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89)
아리스의 말허리를 자른다.
내가 가리킨 건 일품 돈가스 덮밥.
이 호텔에서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서민 요리다.
당연하게도 시골 소녀인 아리스는 고급 요리보다는 규동, 돈가스 덮밥, 라멘 같은 서민 음식을 훨씬 좋아한다.
너, 사실 서민 음식 좋아하잖아.
괜히 있는 척하기는.
“아닙니다! 저는······.”
당황하면서 손을 내젓는 아리스.
아가씨라는 가면이 벗겨지는 게 싫은 모양.
“제가 먹고 싶어서 그러니 그냥 이걸로 시키죠.”
“정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김덕성 군의 의사를 존중하도록 하죠.”
내 말에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아리스.
그녀의 입술이 씰룩거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테이블에 비치된 전화기를 통해 룸서비스를 시킨다.
“룸서비스 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와 함께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돈가스 덮밥 두 그릇.
그리고 어째서인지 같이 온 샴페인과 와인잔 두 개가 보인다.
돈가스 덮밥에 샴페인이라니.
조합이 왜 이래.
밥과 돈가스를 같이 한 술 떠서 입에 넣는다.
‘맛있네.’
오성급 호텔 주방장이 만든 돈가스 덮밥이라 그런지 꽤 맛있다.
주변을 둘러본다.
달그락, 달그락.
그녀가 숟가락으로 돈가스 덮밥을 빠르게 퍼먹는 모습이 보인다.
아리스는 평소에 부잣집 아가씨 모습을 연기한다는 설정.
그 덕분에 정작 먹고 싶은 서민 음식을 마음껏 먹지 못하고 있는 상태.
원작 7권에서는 주인공이 데려간 라멘집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었지.
정작 둔한 주인공은 아리스가 아가씨 연기를 한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전 최애캐기 때문에 아리스에 대한 설정은 특히 빠삭하다.
그녀와 내 눈동자가 마주친다.
“!!”
아리스의 은빛 눈동자가 흔들린다.
탁.
숟가락을 내려놓는 아리스.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기침하며 말한다.
“크흠. 흠. 서민 음식도 의외로 맛있군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연기.
아까 허겁지겁 퍼먹는 거 다 봤는데.
“딸꾹!”
내 시선을 받은 아리스가 딸꾹질을 한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시골 소녀라는 본성을 숨긴 채 완벽한 아가씨를 연기하는 아리스에게 있어, 계속 빈틈을 보이는 지금 상황이 자꾸 신경 쓰이는 모양.
저러다 먹다 체하겠네.
아니, 내가 더 신경 쓰인다.
안 되겠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일단 화장실을 핑계로 그녀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빠져주기로 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향한다.
세면대에서 손과 얼굴을 씻고 거울을 본다.
거울 안에는 이제는 살짝 익숙해진 비열한 인상의 검은 머리 양아치가 서 있다.
‘화장실 거울 버프 때문에 그런가, 이 정도면 꽤 괜찮을지도?’
아닌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때운 뒤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선다.
“갔다 왔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말을 내뱉은 순간.
“오, 왔나! 김덕서이!”
귓가에 구수한 칸사이 사투리가 들린다.
잠깐, 칸사이 사투리?
고개를 든다.
거기에는, 비워진 샴페인 병과 엎어진 와인잔.
그리고 취한 건지 얼굴이 새빨개진 아리스가 있다.
“술 마셨습니까?”
공식 설정에 술이 약해서 술 초콜릿 1개만 먹어도 취한다고 적힌 양반이?
도수 10도짜리 샴페인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걸 마셔?
“술? 이거 음료수 아이가? 맛이 달짝지근하이 꼭 포도 주스 같던데? 딱, 따악 한잔만 했데이!”
이히히히히.
샴페인 병을 흔들며 푼수처럼 웃는 아리스.
원작에서 실수로 술 초콜릿을 먹었을 때 단 한번 보여준 만취 모드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내는 칸사이 사투리가 고운 입술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꽐라가 된 모습.
누가 미소녀 아니랄까 봐, 차가운 아가씨를 연기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빨갛게 물든 얼굴과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배시시 웃는 모습이 대조적이라 예쁘긴 하지만.
그건 그거고.
머리가 아프던 그때.
“마! 김덕성이! 이 머스마야! 니는 대체 뭐 하는 놈이고! 내는······. 내는 니가 어떤 놈인지 참말로 모르겠데이······.”
아리스가 갑자기 내 품으로 달려와 파고들며 안긴다.
뭐야 이거?
당황스럽네.
어,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같은 침대에서(삽화 有)
침착하자.
원작 내용을 떠올리자.
