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94)
섬광과 함께 리츠코의 기프트, 미러 이미지가 해제되며 네 명이었던 리츠코가 한 명으로 돌아온다.
[좋았어. 좋았어! 잘했어 리츠코쨩! 다음다음!]리츠코를 앞세운 우리 일행은 빠른 속도로 실험실을 돌파했다.
적, 닥터 모로모로는 발악하듯 실험실에 격리된 이계종을 계속해서 풀어대며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리츠코와 아리스 앞에서는 시간 벌기 수준도 되지 못했다.
진공 청소기처럼 이계종을 갈아대는 리츠코와 아리스.
S랭크 둘의 위력은 대단했다.
두 사람이 이계종의 모가지를 순식간에 따는 모습을 관전하면서 나는 웃었다.
‘이게 공략이지.’
원작의 답답하기 짝이 없던 고구마 전개는 이제 없다.
내 앞길에는 오직 사이다뿐!
거기에 지하 실험실 구조를 몰라 길을 한참 헤맸던 원작 주인공 놈과는 달리 내 옆에는 성능 확실한 오퍼레이터, 아니 네비게이션까지 딸려 있었으니.
[이제 이 앞이 레나쨩이 잠든 실험실이야.]당연히 예상대로 원작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눈앞에 딱 봐도 중요하다는 느낌이 풀풀 풍기는 거대한 금속 철문이 보인다.
철문 앞에 새겨진 커다란 숫자 00.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모습이다.
“레나······.”
카스미 선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 이름을 부른다.
그녀가 양손으로 지팡이형 초상병기 ‘스타 쿼터스태프’를 꽉 쥔다.
카스미 선배의 전투 모드 전신 장갑은 마녀 형태.
보라색 고깔모자에 보라색 마녀 로브를 휘날리는 카스미가 입술을 깨문다.
“조금만 참아. 나랑 후배 군이 구해줄 테니까.”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는 카스미 선배.
[시스템 해킹 완료. 문 개방할게. 조심해. 덕성쨩.]오퍼레이터 사오리의 목소리와 함께 지잉하고 문이 열린다.
문 너머로 보이는 건 세계수라고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
식물 형태로 변한 레나다.
생명력 가득한 싱그러운 녹색 나무가 인공조명 아래 있는 모습은 상당히 아이러니했다.
나무 줄기에는 수많은 파이프가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었다.
증폭 비약의 원료를 뽑아내는 모습.
나무로 변한 레나의 모습을 본 카스미 선배의 눈동자가 떨린다.
“너무해······.”
카스미 선배가 입술을 깨문다.
고개를 든다.
눈앞에 하얀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회색 머리의 비열한 인상을 지닌 남자가 보인다.
딱 봐도 알겠네.
쟤가 닥터 모로모로다.
“당신이 닥터 모로모로입니까?”
한발짝.
앞으로 나선 아리스가 창날 끝으로 닥터 모로모로를 겨누며 말한다.
파츠츠츳.
창날에 은빛 스파크가 감돈다.
“니 전력으로는 절대 우리 못 이긴데이. 그러니까 쓸데없이 헛짓거리 말고 그냥 항복해라. 우리도 싸우는 건 귀찮으니까.”
손으로 단도를 돌리면서 귀찮은 어투로 말하는 리츠코.
[그래그래! 항복하라구! 닥터 모로모로! 너는 이제 끝났어!]사오리까지 신난 목소리로 말한 순간.
“으, 으흐흐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닥터 모로모로가 이마에 손을 짚고 허리를 젖히며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하여간 누가 라노벨 악당 아니랄까 봐.
또 시작이네.
허세 부리는 거 좀 봐라.
혀를 차면서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던 그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중생들인지! 이 얼마나 가여운 자들인지! 본인들이 함정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다니!”
눈썹이 꿈틀한다.
함정?
이제는 의미 없어지기는 했지만, 원작과는 다른 대사.
정말 함정을 파뒀다고?
정신이 번쩍 든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YO. Dr. 모로모로의 말이 맞습니DA. 함정에 걸린 건 당신들 쪽이JO.”
귓가에 여기서는 들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들린다.
“S랭크 둘이면 모로모로를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겠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들을 제거하라는 마스터의 명으로 우리 두 사람이 추가 파견되지 않았다면 말이야.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
나무줄기 뒤에서 두 남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황금 체인 목걸이를 걸고, 모자를 거꾸로 쓴 흑인 빌런 캐릭터.
