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7)
‘누군지는 몰라도.’
수석 입학생 올리비아.
자존심 드높은 프랑스의 기사공주님을 격 없이 대하는 걸 보면 일반인은 아니다.
뉴 월드 리그?
아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접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유지는 고개를 흔들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털어냈다.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다.
‘일단은 기억해두지.’
유지는 김덕성의 인상을 뇌리에 새기며 소꿉친구가 기다리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
기숙사 건물을 빠져나가 걷는다.
서늘한 봄바람이 뺨을 스친다. 교정에 잔뜩 핀 벚꽃잎이 흩날린다.
‘거 벚꽃 되게 좋아하네.’
누가 일본 아니랄까 봐. 아주 벚꽃에 환장하는 수준이다.
하긴, 벚꽃 신학기는 일본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약방의 감초긴 하다.
“할 말이 뭔가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올리비아가 말한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다.
아무 말 없이 계속 걷는다.
저 멀리 바다가 반짝인다.
어느새 해는 지고, 달과 별이 떠오른 밤하늘.
교내에 조성된, 탁 트인 도쿄만이 보이는 해변 공원에 도달한다.
벤치 옆, 불이 켜진 자판기가 보인다.
자판기의 나라로 유명한 일본답게 음료수 종류 하나는 쓸데없이 많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딱히······. 없어요.”
“그냥 물어본 거야.”
주머니를 뒤져 동전 지갑을 꺼낸다.
카드와 간편결제가 제대로 안 통하는 나라답게, 자판기에서도 현금을 써야 한다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100엔짜리 동전 세 개를 넣는다.
자판기 버튼에 불이 들어온다.
오뎅캔과 단팥죽 음료 버튼을 누른다.
예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맛인지.
덜커덕.
캔 두 개가 떨어진다.
따뜻하게 데워진 단팥죽과 오뎅캔.
손에 든 단팥죽 캔을 올리비아에게 던진다.
“저, 주시는 건가요?”
“싫으면 먹지 말던가.”
“싫다고는 안 했거든요!”
벤치에 앉은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단팥죽 캔을 뜯는다.
그녀 옆에 앉아 오뎅캔을 뜯는다.
오뎅 국물 속에 잠겨 있는 건더기와, 꼬치가 꽂힌 곤약이 보인다.
곤약 꼬치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린다.
“별 맛 없네.”
한국어로 낮게 중얼거렸다.
자판기 수준에 뭘 기대하겠냐만은, 딱 대학교 MT 오뎅탕 수준이다.
옆에서는 올리비아가 단팥죽 캔을 홀짝대고 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요.”
마음에 든다는 소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오뎅을 건져 우물댔다.
계속 먹다 보니 묘하게 괜찮은 거 같기도 하다.
“저기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건더기를 전부 해치우고, 오뎅 국물을 마신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몸을 감싼다.
비어버린 캔을 던져 쓰레기통에 넣는다.
골인이다.
“저기요!”
“소리 안 질러도 듣고 있어.”
“······할 말이 뭔가요?”
올리비아가 손에 쥔 단팥죽 캔을 만지작대며 말한다.
“시녀인지 뭔지 그 약속, 아직 유효하냐?”
“예?”
올리비아가 반문한다.
관자놀이를 짓누른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 빌어먹을 얘기를 내 입으로 다시 꺼내게 될 줄이야.
손발이 오징어가 될 것 같다.
“무, 물론이죠! 보나파르트 황실의 명예를 걸고, 이 올리비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또 그 아가씨 포즈.
이제는 별 감흥도 없다.
“그럼 이행해.”
올리비아의 귀가 빨개진다.
“조, 좋아요! 맡겨주시죠!”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
라노벨 히로인답게 말도 안 되는 망상이나 하는 중인 모양이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대체 왜 이런 미친 세상에 떨어진 건지.
같은 학원물이라면 적어도 좀 상식적인데다 한국인 정서에 맞고 날먹도 쉬운 웹소설 세계관에 전생하면 어디 덧나나?
아니면 요즘 라노벨 트렌드인 이세계 치트물이라던가.
내 장르는 왜 하필 열혈 왕도 학원 배틀물이냐고.
역시 작가 놈이 문제다.
“저기요······.”
