
거기에는 린이 쭈뼛쭈뼛한 태도로 서 있다.
“뭐야? 안 자?”
“그······. 지금은 자기 애매한 시간대라서 말이다.”
“아 뭐······. 그건 그렇긴 하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나도 말번초 바로 앞 근무일 때는 아예 안 잔 적도 있으니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린이 손가락을 꼼질대며 내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옆에 앉아도 괜찮나?”
“언제 내 허락 일일이 구했다고. 맘대로 해라.”
솔직히 말번초 바로 앞이라 좀 불쌍하기도 하다.
옆에 앉는 거 정도야 별 상관없겠지.
“정말인가? 고맙다.”
린이 내 옆에 앉는다.
*
김덕성과 린.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린이 입술을 우물거린다.
‘으으, 나란 인간은······.’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콩닥콩닥.
린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어제.
동굴에서 스스로의 연심을 자각한 이후에는 줄곧 이 지경이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문득 교실에서 공개 고백을 했을 때가 떠오른다.
‘대체 예전의 나는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린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포니테일이 바람에 흔들린다.
연심을 자각한 지금은 절대로 못할 행동.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미인계랍시고 저질렀던 모든 추태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재생된다.
독요리를 만든 것, 가슴 사이즈와 처녀를 어필한 것까지 전부.
‘나는 정말 엉망인 여자였구나······. 그가 싫어할 만도 해······.’
린이 입술을 깨문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올리비아를 이긴 실력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쿠로사와와 자신의 사정을 알고 있는 것도 전부 납득할 수 없다고.
다짜고짜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 말고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사실 결투까지 갈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결투를 고집한 건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추한 쇠고집.
그 이후에도 린은 계속해서 그를 도발했다.
‘그가 싫어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군. 나는.’
그 사실을 린은 너무 늦게, 어제야 깨달았다.
그녀 본인이 김덕성이었더라도, 자신처럼 여자력도 낮고 요리도 못하며 싸가지도 없는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을 거다.
‘그런데도, 너란 남자는······. 나를 구하기 위해······.’
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전번 불침번 근무자인 유지와의 대화를 통해서야 알았다.
김덕성.
그가 자신을 위해서, 유지에게 협회장과의 결자해지를 부탁했다는 사실을.
[김은 다른 사람도 아닌 너를 위해서, 너를 생각해서 나한테 그런 부탁까지 했어. 시노자키. 그러니 너도 김한테 한 잘못을 사과하는 게 어때?]머릿속에 유지가 했던 말이 맴돈다.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 나를 위해······.’
겉으로는 그렇게 말해놓고 그녀가 모르는 뒤에서는 상냥하게 대해주다니.
정말 나쁜 남자다.
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김덕성을 불렀다.
“기, 김덕성······.”
“왜.”
“그······.”
그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린의 말문이 막힌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린이 시선을 피하면서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미안했다. 그간 내가 너한테 저지른 일······. 전부······.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내 멋대로 네게 결투를 고집하고······. 너를 도발하고······. 그런 행동에 대해서 전부······. 이 자리에서 사과하고 싶다. 정말로 미안하다. 김덕성.”
린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이런 제멋대로인 여자니까 네게 미움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네게 마지막까지 파렴치한 여자로 남고 싶지는 않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미움받겠지.
린이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는다.
타닥, 타닥.
장작 타오르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린다.
*
갑자기 린이 사과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왜 우는지는 모르겠다.
당황스럽다.
린은 원래 저렇게 막 감정 기복이 심한 캐릭터가 아닌데.
하긴, 여긴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니, 그럴 수도 있는데.
속으로 한숨이 나온다.
솔직히 아직도 린은 비호감이지만, 상냥한 세상에서 사과를 안 받아주다가는 무슨 뒤탈이 날지 모른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어색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과 잘했어.”
“이런 제멋대로인 사과라도······. 받아주는 건가?”
린이 히끅거리면서 눈물을 흘린다.
주인공 놈도 그렇지만 발연기 구분 못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니 나중에 남장여자 히로인이 등장해도 다들 남자로 착각하지.
“받아줄 테니까 좀 울지 좀 마라.”
누가 볼까 봐 겁나니까.
“으······. 응. 알겠다.”
린이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숙인다.
“역시 너는 나쁜 남자다. 김덕성. 최악 중의 최악이다.”
린이 중얼거린다.
그런 얘기는 카스미 선배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별 타격도 없다.