위험도 S랭크 빌런, 미스터 디거.
두꺼운 코트와 중절모를 착용하고 카이저 콧수염을 기른 외눈 안경의 백인 노인.
위험도 S랭크 빌런, 아키텍트.
두 명의 13사도가 추가로 나타난 거다.
“이런 씨발.”
오랜만에 한국어 쌍욕이 튀어나온다.
두 놈 모두 지금 시점에서 튀어나오면 안 되는 놈들이다.
미스터 디거, 아키텍트.
두 놈 모두 마지막 에피소드인 학원 부수기에서 남은 캐릭터 짬 처리용으로 등장해서 성장한 주인공과 히로인들에게 처리당하는 역할을 맡은 13사도들이다.
그런데 쟤네가 왜 지금?
S랭크가 셋?
이럴 수는 없다.
아무리 원작이 비틀어져도 이건 아니다.
‘메사이어 이 미친놈······.’
아드득, 까드득.
이가 갈린다.
무력감이 내려앉는다.
이길 수 없다.
이쪽은 S랭크가 둘, 저쪽은 셋.
하늘이 쪼개져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빨리 퇴각해서 다음을 기약해야······.
“······당했습니다.”
“미쳐뿌겠네.”
낭패한 표정을 지은 아리스와 입술을 깨무는 리츠코.
[계산 실패입니다. 덕성쨩! 대핀치! 위험! 위험!]귓가에 울리는 사오리의 경고 메시지.
“빨리 도망······.”
내가 퇴각 지시를 내뱉으려던 순간.
“그럼 지금부터 자네들을 초대하도록 하지.”
아키텍트가 중절모를 벗는다.
놈의 대머리가 인공조명을 받아 반짝인다.
“나의 라비린토스에.”
쿵!
아키텍트가 손에 든 지팡이로 땅을 찍은 순간.
세상이 뒤집힌다.
주변 풍경이 거꾸로 돌아간다.
실험실이 사라지고 미로가 눈앞에 나타난다.
라비린토스.
아키텍트가 기프트 ‘대지 조작’과 어빌리티 ‘진지 구축’을 결합해 만들어낸 그만의 궁극기.
대지 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미로를 진지 구축을 통해 현실에 덧씌운다는 요상한 설명이 설정집에 적힌 이 염병할 스킬은 말 그대로 미궁을 현실에 소환하는 환상적인 사기 스킬이다.
“후배 군······.”
카스미 선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주변을 둘러본다.
라비린토스가 소환되자 완전히 변한 풍경.
검게 물든 하늘과 여기저기 끝없이 갈라진 황량한 미로 벽이 보인다.
‘다른 일행도 사라졌어. 카스미 선배 빼고는.’
카스미 선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없다.
원작처럼 라비린토스가 소환된 순간 미궁 안의 무작위 지점으로 전부 흩어진 모양.
원작에서는 주인공의 초인적인 기감으로 길을 찾아 미로의 중심부에 있는 아키텍트를 물리치고 라비린토스를 해제했다.
그런데 나는?
옆에 덜덜 떠는 카스미 선배가 보인다.
정신 사납다.
“침착하십쇼. 선배.”
덜덜 떠는 카스미의 손을 잡아 진정시킨다.
가용 가능한 유일한 전력이 저렇게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내가 위험하다.
트롤짓은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아, 알았어. 후배 군······.”
카스미 선배의 떨림이 잦아드는 모습이 보인다.
미간을 찌푸린다.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무작정 암흑을 길게 실로 늘어뜨리면서 길을 찾아야 하나.’
라비린토스의 원전인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테세우스가 미궁을 돌파할 때 쓴 방법이다.
신화 속 미궁과는 달리 함정투성이인 여기서 그런 방법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뿐이다.
일단 길을 찾아야 한다. 찾아서 다른 일행과 합류해야 한다.
사오리와의 통신은 끊어진 지 오래.
빨리 아리스건 리츠코건 합류해서 고기방패로 내세워야 한다.
나는 죽기 싫다.
아니, 죽으면 안 된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길 찾읍시다.”
“응. 후배 군만 따라갈게.”
카스미 선배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긴 순간.
“길을 찾으려는 건가?”
허공에 불길한 균열과 함께, 외눈 안경을 쓴 노신사가 땅에 떨어진다
“씨발.”
다시 욕이 나온다.
아키텍트.
저 양반이 왜 또 나와.