올리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추운 바닷바람을 직격으로 맞은 탓인지 상기된 뺨이 인상적이다.
메인 히로인, 대놓고 ‘공인 미소녀’ 설정이 박혀 있는 그녀답게 예쁜 건 쓸데없이 예쁘다.
“생각, 왜 바꾼 건가요?”
그녀가 질문을 던진다.
생각을 바꾼 이유는 별 거 없다.
거리두기를 할 이유와 명분이 사라졌을 뿐.
원작이 이미 무너진 이상, 유사시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눈앞의 프랑스 공주님은, 내게 아주 훌륭한 장기 말이다.
성적도 좋아, 실력도 좋아, 명분까지 이쪽이 잡고 있으니 부려 먹기 딱 좋다.
물론 이걸 당사자에게 굳이 설명할 의무는 없다.
“그냥.”
“뭐, 뭐예요?! 그 성의 없는 대답은! 시, 싫다는 건 아니지만요.”
어쭈.
이제는 내가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하기 전에 선수까지 치네.
장족의 발전이다.
“말해주기 싫은 거군요.”
“잘 아네.”
“그래요. 뭐, 일단. 알겠어요. 좋아요.”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김덕성 님.”
그녀가 우아하게 인사한다.
“그래.”
올리비아가 수중에 떨어졌으니, 이제 골수까지 빨아 이용해먹는 일만 남았다.
그녀의 인사를 뒤로하고, 휴대폰을 꺼낸다.
지금쯤이면 슬슬 대련 결과가 나올 시간이다.
아카데미 채널에 접속한다.
[충격, 오늘의 핫 이슈. F랭크 신입생, 차석을 쓰러뜨리다!] [오늘 대이변 너무 많이 일어나는 거 아냐? ww] [아까 C랭크 한국인 소식보다 더 충격적 ∑(O_O;)] [저 녀석 누구야? ( ・◇・)?] [쿠로사와 유지? 쿠로사와 가문의 수치?] [말도 안 돼, 지금까지 숨은 실력자였다고?]커뮤니티 반응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좋았어. 그래, 이거지.
아주 순조롭다.
조금 꼬이기는 했어도 어쨌건 주인공이 숨겨진 힘을 드러냈다.
그러니 스토리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다.
이 미친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일이 생겼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신경 쓰지 마.”
휴대폰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올리비아가 입술을 삐죽거린다.
대답을 제대로 안 해줘서 삐진 모양이다.
굳이 내가 풀어줄 필요는 없다.
“다른 할 말은 없으신가요? 며, 명령이라던가······.”
올리비아가 조심스레 말을 건다.
“들어가서 씻고 자라. 아까 안 씻었잖아?”
“으으으! 진짜 변태! 파렴치한!”
비상상황에 대비 가능한 카드를 얻었으니, 다음은 블랙 스톤을 선점할 차례다.
해변공원에 메아리치는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나는 병실로 다시 돌아갔다.
*
다음날.
나는 병원에서 퇴원했다.
지금은 짐가방을 끌면서 배정받은 기숙사 방을 찾는 중이다.
“202호, 202호······.”
내가 배정받은 기숙사 호실은 202호.
안타깝게도 난 올리비아처럼 A랭크가 아니기에, 특별실이 아닌 일반실을 배정받았다.
그러니까, 1인실이 아니라 2인 1실이라는 거다.
‘룸메이트라니.’
누가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십중팔구 엑스트라일 게 분명하다.
이왕이면 성격 좋은 엑스트라였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202호실 앞에 도착했다.
삑.
생도 수첩을 도어락에 찍자 기숙사 문이 열린다.
2인 1실치고는 제법 널찍한 방, 양쪽 벽면에 붙은 침대와 전면에 있는 창문.
그리고.
“어, 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주인공, 쿠로사와 유지.
그가 있다.
“너, 너?”
주인공이 내 룸메이트라고?
이런 시발.
원작에서는 입학식 하루 뒤에 편입해서, 2인 1실을 혼자 쓰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긴, 이미 지랄 난 마당에 원작이 무슨 소용이야.
“다시 만나네. 쿠로사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문을 닫는다.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어제는 내 충고 따라줘서 고마웠어.”
이건 진심이다.
