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83)
애니메이션에서 배신 지령을 받았을 때 보인 모습과 완전히 똑같은 반응.
“후, 후배 군······.”
카스미 선배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내 소매를 잡아당긴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
내 옆에 있는 린의 존재가 부담돼서 배신 지령 얘기를 못 하는 중인 모양.
“린. 미안하지만 이만 여기서 가줘야겠다.”
“그건······.”
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호시노 선배도 사정이 있는 듯하니. 좋다. 이번 한 번만큼은 특별히 봐주지. 대신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아라. 김덕성.”
“그래.”
빚이라고 해봤자 둘이서 나들이 나가자는 얘기겠지.
뻔하다.
그 정도야 뭐 남는 시간에 충분히 해줄 수 있다.
때마침 내리는 비도 슬슬 그치는 마당.
“좋다. 그럼 나는 자리를 비켜주도록 하지.”
내 약속을 받아낸 린이 자리를 뜬다.
평소라면 온갖 주접을 다 부렸을 텐데 웬일로 저러지?
의문이 든 것도 잠시.
“후, 후배 군······.”
와락.
카스미가 내 품에 안겨든다.
갑작스러운 포옹 어택.
당황스럽다.
이 여자가 왜 이래?
“나······. 이제 어떡해······. 후배 군······. 히끅.”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는 카스미 선배.
“우우우. 남자가 돼서 여자를 울리다니, 남자의 수치다!”
“꽉 안아줘라!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도 남자의 일이다!”
“저렇게 귀여운 미소녀를 울리다니, 평생 사죄해라! 네 놈!”
“이제 그만 그녀의 마음을 받아줘!”
머리가 아프다.
단체로 과대망상증이라도 걸린 건지 의심될 지경.
‘염병.’
주변 눈치 때문이라도, 카스미 선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당장 떼어내서는 안 된다.
한숨을 쉰다.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 같으니.
*
숙소로 돌아가는 길.
린은 휴대폰 바탕화면을 보며 웃었다.
청수사 무대에서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시야에 들어온다.
두근.
린의 심장이 뛴다.
비가 왔을 때, 와이셔츠를 벗어주던 그의 모습이 임간학교 때 와이셔츠를 건네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린이 어깨에 걸쳐진 그의 와이셔츠 소맷자락에 코를 파묻는다.
빗물 냄새와 함께 그의 향기가 코 끝에 맴도는 거 같다.
린이 얼굴을 붉힌다.
“······나는 역시 네가 좋다. 김덕성. 너를 놓치기 싫다.”
그녀가 휴대폰 화면을 쓰다듬는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준 사람은 오직 그뿐이다.
육탄 공세를 하지 말라고 걱정해준 것도, 자신이 만든 주먹밥의 맛을 기억해준 것도, 서툴게 준비했던 관광 가이드를 칭찬해준 것도, 그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그에게 향하는 연심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네 마음을 가져가겠다. 내 온몸을 던져서라도.’
린이 눈을 감는다.
그는 괜찮다고 자제하라고 했지만, 린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자 최대의 무기가 육탄 공세라는 사실을.
‘빚의 대가로는 데, 데이트를 하자고 해야겠군.’
린이 얼굴을 붉힌다.
그와 단둘이 데이트라니.
벌써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수백 개의 상상을 펼치고 있을 때.
버스가 숙소 앞에 도착한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린이 버스에서 내려서 호텔로 들어간다.
호텔 로비.
슈오우 영웅 학원이 호텔을 통째로 빌린 탓에 호텔 투숙객은 전부 생도뿐.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그녀가 만난 사람은.
“어, 젖소다. 젖소. 주인님이랑 시간은 잘 보냈어? 물론 어른의 계단을 오른 에리링보다는 못하겠지만.”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는 니시자와 에리.
그리고.
“그쪽 두 사람. 대체 무슨 알 수 없는 소리를 서로 주고받는 거죠? 수상한데요.”
입술을 삐죽대고 있는 백금발 머리 미소녀, 올리비아였다.
두 사람을 본 린이 눈을 감았다 뜬다.
린의 어깨에 걸쳐진 하얀 와이셔츠를 본 니시자와의 눈동자가 커진다.
“뭐야, 젖소. 그 와이셔츠. 설마······.”
훗.