“그럴 필요 없네. 이렇게 직접 내가 자네를 처리하러 친히 왕림했으니 말일세.”
스르릉.
아키텍트가 지팡이에서 칼을 뽑아낸다.
소드 스틱 형태의 초상병기, 굽티 아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머릿속에서 아키텍트 관련 설정을 빠르게 복기한다.
아키텍트는 13사도 중 최약체.
그는 라비린토스를 유지하는 동안은 기프트도, 어빌리티도, 진명해방도 사용할 수 없다.
해볼 만, 한가?
우우웅.
듀랜달이 거세게 떨린다.
이를 악물며 듀랜달을 치켜든다.
모르겠다.
“잘 가시게. 김덕성.”
대머리 노인, 아키텍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드 스틱을 휘두른다.
“거암검식 제1식 기암괴석!”
놈이 우렁차게 스킬명을 외친 순간.
눈부신 백색 마력광이 기괴한 바위 형상으로 변해 유성처럼 쏟아진다.
지금만큼은 이 미친 라노벨 세상이라고 욕할 기력도, 스킬명 외치기를 비웃을 기운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막을 수 없다.
아무리 동기화와 블랙 스톤을 사용해도, 내가 하는 건 고작 흉내 내기뿐.
진짜 S랭크 앞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씨발······.”
몇 번째일지 모르는 욕을 내뱉는다.
반드시 패배한다.
도망가고 싶다. 튀고 싶다.
하지만 퇴로 따위는 없다.
질 수밖에 없으면서 싸움에 임하는 병사들의 심정이 이런 걸까.
듀랜달을 든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듀랜달의 칼날이 떨린다.
흑태자의 재능을 빌리지 않아도, 그간 쌓인 전투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막아낸다고 해도 다음 턴에는 무조건 죽는다.
“죽기 싫은······.”
“후배 군을 괴롭히지 마!!”
그때.
카스미 선배가 내 앞을 막아선다.
촤르르륵.
그녀의 전신에 비늘이 돋아나고, 눈동자가 세로로 갈라진다.
용인으로 변신한 카스미 선배가 쿵, 하고 지팡이를 내려찍으며 주문을 외운다.
“용언 마술── 드래고닉 실드.”
번쩍.
보랏빛 수정이 빛나며 허공에 마법진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반투명한 보랏빛 방어막이 겹겹이 쌓인다.
용언 마술.
마술사이자 영웅인 카스미 선배가 숨기고 있는, 오직 용혈을 보유한 존재만 사용할 수 있는 비전 마술.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용인 모습을 남에게 드러내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카스미 선배가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외친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후배 군, 도망가.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까, 죽으면 안 돼. 후배 군은 나쁜 남자에 검은 귀축이지만 나는 후배 군을······.”
라노벨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
입술을 깨문다.
하지만 부질없다.
S랭크 빌런의 일격은 그녀 따위가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헛짓거리 좀 하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순간.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이 울린다.
새하얀 바위덩어리들이 겹겹이 쌓인 방어막을 종이처럼 뚫고 카스미 선배의 몸을 직격한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카스미 선배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전신이 피투성이로 변한 카스미 선배.
그녀가 입에서 피를 토한다.
“후배 군······. 살아야 해······. 후배 군······.”
손이 떨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무력감이 느껴진다.
지극히 라노벨적인 상황.
주인공이 예상하지 못한 전개. 아군의 전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갑자기 나타난 절망적일 정도로 강력한 적.
적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히로인, 그 상황을 보고 분노하며 날뛰다가 결국 패배하는 주인공.
사이다를 추구하는 웹소설에서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될, 독자들의 무수한 하차를 유발하는 고구마 구간.
그 장면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게 유료 연재 웹소설이면 여기서 구매수 반 토막에 눈물의 수정 공지 후 떡락행이다.
“카스미 선배······.”
등신처럼 이게 뭐야.
나는 도망갈 생각뿐이었는데.
그 빌어먹을 손가락 약속이 뭐라고, 그딴 거나 호구처럼 믿으면서.
어차피 이길 수도 없는 상대에게 왜 개기냐고.
멍청하게.
화가 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빌어먹을 라노벨 세상.
죄다 멍청하고 머리에 꽃밭이 들어찬 히로인들.
쓸데없이 상냥한 세상.
쿨찐 씹덕에다 이기적인 사이다패스인 나를 지키려고 상처 입은 카스미 선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