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62)
“어쩌면 나는, 그한테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최고라고······.”
자신은 그저 최고의 자리를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평생을 걸쳐 동경해왔던 사내인 쿠로사와 아키라에게서.
하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고, 그래서 뒤틀린 인정욕이 삐뚤어진 욕망으로 표출된 거다.
그렇기에 이치로를 구원할 수 있는 건, 검성의 이름을 이은 유지뿐이었다.
그것뿐인, 유치한 얘기.
“한심하기 짝이 없군. 부끄러운 일을 했어.”
이치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수치심이 밀려든다.
이치로가 고개를 흔든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이라는 게 뭐지. 쿠로사와 유지.”
“시노자키를, 린을 도구 취급하며 학대하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그건······.”
이치로의 말문이 막힌다.
“아무리 그녀가 고아 출신이더라도, 지금의 그녀는 당신 자식입니다. 린은 당신의 삐뚤어진 욕망을 투영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녀한테도 그녀의 인생이 있습니다.”
유지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이치로의 귓전에 박힌다.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이치로는 린을 그저 가문의 도구로만 취급했다.
검성의 이름을 지우고, 가문의 이름을 빛낼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터였는데.
‘그랬었나?’
기억을 다시 되새긴다.
고아원에서 린을 처음 봤을 때, 이치로는 내심 그녀가 불쌍하다 생각했었다.
키리모찌를 구워서 줬을 때, 보물처럼 소중히 아껴 먹는 그녀가 귀엽다 생각했었다.
시노자키 일도류를 덜떨어진 친자들보다 더 빠르게 배워나갈 때, 사실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칭찬도 해주고 싶었다.
아빠라고 불러도 되냐는 질문에는, 그래도 된다고 대답할 뻔했었다.
슈오우 학원에 찾아갔을 때, 린을 폄하하는 이사장의 말에 내심 발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한번 무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도구로 취급하지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그녀를 자식으로 인정한다면, 지금까지 공들여 쌓았던 탑이 무너질 것 같았기에.
스스로의 상냥함을 외면하며 일부러 쌀쌀맞게 대했다.
“나는······. 최악의 아버지고, 최악의 영웅이었군.”
이치로가 힘 빠진 목소리로 이마를 짚는다.
이치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정말로 추한 남자였어.”
착각과 독선에 빠져, 지금까지 대체 어디까지 잘못해왔단 말인가.
린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이치로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셨다면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당신의 딸인 그녀한테 잘해주시면 됩니다.”
“······고맙다. 쿠로사와 유지. 내 추함을 일깨워줘서.”
이치로가 헛웃음을 흘린다.
눈앞의 소년이 아니었다면.
삐뚤어진 마음과 욕망은 겉잡을 수 없이 폭주했고, 끝내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지도 모른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자신을 구원해준 사람이 검성의 아들이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유지가 고개를 젓는다.
“감사는 제가 아닌 김, 아니. 김덕성한테 하십시오.”
“김덕성······?”
뜻밖의 이름이 유지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이치로의 눈동자가 커진다.
“당신의 삐뚤어진 마음을 맨 처음 알아차린 사람도, 린이 학대당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도, 당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게 알려준 사람도, 전부 그입니다.”
유지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눈을 감는다.
“저는 그저 그가 세운 계획을 실행했을 뿐. 그러니 감사 인사는 저 말고 당신과 린을 걱정해서 이 모든 계획을 세운 그한테 하십시오.”
“뭐? 흐, 흐하하하하, 흐하하하하하하하하!”
이치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일본 영웅 협회장의 마음을 구원한 상대가 약소국 한국의 생도라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군. 좋다. 네 말대로 감사인사는 그한테 하기로 하지.”
“아셨다면 됐습니다.”
유지가 쿠사나기노츠루기를 검집에 집어넣는다.
쪼르르르르, 딱.
정원에 있던 대나무 물레방아, 시시오도시가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낸다.
*
학원 상가.
파르페 가게.
파라솔이 쳐진 야외 테이블에서, 나는 올리비아와 단둘이 앉아 스페셜 초코 파르페를 먹고 있었다.
“흥, 흐흥, 흥흥흥흥흥♪”
뭐가 그렇기 좋은 건지 콧노래를 부르며 파르페를 떠먹는 올리비아.
