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Gumiho is a mag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3)
아카데미 구미호는 마법천재-73화(73/408)
아카데미 구미호는 마법천재 73화
살생석(3)
─아마 나였다면, 아마 화염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높여서 눈앞의 짐승을 가둘 우리를 만들었을 거야. 검은 안개에서 물을 추출해 다루기에는, 육신에 깃든 열기가 너무나도 뜨거워서 물이 금방 증발할 테니까.
귀에 들리는 환청.
그러나 환청치고는 또렷하고, 나름의 논리정연한 수법에 무심코 몸이 따르고 있었다.
콰앙!!
불꽃이 사방을 뒤덮었다.
이내 불꽃은 수십의 기둥이 되어 땅에 처박혔다.
그렇게 유형의 불꽃은 감옥을 형성, 일대의 모든 생명체가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감옥을 생성했다.
물론, 이 정도로 녀석의 발목을 19초 정도 밖에 못 잡는다.
아니지. 19초면 나름 오랫동안 잡는 편이려나.
“하하, 고작 이따위 불길로 나를 붙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리 말한 도루도는 힘으로 불꽃의 창살을 잡아당겼다.
유형의 불꽃은 쇠창살처럼 단단한 감옥을 만들었지만,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그 정도로는 그의 발목을 조금 밖에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그 조금의 시간이었으니.
다시금 내 귀에 아름다운 선율과 같은 어조의 독백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나선 형태의 독특한 마력 배열을 조정하겠지. 용적의 여유 공간을 보아하니, 나선이 세 개 정도는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왜 시도조차 안 하는지 모르겠는걸.
다음 조언 고맙다, 환청.
나는 환청의 말에 논리를 느끼며 이를 실행에 들어갔다.
퍼엉!!
“……!!!”
주먹이 틀어 막혔다. 여태까지 막힌 적 없던 도루도의 주먹이었기에 그의 표정에 경악이 번졌다.
“뭐, 뭐냐 이 말도 안 되는 밀도의 마력은……!!”
마인(魔人)인 만큼 마력(魔力)에 민감한 도루도. 그의 눈에 비치는 승우는 광기에 찬 광인이었다.
심지어 본인보다도 더.
눈앞의 미치광이는 마력의 구조는 두 갈래로 나눠, 교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위로 선 하나를 추가로 덧붙였다.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그것은 마력에 대해 타고난 센스와 일순의 실수로 체내의 모든 마력이 비틀려 몸이 뒤틀릴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짊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단 한 번의 실패가 영구적인 장애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곡예.
아직은 미완성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되는 세 개의 선으로 구축된 마력. 그걸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승우의 모습에 도루도는 진지하게 퇴로를 찾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만큼 저 마력은 위험했다.
잘못했다가는 마기의 갑옷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지는 것은 물론, 내장도 곤죽이 되리라.
무시했던 상대에게서 위협을 느꼈다는 사실에 위축되는 것도 잠시.
그는 곧장 주먹에 마기를 휘감아 전력으로 녀석의 기괴한 마력을 부수려 달려든다.
바로 그때, 내 손아귀에서 은밀하게 타오르고 있던 작은 불씨.
그것이 두 개의 나선과 어설프게 추가된 또 하나의 나선을 따라, 회전하며 거칠게 피어 올랐다.
「여우불─삼중나선」
세 갈래로 나눠진 자색의 저주스러운 불꽃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자염이 일렁이며 어두운 그림자가 내 등 뒤로 몸을 뻗었다.
순간,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지켜보던 도루도는 문득 악마를 연상했다. 불꽃의 움직임에 따라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가 기다란 뿔과 이빨, 꼬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섬기는 일흔두 명의 귀족들보다도 악랄하고 탐욕스러운 악마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생긴 찰나의 빈틈.
화염을 구슬의 형태로 극한까지 압축한 나는 도루도의 몸에 구슬을 쑤셔 박아, 그 육중한 몸과 견고한 갑주에 구멍을 뚫었다.
콰아아아앙!!
“비, 빌어, 먹을!! 개자식이───!!!!”
복부에 큰 구멍이 뚫림과 동시에 환부가 익어버리는,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기괴한 비명이 경매장을 가득 메웠다.
“…….”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치명타는 입혔지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 손에 쥐어진 불꽃. 「여우불」의 배열을 되짚었다.
두 가닥으로 이뤄진 나선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나는 이때까지 이 빈 공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공백이야말로, 「이중나선」의 마력 배열이 스킬이나 마법의 효율과 위력을 배로 늘리는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이 쌓이고, 눈에 지혜가 싹트며 그 생각은 점점 사라졌다.
