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95)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거암검식 제2식. 유사하.”
아키텍트가 스킬명을 읊조린다.
유사하.
흐르는 모래의 강이라는 이름답게 강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하얀 마력의 참격이 펼쳐진다.
“도망 가······. 후배 군······.”
카스미 선배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전례 없을 정도로 격하게 떨리는 듀랜달을 쥔다.
엿 같지만.
“도망 안 갑니다. 선배.”
도망가기 싫다.
어차피 뒈질 상황이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게다가 카스미는 귀중한 전력, 여기서 두고 갈 수 없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아까 나를 감싸준 카스미 선배와 반대로, 이번에는 내가 카스미를 감싼 상황.
“두 사람 다. 이만 안녕입니다.”
작별 인사와 함께 유사하가 코앞까지 밀어닥친다.
죽기 직전에 나온다는 주마등 따위는 아직 안 보인다.
두근, 두근.
마력로와 블랙 스톤을 혹사한다.
대량의 마력이 솟아올라 전신을 휘감는다.
[금강불괴] [동기화]어빌리티 두 개를 한꺼번에 사용한다.
마력을 계속해서 끌어올린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칼날이 계속해서 떨린다.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다른 생각은 필요 없다. 잡념을 전부 지운다. 눈앞의
카스미 선배의 숨소리도, 아키텍트의 모습도 멀어져 사라진다.
시야에 보이는 건 오직 아키텍트가 쏘아낸 새하얀 참격뿐.
아무 소리도,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주변 시간이 엄청나게 느려진 느낌.
이 세상에 나랑 참격만 남은 기분이다.
이를 악문다.
물러설 곳은 없다.
죽음을 각오한다. 칼자루를 두 손으로 쥔다.
한 번.
“한 번 정도만 어떻게······.”
[한 번 가지고 되겠냐?]그 순간.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흑태자?”
[이제 겨우 내 목소리가 들리는 모양이군. 역시 죽을 위기가 되어야 사람이 좀 바뀐다니까. 진명해방을 사용해라. 애송이, 아니 파트너. 네가 이길 방법은 그것뿐이다.]“하지만 나는 아직 진명해방을 쓸 줄 모르는······.”
[아니. 너는 이미 알고 있다. 고도의 집중을 통해 초상병기와 일체화를 이뤘기 때문이지. 그러니 사용해라. 진명해방을.]흑태자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각했다.
그의 말이 맞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집중력을 끌어올려 일체화의 영역에 접어든 순간부터.
진명해방 방법은 이미 뇌리에 각인됐다.
홀린 듯 듀랜달에 마력을 주입한다.
일체화돼서 손발처럼 느껴지는 듀랜달이 마력을 받아들이며 진동한다.
푸슉.
증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빛 한점 없는 완전한 흑색으로 변모한다.
흑색 검신 위에 검은 화염이 피어오른다.
화르륵.
온몸이 검은 오라로 휩싸여 불타오른다.
[듀랜달] [진명해방] [암흑을 불사르는 불괴의 마검]진명이 해방됐다.
내가 보유한 모든 능력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올라간 게 느껴진다.
상태창이 있었다면 올 스탯 최소 2배 이상 올라간 수치가 찍혔을 수준.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길 수 있다.
넌 이제 뒤졌어.
너 진짜 비겁하구나?
거암검식 제2식 유사하를 펼친 아키텍트의 얼굴에 무료함이 떠오른다.
‘수준 이하의 하룻강아지를 이 나의 손으로 직접 처리해야 하다니······.’
마스터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
그의 미간이 좁혀진다.
13사도 중 최약체라 하더라도 엄연한 S랭크 빌런.
라비린토스 때문에 진명해방도, 기프트도 못 쓴다 하더라도 자신과 S랭크에 도달하지도 못한 애송이과의 격차는 하늘과 땅의 간극보다 더 넓다.
그 증거로 단 일격에 애송이 하나를 무력화하지 않았는가?
검은 머리 애송이, 김덕성이 카스미를 감싸고 앞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멍청하기는.’
아키텍트가 조소를 보낸다.
놈의 수준으로는 막을 수 없다.