원작 7권. 문화제를 틈타 학원을 습격하려는 뉴 월드 리그와 마에다 신지의 음모가 좌절된 뒤, 문화제 뒤풀이 에피소드에서 술 초콜릿을 먹은 아리스가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일이 있었다.
술에 취했을 때는 평소의 완벽한 학생회장 모습과는 다르게 유아 퇴행이라도 한 것처럼 칭얼댄다는 설정.
완벽한 아가씨 연기와 소녀 가장의 중압감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의 반동이다.
‘아리스는 전형적인 외강내유형 캐릭터지.’
겉으로는 강한 척, 우아한 척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응석 부리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속에 가득하며 의외로 마음이 여리다는 설정.
내심 아버지 같은 듬직하고 의지할 수 있는 남성상이 아리스의 이상형이다.
라노벨에서는, 특히 이런 엄격하고 깐깐하고 고지식한 성격의 히로인에게는 흔히 존재하는 ‘갭 모에’ 설정이고 원작에서 아리스 최고의 매력 포인트였는데.
그걸 직접 겪고 있으니 돌아버릴 것 같다.
‘아리스 관련 설정이라면 전부 꿰고 있어.’
최애캐기도 하고.
한때 아리스 포스터, 굿즈, 다키마쿠라, 피규어, 쿠션, 아크릴 스탠드, 장패드 등 아리스 굿즈로 방 전체를 도배했을 정도니까.
‘7권 뒤풀이 때도 이렇게 주인공 놈 품에 안겨서 난리를 쳤었고.’
애니메이션에서 유려한 작화로 구현된 뒤풀이 장면은 아리스 팬들에게 명장면으로 회자됐었다.
원작과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다른 히로인들이 질투하면서 주인공과 아리스를 떼어놨다면 지금은 나와 아리스를 떼어놓을 상대가 없다는 점.
술 초콜릿만 먹어도 취할 정도로 술에 극단적으로 약한 아리스가 도수 10도짜리 샴페인을 반 병이나 마셨다는 점.
그리고 시골 소녀라는 아리스의 정체가 아직은 드러나면 안 되는 시점이라는 점이다.
‘머리가 아프군.’
아리스의 커다란 가슴이 부드럽게 내 가슴팍에서 뭉개진다.
그녀가 볼을 부풀린다.
“니는 대체 뭐 하는 아고? 뭐하는 머스마길래 이사장 언니야가 니를 맨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데? 흥. 뿌뿌.”
투닥투닥.
가슴팍을 두드리는 아리스.
진짜 처치 곤란이다.
“일단 좀 떨어지십쇼.”
자꾸 파고드는 그녀를 떼어내려 시도한다.
제발.
너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컨X션이라도 사와야 하나?
“······우우우우우······.”
아리스가 잔뜩 볼을 부풀린 채 내 손길을 거부한다.
그녀가 쓸데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해 내 품으로 파고든다.
“어딜 갈라 카는 기고? 니는 이래 억수로 귀여운 아-쨩을 밀어낼 기가? 참말로?”
“아니 그게······”
“아-쨩은 여기가 푹신푹신하고 따뜻해서 좋데이.”
히히히.
웃음을 흘리며 나를 놓아주질 않는 아리스.
아-쨩이라는 건 시골 고향집에서 불리는 아리스 본인의 애칭인데, 그걸 여기서 들을 줄이야.
“저 자러 가야 합니다. 회장 선배.”
“뿌뿌. 귀여운 아-쨩을 버리고 어데 갈라꼬?”
술에 취해서 그런지 볼을 부풀리며 횡설수설하는 아리스.
술 냄새 나는 거 봐라.
그녀를 단호하게 밀어내려던 순간.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인터폰 화면이 켜지며 익숙한 목소리가 울린다.
[회장님. 계십니까? 나가미네입니다.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밤중에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나가미네?
이 양반이 대체 왜 지금 여기 와?
“나가미네에에에에에······!”
익숙한 이름을 들은 아리스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술주정을 부린다.
“아, 좀.”
바둥대는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아직 아리스의 메인 이벤트인 문화제까지는 몇 달이나 남아 있다.
아리스의 정체가 지금 밝혀지면 안 된다.
나가미네야 아리스의 광신도라서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 밖에 나가미네만 있다는 보장은 없다.
혹시나 지나가는 다른 사람이 아리스의 사투리를 듣는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읍! 읍읍읍읍!!”
하는 수 없다.
여기서는 내가 나서서 나가미네를 돌려보내는 수밖에.
바둥대는 아리스 대신 인터폰을 턱으로 누른 뒤에 답한다.
“회장 선배는 지금 주무십니다.”
[너, 너는?! 김덕성?]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표정이 굳는 나가미네.