눈앞의 빈 공간은 마법의 위력을 높이는 핵심적인 구조 따위가 아니야.
오히려 내가 만든 스킬이 부족하다는 증거.
다른 말로 「이중나선」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와도 같았다.
─어머나, 마치 내 말을 들은 것처럼 그대로 행동하다니……. 설마, 혼잣말이 들리는 건가?
아, 이런 들켰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고마워, 환청.
네 덕분에 확실하게 체감했다.
보통의 것으로 안 되면, 두 배로.
두 배로도 안 되면, 세 배로 때려 박으면 먹힌다는 사실을.
폭력적이기 그지없는 깨달음.
그러나 깨달음은 내 영격을 어루만지며, 보다 고차원적인 수준으로 인도했다.
[수련이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구변구복(九變九復)으로 하여금 달빛이 세 번 차오르고, 세 번 다시 기울어 천지인의 조화를 이룹니다.]내 안의 그릇에 물이 가득 찼음을 느꼈다.
이 그릇이, 이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 유렌과 싸우며 느꼈던 감각과 동일한 감각이란 것은 알았다.
다만, 이번에는 피부가 갈라지지 않았다.
벗는 것은 피부가 아니라 내 역량의 한계를 가둬둔 지식.
나는 보이지 않는 알을 깨부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봇물이 터지듯이 확장된 지식.
나는 지식과 함께 내 영혼의 크기와 격이 함께 넓어지는 것을 체감했다. 눈에 띄는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아, 꼬리가 두 개에서 세 개가 됐다는 것도 큰 변화라면 변화이려나.
[진화가 끝났습니다.] [「종족 : 이미호」에서 「종족 : 삼미호(三尾狐)」로 진화했습니다!] [‘삼위일체’를 이루었습니다. 세 개의 꼬리가 각각 천지인(天地人)을 관장하며, 삼재(三才)를 구현합니다!] [삼재를 이룬 보상으로 마력의 질이 한 등급 상승합니다!]……
[당신이 구현한 ‘삼재’가 스킬, 「이중나선」에 영향을 끼칩니다.] [새로운 나선이 두 개의 나선 위로 교차합니다.] [스킬, ‘삼중나선(B)’을 습득하셨습니다.]화륵!
작은 불씨가 튀기며, 불꽃이 세 개의 기둥을 이루었다.
기둥은 서로 교차며 세 개의 나선으로 하나 되었다.
그로 하여금 피어오르는 것은 극양의 열기를 담은 불꽃이었다. 방금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안정성.
구조가 안정된 만큼 위력과 효율도 배로 올랐다.
“……고맙다. 네 덕분에 한 꺼풀 벗은 느낌이야.”
“오, 오, 오지 마! 이 미친 개새끼야!”
“그러니까. 이걸 가장 먼저 너한테 맛보여줄게. 어때? 영광이지?”
도루도가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녀석의 유언 따위를 들을 생각조차 없었던 나는 장갑 위로 선명히 느껴지는 초고열을 느끼며 왼손으로 녀석의 아가리를 크게 잡아당겼다.
손상된 내장 때문에 핏물이 흘러넘치는 입에 불꽃을 쑤셔 넣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흐르는 피가 멎었다.
아니, 전신의 피가 멎다 못해 탔다고 말해야 되나.
“──────!!!!!”
내장부터 몸이 타오르는 작열통에 도루도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피와 침이 마른 입으로는 기괴한 단말마를 내뱉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런 도루도를 내려다보며, 녀석을 태우는 불꽃을 유심히 살폈다.
화염에 내성을 가진 S급 마인조차 태워 죽이는 불꽃.
지옥의 유황불이 이러할까.
“좋네.”
경매장에 왔다가 추가로 보너스를 얻은 느낌이 들었다.
젊은 애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득템이라고 하던가.
정말이지, 갑작스러웠지만 덕분에 득템했다.
나는 등 뒤에 자라난 세 번째 꼬리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제 내 전투도 끝났겠다, 저쪽은 어쩌고 있으려나.
호기심에 고개를 돌린 순간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쪽도 금방 끝나겠네.”
* * *
빛에 색깔을 입혀라.
승우의 그 말은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
빛의 파장과 같은 시답지 않은 과학적 논리를 들먹이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사벨은 제 빛에 ‘색(色)’을 입혀볼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를 불경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이사벨의 빛은 조모의 것을 닮았기 때문이다.