설령 한 번 방어하더라도, 다음 일격에는 반드시 죽는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운 임무였어. 마스터는 대체 저 애송이를 왜 경계하는지 알 수 없군.’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걸 넘어 부숴봐야 안심을 하는 마스터, 메사이어의 성격을 생각하면 뭔가 큰 뜻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때.
[듀랜달] [진명해방] [암흑을 불사르는 불괴의 마검]새하얀 백색 참격 안에서 흑색 화염이 피어오른다.
아키텍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가 헛바람을 삼킨다.
S랭크인 그이기에 알 수 있다.
“무, 무슨······. 지, 진명해방이라고······?”
말도 안 된다.
저 애송이가, 적합도 C랭크에 불과한 버러지가 어째서 진명해방을?
전신이 검은 오라에 휩싸인 김덕성이 흑검 듀랜달을 천천히 휘두른다.
[흑광검식] [제2식] [암흑 반격]적의 공격을 카운터치는 흑광검식의 2식이 펼쳐진 순간.
흑색 마력이 벌떼처럼 일어나 하얀 참격을 갈라냈다.
콰광!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음이 울린다.
거암검식이 파훼되면서 일어난 충격파가 라비린토스를 휩쓴다.
“······.”
전신에 검은 오라가 휘감긴 김덕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키텍트를 바라본다.
화르륵.
그가 흑염이 타오르는 검은 마검으로 아키텍트를 겨눈다.
“야 대머리 틀딱. 넌 이제부터 뒤졌다고 복창해라.”
“뭐? 대머리라고?”
아키텍트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그의 반짝이는 대머리가 수치와 분노로 붉게 물든다.
“나를 틀딱이라고 놀리는 건 상관없지만, 대머리라니······. 참을 수가 없군.”
반질반질한 대머리는 아키텍트의 콤플렉스.
그는 자신의 대머리가 놀림감이 되는 걸 싫어했다.
김덕성이 코웃음을 친다.
“민머리 대머리 민들맨들 빡빡이 주제에 무슨.”
“크으으윽······.”
아키텍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상대가 진명해방 상태면 자신 역시 진명해방으로 맞서야 한다.
하지만 진명해방을 사용하면 라비린토스가 해제된다.
라비린토스가 해제되면 적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계획이 어그러진다.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패배한다.
이길 수 없다.
도망가야 하는데, 이런 유치한 도발에 걸려들다니.
대머리라는 말만 들으면 이성을 잃는 버릇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패착이다.
아키텍트가 간신히 되찾은 이성으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중얼거린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모욕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그러니 오늘 우리 만남은 여기까지······.”
정신을 차린 아키텍트가 황급히 꼬리를 말고 도망가려던 그때.
검은 잔상을 남기며 김덕성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간다.
[흑광검식] [제3식] [흑점 찌르기]화르륵.
검은 칼날이 아키텍트의 명치를 노리고 날아든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매서운 찌르기.
그 모습을 본 아키텍트가 당황하며 소드 스틱을 휘두른다.
“거암검식 제3식 바위 장벽!”
그의 입에서 우렁찬 스킬명이 튀어나온다.
*
눈앞의 아키텍트가 검을 휘두른 순간.
그그그그그.
지상에서 하얀 바위 장벽이 솟아오른다.
쟤네는 진짜 스킬명 안 외치면 입에 가시가 돋나?
[발악하는 거 하고는. 귀여운 수준이군. 그나저나 파트너. 아무리 악당이라고 해도 아까 대머리로 놀려먹은 건 좀 심했어.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이 악마 같은 녀석. 인성 수준이 심각해.]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니.
원래 상대방의 약점은 이용하라고 있는 거다.
[아무튼 파트너. 내 파트너가 되어서 이 정도 방어도 뚫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파트너 자격 상실이라고?]머릿속에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동안 말을 못 한 게 답답했던 듯 쉴 새 없이 말을 거는 흑태자.
‘알았으니까 좀 입 닫아봐. 머리 아프니까.’
[정령이 파트너한테 조언하는 것 정도는 상식이잖아? 그 정도는 버텨야지. 파트너. 그래야 이 흑태자 라울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있는 거 아니겠어?]‘언제부터 내가 네 파트너였다고.’
파트너라니.
소년 만화에서나 들을 법한 단어에 소름이 쫙 돋는다.
흑태자 당신 원작에서 올리비아에게는 그런 말 안 썼잖아.