린이 입가에 의기양양한 웃음을 띄운다.
“이제 알았나. 빨래판. 이건 김덕성이 나를 위해 덮어준 셔츠다. 그뿐인 줄 아나? 나는 김덕성과 함께 청수사 무대에서 같이 기념사진도 찍었다.”
린이 당당하게 휴대폰을 치켜든다.
그녀의 휴대폰 배경 화면을 본 니시자와 에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뭐? 젖소? 네가 감히 주인님과 청수사 무대 사진을?”
니시자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작 사슴 공원에서의 작은 해프닝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질 정도.
“크으으······.”
니시자와가 입술을 깨문다.
질투가 난다.
“에리링도 주인님이랑 같이 사진, 찍고 싶었는데······.”
니시자와의 손이 떨린다.
주인님은 상냥하다.
그러니까 더 욕심이 난다.
더 사랑받고 싶다.
니시자와 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니시자와가 고개를 숙이며 개목걸이를 만지작댄다.
‘주인님······.’
좀 더 구속해줬으면 좋겠다.
그가 자신의 전부를 가져가줬으면 좋겠다.
니시자와 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진을 보고 놀란 건 올리비아 역시 마찬가지.
“자, 잠깐만요. 시노자키 양! 전속 시녀인 이 저의 허락도 없이 대, 대대대체 무슨 파렴치한 행동을!”
“본인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츤데레 공주님은 빠지시지. 이 시노자키 린. 지금부터 진심전력으로 그의 사랑을 쟁취하겠다. 한발 앞서 있다고 해서 방심하지 마라. 보나파르트.”
시노자키 린의 남색 눈동자가 올리비아를 향한다.
올리비아의 손이 떨린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고 뺨이 분홍빛으로 물든다.
“······츠, 츤데레라니! 고, 고귀한 프랑스의 황녀인 제게 어떻게 그런 모욕을······.”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시노자키 린의 말에 올리비아가 입술을 깨문다.
척.
올리비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인다.
“······좋아요. 그 승부, 얼마든지 받아들이죠. 시노자키 양. 사랑의 라이벌로서!”
“사랑의 라이벌······?”
시노자키 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니시자와 에리의 시선이 올리비아를 향한다.
두 여자의 시선을 받은 올리비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올리비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친다.
“그, 그그그래요!! 뭐, 부, 부부불만이라도 있나요?”
두근, 두근.
올리비아의 심장이 뛴다.
김덕성을 좋아한다.
스스로의 연심을 자각하고 인정한 올리비아지만, 그 사실을 타인에게 털어놓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니시자와 에리의 눈동자가 올리비아를 향한다.
“황녀님, 본인의 마음을 인정한 거야?”
“······그런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은 저 같은 여자가 아니라면 자, 장가도 못 가고 평생 독신으로 늙을 테니까······. 하, 하는 수 없이 전속 시녀인 제가 보살필 수밖에 없잖아요!!”
“보나파르트다운 대답이군.”
“시, 시끄러워요!!”
연심을 자각한 올리비아는 강적이다.
시노자키 린은 뒷말을 삼키면서 조용히 셔츠 소맷자락에 코를 묻었다.
“······이렇게 된다면 에리링, 아니 나도 진심으로 임할 수밖에 없겠어.”
다른 연적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니시자와 에리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세 여자의 불꽃 튀는 시선이 교차한다.
*
그의 품에 안겨 카스미는 울었다.
울고 싶은 만큼, 한없이 울었다.
울면서 고백했다.
“후배 군. 나 혼자가 되기 싫어······. 다시 혼자로 돌아갈 수 없어······.”
김덕성과 만난 이후.
마코토, 에리, 린, 올리비아까지 만나면서 함께의 행복을 알아버린 카스미였다.
첫 만남은 최악이었지만, 구원을 약속한, 사랑하는 후배 김덕성도.
솔직하지 못하지만, 은근히 배려심과 잔정이 많은 올리비아도.
쿨한 냉미녀를 연기하지만 실은 자존감이 낮은 린도.
김덕성 앞에서는 바보가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싸늘한 에리도.
소심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마코토도.
전부 그녀의 소중한 후배이자 친구들이다.
다시 혼자일 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럴 수 없어······. 나는······. 하지만 무서워······.”