오랜만에 츤데레 급발진 없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어색하다.
“역시 맛있네요. 여기 오길 잘했어요.”
뺨에 아이스크림이 묻은 올리비아의 모습이 보인다.
칠칠치 못한 모습 좀 봐라.
아무 말 없이 그녀 앞으로 냅킨을 건넨다.
올리비아의 파란 시선이 내게 향한다.
“이봐요 당신. 이거 지금 무슨 뜻이죠?”
“너 왼쪽 볼에 아이스크림 묻었어.”
“으읏?!”
올리비아가 이상한 비명소리를 지른다.
“그, 그그그그런 건 진작 말씀해주셨어야죠!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무드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세계 제일 둔탱이 같으니!!”
얼굴이 빨갛게 물든 올리비아가 소리친다.
다른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생도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린다.
웬일로 그냥 넘어가나 했다.
“흐, 흥······. 정말이지 최악······. 최저······.”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냅킨으로 뺨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낸다.
스푼을 들어 파르페를 한 술 떠먹는다.
생각보다 맛있다.
왜 라노벨에서 그토록 파르페 파르페 노래를 부르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파르페를 한 스푼 더 떠먹던 그때.
우웅.
스마트폰이 울린다.
화면을 켠다.
[김. 내가 이겼어. 이제 린은 걱정 안 해도 괜찮아.]유지의 메시지.
예상대로 주인공 놈이 이치로 구원에 성공한 모양이다.
입가에 호선이 절로 그려진다.
좋아.
드디어 린과의 악연을 끊어냈다.
사내 놈의 메시지에 굳이 답장해줄 필요는 없겠지.
읽씹하자.
하고 메신저를 끄려던 순간.
[고맙다. 김덕성. 자네는 내 은인이야.]다른 메시지가 도착한다.
이번에 도착한 메시지의 발신자는 시노자키 이치로.
뭐야? 이 아저씨 갑자기 왜 이래?
내가 왜 당신 은인이야.
갑자기 소름 돋네.
너는 언제나 그런 식이군
올리비아는 오늘 기분이 꽤 좋았다.
교내 봉사 처분 때문에 잘 볼 수 없는 니시자와는 물론, 항상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던 린까지 오늘은 학원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모처럼 그와 단둘이 스페셜 초코 파르페를 먹고 있고, 조금 뒤에는 연습실에서 단둘이 스킬 전수도 진행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올리비아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전속 시녀인 저뿐이라고요. 후후후후.’
오랜만에 맛보는 승자의 여유.
올리비아는 린과 니시자와를 속으로 한껏 비웃으며 파르페를 떠먹었다.
역시 자격 없는 여자들은 절대로 그의 곁에 둘 수 없다.
‘프랑스의 황녀인 저만큼 기품과 예의를 갖춘 여자라면 모를까 말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학원에서는 자신을 능가하는 여자는 없다.
오히려 처녀를 바친다느니, 주인님이라느니 하는 천박한 말을 하며 들러붙는 자들만 있을 뿐.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린과 니시자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천박해, 불결해, 도둑고양이들······.
그런 몸가짐이 헤픈 여자들에게 전속 시녀된 자로서 그를 넘겨줄 수는 없다.
절대로.
‘뭐 따, 딱히 그 사람한테 사, 사적인 감정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죠!’
아까 그가 냅킨을 건네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활화산처럼 붉어진다.
‘으으으으으······.’
그녀의 가슴이 콩닥콩닥 두근거린다.
‘누, 누누누가 그런 서민한테 반했다는 거예요. 저는 프랑스의 황녀라구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반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애써 스스로의 연심을 부정하면서 파르페를 다시 떠먹으려던 순간.
그녀의 눈에 휴대폰을 보는 김덕성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이이이익······.”
올리비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 대체 누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데.
간신히 단둘만 있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감히 고귀한 프랑스의 황녀를 앞에 두고 휴대폰 따위에 집중하다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으으으으! 당신!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건가요? 고귀한 프랑스의 황녀,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앞에 두고도 휴대폰에 한눈을 팔 정신이 있는 건가요?! 이 우주 제일 바보가!!”
올리비아가 소리를 지른다.
김덕성이 움찔하며 휴대폰을 대기 모드로 돌린다.