[애송이. 네가 드디어 일체화의 영역에 진입해서 이 몸을 깨웠기에 마음에 들진 않지만 ‘파트너’라고 불러주는 거다. 그럼 넌 애송이가 좋냐?]‘됐어.’
내가 말을 말지.
이럴 거면 진명해방 같은 건 안 하는 게 나을 뻔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듀랜달의 칼끝으로 바위 장벽을 찌른다.
파츠츠츠츳!
흑백의 마력이 뒤섞이며 스파크가 튀고 충격파가 퍼진다.
하얀 바위 장벽이 무너지며 당황한 표정의 아키텍트가 보인다.
[지금이야 파트너! ‘그 오의’를 사용하라고!]머릿속에 라울의 목소리가 울린다.
참견하는 수준이 완전 군대 행보관 저리 가라다.
듀랜달을 잡는다.
사용자의 모든 능력치를 대폭 증폭하는 듀랜달의 진명해방이라면 저놈을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다.
[동기화]어빌리티를 중첩 발현한다.
지잉.
두통이 퍼진다.
두근, 두근.
마력로와 블랙 스톤이 공명하며 전신에 마력을 공급한다.
붉게 물든 시야에 검은 실선이 그려진다.
[흑광검식] [오의] [검은 섬광]오의를 사용하자 체감시간이 극도로 느려진다.
사고 가속에 따른 현상.
슬로모션처럼 느릿느릿하게 허우적대는 아키텍트의 모습이 보인다.
[목을 노려. 파트너.]여전히 입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흑태자의 조언이 머릿속에 울린다.
흑염이 타오르는 듀랜달을 휘두른다.
검은 거미줄처럼 허공을 수놓는 참격.
어지러운 실선이 아키텍트의 몸에 새겨진다.
“커헉!”
아키텍트가 피를 토한다.
푸슉.
놈의 목이 몸과 분리되며 피분수가 솟아오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는 아키텍트의 눈동자가 보인다.
죽었네.
“후우.”
떨리는 손을 다잡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첫 살인.
얼룩처럼 튀어 오른 핏자국이 보인다.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저놈을 죽이지 않았다면 나랑 카스미 선배가 죽을 판국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
[정신 차려. 파트너.]흑태자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다.
[아직 안 끝났어.]그의 말이 옳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라비린토스를 유지하던 아키텍트가 죽었으니 곧 이 공간도 해제될 거다.
‘그 사이를 노려 다른 빌런들의 뒤통수를 쳐야지.’
내가 아키텍트를 조졌다는 사실을 다른 빌런들은 아직 모르고 있을 터.
라비린토스가 해제되면 당연히 당황할 거다.
그 잠깐의 틈.
찰나의 빈틈을 노려 놈들의 뒤통수를 쳐야 한다.
[와우. 파트너. 아까 대머리 인성질도 그렇고 너 진짜 비겁하구나?]‘시끄러워.’
이기려면 뭐든 해야 한다.
거기에 진명해방 때문에 실시간으로 마력이 뭉텅이로 빠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기절하고 말 거다.
인상을 찌푸리며 마력 고갈로 인한 현기증을 참는다.
‘어차피 오래 못 싸우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해.’
[완전한 일체화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그렇지. 지금 파트너의 진명해방은 반쪽짜리야. 그러니까 꼬우면 진작 단련에 시간을 쏟았어야지.]‘반쪽자리?’
확실히 그렇다.
나조차도 여기서 진명해방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반쪽짜리라니?
[그래. 반쪽짜리. 지금의 파트너 상태는 강제 진명해방과 비슷해. 그때 파트너가 강제 진명해방으로 일체화의 영역을 경험했을 때, 몸이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가 죽음의 위기에 닥치니 극한의 집중 속에서 생존 본능이 반응해 강제로 각성한 거지.] [거기에 파트너답지 않게 목숨을 걸고 카스미라는 아가씨를 지키겠다는 상냥한 마음씨에 이 흑태자 님이 감동 받아서 네 부름에 응한 거라고.] [강제 진명해방 경험, 죽음의 위기와 생존 본능, 상냥한 마음. 이 셋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지금의 진명해방도 없었다는 얘기지. 한 마디로 파트너의 운빨과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는 이야기야. 알아들었어?]누가 누굴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