<발키리>라는 이명의 조모는 언제나 그 이명에 걸맞게, 찬란하고 영광된 빛과 함께 영국을 수호하셨다.
동경은 어느새 모방이 되었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녀는 모방한 것을 제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이건 내 빛이 아니야.’
순백과 황금빛이 뒤섞인 찬란한 빛은 <발키리>의 것.
이사벨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사벨의 빛은 무엇인가.
어디에 있고, 무슨 색을 띠고 있는가.
타오르는 불길과 바닥에 흥건한 붉은색?
아니, 그런 정열적인 색깔은 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넓고 깊은 바다와 해맑은 하늘의 푸른색?
안타깝지만 그녀의 세상은 비좁았기에 푸른색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초목의 싱그러운 초록색?
한평생을 거대한 저택에 갇혀 지내다시피 생활한 그녀에 어울리는 색은 아니었다.
탁 트인 대자연의 청록색도.
그맘때의 소녀가 마음에 들어 할 분홍색도.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과 같은 노란색이나 금색도.
이사벨을 정의할 수 있는 색깔은 아니었다.
“……전부 아니야. 내 색깔은─”
─좀 더 깊고, 어두워.
푸르른 벽안이 사방을 훑었다.
형형색색의 세상에서 그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색(單色)만으로 이사벨이라는 인간을 정의할 수 있는 색을 찾고자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
입으로는 명령을, 눈으로는 색을 구분하고, 머리는 두 가지 명령을 동시에 수행한다.
색은 배합과 조합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를 아득히 상회한다.
과연 이 수많은 색 중에 그녀의 색깔은 어디에 있을까.
살피던 와중, 필사적으로 싸우는 사내. 그녀의 전 약혼자, 백승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체모는 검다.
머리도, 귀도, 꼬리도.
승우를 감싸고 있는 색깔은 그녀가 흔히 아는 검정보다도, 짙고 어두웠다. 옻과 같은 색채를 굳이 명명하자면.
옻의 빛깔.
그래, 칠흑 정도려나.
너무 짙고 어두워서 그녀의 빛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싶은 색을 눈에 담은 순간.
“……덧칠하는 게 아니야. 반대로 하는 거야.”
이사벨은 깨달았다.
반드시 색을 더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빼는 것도 미덕이다.
그녀의 전 약혼자. 아카데미의 조교. 임사 교사. 날 차버린 사람. 그럼에도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사내는 이사벨에게 말했다.
색깔을 덧그리라고.
그러나 그녀는 반대로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전 약혼자에 대한 반발심도 살짝 섞여 있었다.
빛에 색을 덧칠할 거라면, 아예 차라리 지워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곧바로 실행에 옮겨보자.
‘우선 기본 골자부터 차근차근 해체하자.’
그녀의 빛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골자.
‘삼원색(三原色)’, 그걸 해체하기 위해 술식으로부터 가장 순수한 형태의 빛을 일으켰다.
이사벨의 얇은 손아귀 위에 꽃봉오리처럼 피어오른, 새하얗게 명멸하고 있는 순백의 빛.
그 빛으로부터 색깔을 지웠다.
그녀의 마법에서 「혁(赫)」이라는 개념이 지워졌다. 새하얀 빛 위로, 청록(靑綠)이 가라앉았다.
푸르른 초목을 그대로 구현한 것 같은 색깔.
아름답지만 그녀가 원하는 색은 아니었다.
뒤이어서 「창(蒼)」의 개념이 청록으로부터 지워졌다. 푸르름이 사라진 청록에는 「녹(緑)」의 개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이윽고 하나 남은 개념마저 무너져 내렸다.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색을 잃은 빛은 점차 잦아들었다.
점멸하며 희미하게 흐려지는 빛.
이사벨은 그 빛을 가만두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 술식을 고정. 자신의 특성과 스킬을 이용해 색을 잃어버린 빛을 억지로 조작했다.
가장 기본적인 골자를 잃어버린 술식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녀는 그 위로 새로운 골자를 세웠다.
그러나 억지로 세운 골자가 튼튼할 리가 없었다.
조모님과 함께 만든 원초의 형태와 비교했을 때, 누더기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억지로 꿰맨 술식 위로, 희미한 빛은 넓게 산개했다.
쓰러진 모래성처럼 사방으로 편산하는 빛을 보며, 이사벨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찾았다.”
내 빛.
이거야말로 내 빛이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내가 찾아낸 내 색깔.