그의 시선이 올리비아에게 향한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어진다.
두근, 두근.
심장이 다시 뛴다.
콩닥대는 심장 소리가 눈앞의 그에게 들킬까 봐 무섭다.
“흥. 하여튼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예요. 당신은!”
올리비아는 괜히 심술을 부리면서 파르페를 한 술 다시 떠먹었다.
세차게 뛰는 심장, 붉게 상기된 뺨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다.
대답이 없는 김덕성.
무표정한 얼굴이 역시 얄밉다.
파르페를 제대로 안 먹고 깨작거리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신, 안 먹고 뭐 해요? 저만 먹는 거 같잖아요! 으으으으!”
푹.
올리비아가 스푼을 파르페에 찔러 넣는다.
초콜릿 크림과 아이스크림이 범벅된 파르페를 한술 뜬 올리비아가 김덕성의 입 앞으로 스푼을 찌를 듯 가져다 댄다.
“뭐야?”
김덕성이 코앞에 도착한 스푼을 보고 평소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가 입술을 깨문다.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얄미운 것도 정도가 있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그그그그걸 꼭 말해야 알겠어요? 먹으라고요! 당신의 전속 시녀인 제가 친절하게 떠먹여주고 있잖아요!!”
올리비아의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두근거린다.
얼굴이 뜨겁다.
“알았어. 먹을게.”
김덕성이 파르페를 받아먹는다.
“맛있네. 됐지?”
“흐, 흥.”
올리비아가 콧소리를 흘리며 빈 스푼을 가져다가 다시 파르페를 뜬다.
아무 생각 없이 파르페를 먹기 직전.
‘그, 그러고 보니 이거 그 사람이 먹었던 스푼이잖아요?’
의외의 사실이 그녀의 뇌리를 강타한다.
그렇다.
지금 올리비아가 든 스푼은, 김덕성의 입을 거친 스푼인 것이다.
이 스푼으로 그대로 파르페를 먹는다?
‘가, 간접 키스······.’
올리비아의 심장이 다시 뛴다.
그녀의 얼굴이 귀밑, 목 부근까지 빨개진다.
‘어, 어떻게 이런 망측한······.’
외간 남자와 간접 키스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스푼을 바꿔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사실은 바꾸기 싫······.
“으으으으······. 아니에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난데없이 급발진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에 김덕성이 묻는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올리비아의 심장이 더 가파르게 뛴다.
부끄럽다.
“시, 시시시시끄러워요! 이 변태! 파렴치한!!”
올리비아가 말을 더듬으면서 파르페를 퍼먹는다.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파르페였다.
*
시노자키 저택.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당주의 방.
거기에는 초록 머리의 미중년, 이치로가 자리에 앉은 채 말차를 마신다.
드르륵.
다다미방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남색 포니테일 미소녀, 시노자키 린이 들어온다.
“부르셨습니까, 당주님.”
린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이치로 앞에 정좌한다.
“다과나 좀 들거라.”
이치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과상을 린의 앞으로 스윽 밀어낸다.
린의 눈동자가 커진다.
이치로와 대면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가 다과를 먹는 것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과를 권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린의 마음속에 의문이 잔뜩 피어오른다.
하지만 시노자키 일족에서 린에게 의문이라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시키면 따를 뿐.
“······알겠습니다. 당주님.”
린이 쟁반 위에 놓인 화과자를 깨문다.
입안에 단맛이 퍼진다.
린이 다과를 먹는 모습을 보는 이치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앞으로 당주님이라고 부르지도 말거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린의 눈동자가 커진다.
당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
그럼 대체 어떤 호칭으로 부르라는 말인가?
린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들어찬 그때.
이치로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린다.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크흠, 흠.”
아버지.
그 말을 들은 린의 가슴이 뛴다.
천애고아 출신인 그녀에게 있어 가족이란 닿고 싶어도 닿지 못했던 이상향.
입양 초기에는 시노자키 가문을 가족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는 줄곧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살아왔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버지라니.
“정말······. 그렇게 불러도 괜찮습니까?”
믿기지 않는다.
“그래. 괜찮다. 너는 가문의 도구가 아닌, 이 시노자키 이치로의 딸이니까. 그리고······.”
이치로가 찻잔을 매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