“······여기. 너랑 먹으려고 챙긴 키리모찌다.”
린이 내게 나무 꼬챙이에 끼워진 하얀 떡 두 꼬치를 건넨다.
키리모찌.
일본 캠프파이어에서 빠질 수 없는, 모닥불에 굽는 찹쌀떡이다.
이번에는 웬일로 준비가 철저하다.
“여, 염치없지만 내 몫도 구워서 주면 안 되겠나······?”
린이 붉어진 얼굴로 중얼댄다.
“내가 구우면 타버릴 것 같······.”
“그래, 앞으로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 요리 못한다고.”
린의 말허리를 자르며 그녀의 손에서 키리모찌 꼬챙이 두 개를 낚아챈다.
“······아, 알았다.”
린이 미소를 짓는다.
구박을 받고도 좋아한다니.
어제부터 왜 저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네.
모닥불에 꼬챙이에 끼워진 키리모찌를 굽는다.
하얀 찹쌀떡이 불에 구워지며 동그랗고 노릇노릇하게 부풀어 오른다.
떡이 익는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자.”
다 구워진 키리모찌 중 하나를 그녀에게 건넨다.
“고, 고맙다.”
그녀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키리모찌를 베어문다.
치즈처럼 쭈욱 늘어나는 키리모찌.
생각보다 맛이 괜찮다.
이 맛에 야식을 먹는 모양이다.
“맛있네.”
“정말인가? 다행이로군. 나도 맛있다. 어쩌면 네가 구워줘서 더 맛있는 걸지도······.”
린이 옅게 웃으며 키리모찌를 베어문다.
그녀의 키리모찌가 쭈욱 늘어난다.
원판은 미인이라 그런지 쓸데없이 예쁘다.
원래 남이 해주는 음식이 더 맛있는 법이지.
“두 번째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키리모찌를 구워준 적은······.”
두 번째라.
그러고 보니 키리모찌는 린의 소울 푸드.
당주이자 양부인 이치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해준 음식이 구운 키리모찌라는 사소한 뒷설정이 있다.
키리모찌를 준비한 게 그래서였나?
린의 말을 들으며 키리모찌를 뜯어먹는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린이 말을 건다.
“김덕성. 혹시 그 얘기 들어봤나?”
“무슨 얘기?”
“이곳 수해에는 1년에 단 한 번, 이계종 무리가 모여 폭주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공포의 밤이 있다고 들었다. 세간에서는 그 시간을 백귀야행이라고 부른다더군. 전설 같은 얘기지만······.”
린이 꼬치를 만지작대며 말한다.
“들어봤어.”
키리모찌를 우물대며 답한다.
단순히 들어본 수준이 아니다.
백귀야행.
그건 전설이 아니라 실존하는 현상이다.
마지막 밤 담력훈련.
그때 생도들을 덮치는 이상현상이 바로 백귀야행이니까.
거기에 교단 소속 빌런인 ‘프리스트’가 백귀야행과 담력훈련용 환상 안개를 유물 ‘디바인 심볼’을 통해 통제하면서 담력훈련은 순식간에 실전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워낙 유명한 전설이니까, 당연히 들어봤으리라 생각했다. 흠흠.”
린의 말을 들으면서 키리모찌를 마저 먹는다.
저 멀리 동이 트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슬슬 아침 먹고 오늘의 주간 탐색을 나갈 시간이다.
*
폭우가 쏟아진 둘째 날 이후로는 내 예상대로 별다른 이벤트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임간학교 마지막 날 밤이 찾아왔다.
임간학교 임시 교사 건물 앞 운동장.
나를 포함한 생도들이 모두 모여 있다.
“생도 여러분! 임간학교는 잘 보내셨나요?”
사열대 위에 선 마유즈미 선생이 웃으며 소리친다.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대사.
“그럼 지금부터 임간학교 마지막 날 빅 이벤트, 담력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그 뒤로는 뻔한 주의사항이 이어진다.
담력훈련의 목적은 생도들의 기감 테스트이며, 환영 안개의 방해를 뿌리치고 안개 너머에 있는 목적지에 도달하면 통과라는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미 설명했던 대사.
“비상 상황에는 꼭 헌터 워치로 선생님한테 연락하는 거예요!”
프리스트가 등장하면 헌터 워치는 먹통이 된다.
그에 대한 대비책은 세워뒀으니 상관없겠지.
“······그럼 지금부터 각 조별로 담력훈련 시작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