정체를 밝힐 수 없다.
배신자 따위, 미움받을 테니까.
손가락질받을 테니까.
다시 혼자가 될 테니까.
그런 미래는 감당할 수 없다.
“후배 군······. 후배 군······.”
김덕성의 체온이 느껴진다.
그의 따뜻하고 탄탄한 가슴이 뺨에 느껴진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
잃고 싶지 않다.
리그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를 해치고 싶지 않다.
그의 품에 언제까지고 안겨 있고 싶다.
행복하다.
모순적이게도, 카스미는 그렇게 느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카스미가 본인의 소망을 내뱉는다.
“거, 그만 좀 우십쇼. 쪽팔리게. 사람들 다 봅니다. 내가 오늘 이 말만 몇 번 하는 건지.”
그녀의 귓가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히끅······. 어쩌면 좋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자리부터 옮깁시다.”
*
카스미 선배를 데리고 청수사를 벗어난다.
산넨자카에 있는 찻집.
일인실을 빌려 그녀와 앉는다.
카스미 선배의 사정을 전부 청취하고서야, 나는 모든 전후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군요.”
내 예상이 맞았다.
원작과 거의 같은 타이밍에 온 배신 지령.
내용도 똑같다.
마루야마 료스케와 접선할 것.
물론 원작과는 달라진 만큼, 정사대로 흘러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돌발변수에 대비하려면 나 말고 전후상황을 아는 다른 조력자가 필요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1학년 멤버들.
이들도 큰 전력이기는 하다.
하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큰 권한, 더 강한 힘을 가진 조력자가 필요하다.
‘이 조건에 들어맞는 건 연수단에서 단 한 명뿐.’
학생회장 사이온지 아리스.
여기서는 그녀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없다.
다행히 여기는 상냥한 세상이니, 카스미의 사정을 말해준다면 아리스도 납득할 거다.
문제는 멘붕에 빠진 카스미 선배를 설득하는 일.
벌써 한숨이 나온다.
일단 진정부터 시켜야 한다.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선배. 선배가 처한 사정은 잘 알았습니다.”
“후배 군. 나, 어떻게 하면 좋아?”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닦아내며 카스미가 말한다.
“잘 들으십쇼.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여기서는······. 학생회장 선배한테 전후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회장 선배한테······? 사정을······? 후배 군······. 그건······.”
내 말을 들은 카스미의 얼굴이 예상대로 딱딱하게 굳는다.
하긴, 그녀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겠지.
“후배 군. 안 돼······. 미움받을 거야······. 용서받지 못할 거야······. 그건······. 그건······.”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학생회장의 협력은 필요하다.
사실 카스미 선배를 설득하는 데 아주 대단한 논리 같은 건 필요 없다.
여기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라노벨 세상.
너 나 믿지? 못 믿냐? 나는 너를 믿는데? 같은 라노벨 특유의 편의주의적 무지성 신뢰를 이용한다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카스미 선배를 설득할 수 있다.
원래 그런 세상이니까.
문제는 그 말을 내뱉는 내 손발이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카스미 선배를 부른다.
“선배.”
“으, 응. 후배 군······.”
그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본다.
“저 믿죠?”
내 말에 카스미 선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다.
“응. 나, 나는······. 후배 군을 믿어······. 후배 군은 나쁜 남자고, 기사공주만 편애하고, 하렘왕을 꿈꾸는 바람둥이에다 검은 귀축이지만······. 상냥하니까······. 믿어.”
여전히 어질어질한 대답.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나를 믿는다는 말이다.
이제 마법의 무지성 신뢰를 사용할 시간이다.
“그럼 이번 한 번만큼은 제 말을 따라 주십쇼. 선배, 저, 회장 선배, 이렇게 삼자대면 상황에서 회장 선배한테만 사정을 밝힐 거고, 그 과정에서 선배한테 피해가 가는 일도 선배가 용서받지 못할 일도 절대 없을 겁니다. 약속하죠.”
그녀에게 승부수를 던진다.
“약속······.”
카스미가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 설득은 이미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
무지성 신뢰 최고다.
“좋아. 약속, 할게. 나는 후배 군을 믿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손가락 약속하자. 후배 군.”
카스미가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또 이거냐?
갑자기 부실에서의 PTSD가 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