[너, 대체 뭔데 회장님이랑 이런 야심한 밤에 같은 방에 단둘이서 있는 거냐? 설마 회장님의 몸에 손을 댄 건 아니겠지? 검은 귀축······! 동급생 미소녀들도 모자라서 이제는 회장님한테까지 그 마수를······!]“읍! 읍읍읍읍읍!”
사투리를 일발 장전한 아리스.
검은 귀축이니 뭐니 헛소리를 내뱉는 나가미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시작한다.
“오늘 메이진 학원 사전 답사 때문에 여기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당사자 앞에서 검은 귀축이니 뭐니 헛소리 하는 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하십니까? 나가미네 선배? 대체 무슨 상상을 하신 겁니까? 그쪽이야말로 귀축이군요.”
[그건······.]내가 강하게 나가자 당황하며 말끝을 흐리는 나가미네.
네가 뛰어 봐야 날벼룩이지.
“아무튼 회장 선배 피곤해서 주무시니 다음에 얘기하시죠.”
뚝.
인터폰을 끄면서 아리스의 입에서 손을 뗀다.
“푸하! 하아······. 하아아아······.”
아리스가 숨을 몰아쉬면서 비틀거리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김덕서이 니······. 아까 나빴데이······. 딸꾹! 이래 귀여운 아-쨩을 우째 그렇게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기고? 와카야마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데이······. 딸꾹! 이히히히······.”
도저히 술이 깰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나가서 숙취해소제를 사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나간 사이 술에 취한 아리스가 스위트룸을 나가는 참사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
“많이 취했습니다. 이만 잡시다. 회장 선배.”
빨리 재우고 여기를 떠야 한다.
내 말을 들은 아리스가 고개를 세차게 절레절레 흔든다.
“아-쨩 안 취했데이······. 자는 것도 싫데이······. 딸꾹! 내는······. 아-쨩은 우리 쿠마쨩이 없으면 못 잔데이······.”
쿠마쨩이면 아리스가 밤마다 껴안고 자는 커다란 곰 인형을 말하는 게 분명하다.
원작에서도 몇 번 나온 적 있기에 기억하고 있다.
“그거 찾아주면 잘 겁니까?”
“피이잇······.”
대답 대신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미는 아리스.
진짜 애가 따로 없다.
한숨을 쉬면서 호텔 방을 뒤적인다.
여기 어디 곰 인형이 있을 텐데.
‘대체 어디 놔둔 거야?’
아무리 찾아도 실종 상태인 곰 인형에 슬슬 짜증이 치밀어오르던 그때.
“쿠마쨩!”
등 뒤에서 아리스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오? 찾은 건가?
고개를 돌린 그때.
“찾았데이!”
와락.
언제 갈아입었는지 얇고 하늘하늘한 네글리제 차림이 된 아리스가 나를 끌어안는다.
술 냄새가 코 끝에 화악 올라온다.
“제발, 좀······.”
“쿠마쨩. 이 누나야랑 같이 자장자장······.”
뭐?
누구랑 뭘?
아니 지금 대체 뭘 어쩌자는······.
아리스가 괴력으로 나를 침대로 끌고 간다.
졸지에 같이 침대에 눕게 된 꼴.
아리스가 불을 끈다.
컴컴해진 방안.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교토의 야경 불빛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좀 놔주십······.”
“엄마······. 어디 가려는 긴데······.”
꼬옥.
아리스가 내 머리를 가슴팍에 끌어안는다
뭉클.
부드러운 감촉이 얼굴에 느껴진다.
“아무데도 가면 안 된데이······. 아-쨩 이제 엄마 말도 잘 듣고······. 참한 여자가 될 테니까······.”
술김에 엄마를 부르는 아리스.
반사적으로 원작 설정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아프다고 했었지.’
아리스의 어머니는 현재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에 장기 입원해있는 상태.
그녀가 유독 완벽에 집착하는 것도, 가난한 가정을 혼자 떠받치는 소녀가장이기 때문.
‘······나처럼.’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모습도, 항상 얼굴이 그늘진 아버지의 모습도.
우리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돌아가야 한다.
아리스처럼, 우리 집안에서 부모님을 부양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아무데도······. 가믄······.”
아리스가 말끝을 흐리더니 그대로 곯아떨어진다.
새근새근.
조용한 숨소리가 들린다.
잠든 아리스의 예쁜 얼굴이 보인다.
‘나와 비슷한 처지.’
그래서 원래 세상에서 나는 아리스를 제일 좋아했었다.
설정이 현실화된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리스가 짊어진 중압감이 어떤 건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눈앞의 아리스는 이제 활자 덩어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살아 움직이는 최애캐라.’
헛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