거기서 또 꼬였으면 큰일 날 뻔했으니까.
“너······. 정체가 뭐야.”
주인공 놈이 질문을 던진다.
유지의 떨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평화로운 학원 생활은 이미 물 건너간 거 같다.
궁금증은 좀 풀렸냐?
주인공의 질문에 나는 교복에 달린 명찰을 손으로 잡아 흔들었다.
“김······. 덕성?”
명찰에 가타카나로 쓰인 내 이름을 그가 천천히 읽는다.
“그게 내 정체야.”
“김덕성이면 한국인?”
유지의 표정이 묘하게 굳는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네가 그······. 기사공주를 이겼다는 검은 머리의 한국인 생도?”
“이 학원에 검은 머리 한국인이라고는 나밖에 없으니까, 맞겠지?”
“듀랜달의 소유자?”
“그것도 그래. 맞아. 나 꽤 유명했구나?”
나는 능청스럽게 웃어대며 반문했다.
이틀 사이에 꽤 유명해진 모양이다.
하긴, 그 유명한 백금의 기사공주 올리비아를 쓰러뜨렸으니.
안 유명해지면, 그건 그거대로 말이 안 된다.
“이제 궁금증은 좀 풀렸냐?”
“전혀.”
유지가 고개를 젓는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내 사정······. 어떻게 알았지?”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상했던 질문이다.
평소에는 라노벨 주인공답게 ‘상냥’한 놈이지만, 자신의 정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원작 설정 때문이다.
굳이 원작 설정이 아니더라도, 초면에 갑자기 남의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읊는 인간이 나타난다면?
나라도 경계할 거다.
기출 문제이니 당연히 모범 답안도 준비했다.
“국정원에 부탁해서 네 뒷조사를 좀 했거든. 우리나라가 좀 약소국이긴 해도, 그래도 나라긴 해서 정보력이 꽤 괜찮더라고?”
“국정원? 거기가 어디지?”
유지의 눈썹이 꿈틀댄다.
“국가정보원. 우리나라의 정보기관이야.”
“그렇게까지 내 뒷조사를 한 이유가 뭐지?”
“궁금했거든. 검성의 아들이 어째서 적합도 평가에서 F랭크를 받았는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읊는다.
어차피 주인공은 내 말의 진실 여부를 가릴 만한 능력도 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국정원은 무조건 유일한 영웅 후보생인 내 편을 들어줄 터.
그러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라도 진실이 된다.
그것이 한국에 관련된 사항이라면.
아,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덕분에 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자랐는지, 그날 일어난 일이 어떤지도 알게 됐지. 그런데 네가 그 무색의 소유자일 줄은 미처 몰랐어.”
유지의 뺨이 파르르 떨린다.
그가 주먹을 말아쥔다.
이 엿 같은 세계에서, 모든 능력자들은 자신의 마력색에 맞는 머리색을 갖는다.
내가 검은 머리인 이유도, 내 마력색이 검은색이기 때문.
하지만 이 절대 법칙에서 유일한 예외가 바로 무색의 마력광.
투명 드래곤처럼 투명한 마력색이다.
무색의 마력광은 주인공 편의주의를 위해 만들어진 먼치킨, 일본 웹소설 용어를 빌리자면 치트 설정이다.
“······.”
주인공이 침묵한다.
“무색의 마력광이 상징하는 속성은 근원. 그래서 무색의 소유자는 모든 속성의 우위에 있으며, 모든 속성을 담아낼 수 있고, 모든 마력색을 구현할 수 있지. 이른바 제왕의 마력색. 세상에는 유일하게 지금은 죽은 검성, 네 아버지만이 소유했던······.”
“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유지의 시선에 적의가 담긴다.
아, 아직 설정 덜 읊었는데.
무색의 마력광 소유자는 마력 제어, 마력 감응력, 초상병기 적합도 등등 마력에 관한 모든 재능이 최상위 레벨이고, 마력 증폭의 기프트까지 갖고 있다.
타고난 마력색에 따라 속성이 갈리는 이 세계에서, 무색의 마력색은 사기 재능인 셈이다.
뭐 별로 안 무섭다.
저래봤자 본질은 모든 라노벨 주인공이 그렇듯이 상냥하고 물러터진 성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