사랑했던, 어쩌면 여전히 사랑하는 그를 닮은.
어릴 적 그와 함께 올려다보고, 언제나 함께 볼 줄 알았던 밤하늘과 똑 닮은.
그녀의 텅 빈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공허함처럼 칠흑의 광채가 사방을 뒤덮었다.
검은빛은 사물이나 바닥에 닿는 족족 검게 물들였다.
근묵자흑(近墨者黑).
묵의 옆에 있으면 무슨 색이든 흑으로 물들 따름이다.
붉은 선혈도, 금색으로 찰랑이는 금화도, 푸르른 하늘도.
그 어떠한 아름다운 색채라도, 묵을 끼얹는 순간 흑으로 환원된다.
이것이야말로 이사벨의, 그녀가 설정한 이 세상의 이치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검은빛 위에서뿐이었지만, 일시적으로나마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저런 어린 년이 왜 영역을 선포하고 지랄인데?!!”
“너 저거 알아? 처음 보는 빛인데.”
“너 같은 근육 뇌는 모를 거다. 지금 저 애새끼는 검은빛을 매개로,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영역’을 억지로 덮어씌우고 있다고!”
“어……. 그래서 그게 뭔데?”
영역(領域).
혹자는 영역 선포나 영역 전개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지만.
결국 영역이란 성역이라는 지고한 경지의 턱밑까지 도달했다는 증거이자 증명.
지금 이 순간.
금발의 어린 소녀는 불완전하게나마 마법사들이 추구하는 궁극에 발을 담갔다.
그 사실을 아는 마법사들은 자리에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일순 빛이 파도처럼 몰아치며 그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즉석에서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마인들의 도주를 사전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속도.
“……어딜 도망가.”
두려워하는 마인들을 향해 그녀가 힘없는 미소를 내지었다.
그러자 마인들의 얼굴 위로 공포가 빗발쳤다. 이사벨도 알고 있는 형태의 공포였다.
한때 찬란했던 그녀의 황금빛 또한 색을 잃고, 묵으로 물들었기에 저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사랑했던,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 그를 따라서.
“함께 어두워지자.”
「별빛을 헤는 바다」
「광자의 바다」
이사벨의 시그니처 스킬, 「별빛을 헤는 바다」와 「광자의 바다」가 용솟음쳤다.
해일처럼 범람하는 빛의 파도들은 곧 경매장에 도사리는 그녀의 모든 적을 삼키리라고. 이전의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겠지만.
『근묵자흑』
색채를 잃은 그녀의 빛은 사방의 모든 것은 더 이상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았다.
파도는 칠 상대를 스스로 정하지 않는다.
그저 바닷가가 고요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칠 따름이다.
하지만 파도는 목표를 원했다.
더럽힐 색깔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우선순위를 원했다.
매일 아침 메모장에 그날 할 일을 적어두는 체계적인 성향의 이사벨과 닮은 마법이었다. 이에 그녀는 흑으로 물들 색을 활용하기로 했다.
색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녀의 마법만이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가지각색의 표적들.
이사벨은 이 표적들의 색을 분류, 용도에 맞게 덧칠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이나 물건이 있는 구역은 녹색.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상황에 따라서는 물들여도 상관없는 청색. 거리낌 없이 물들여도 상관없는 황색.
그리고 제1 순위로 검게 물들여야 하는 적색.
다양한 색으로 난잡하지 않게. 또 순식간에 삼킬 수 있도록.
4색만으로 정리된 이사벨의 시야는 이전보다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했다.
이제 그녀가 할 것은 일정한 세기의 파도가 칠 수 있는 ‘바다’를 구현해 주는 것뿐. 그리하여 벼루에 간 먹물처럼 일렁이는 칠흑빛의 바다가 고요하게 퍼졌다.
“……검은 바다니까. 피가 조금 묻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이 바다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색을 오직 이사벨의 동급생들과 돈만 많은 주제에 허세만 부리는 부자들. 그리고 승우뿐이었다.
그 외의 대상은 모두 죽여야만 하는 적이다.
아직 살인의 경험이 없던 이사벨.
그녀는 예비 플레이어로서, 마인을 죽임에 손속의 거리낌이 없었다.
검은빛의 파도는 눈앞의 모든 것을 삼켜서 일대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공허한 세상은 자신과 같은 검은색으로 만들었다.
간혹 마인 여럿이 죽었을 때는 검정 위로 선명한 붉은색이 드러나서 곤욕스럽기도 했다.
오직 붉은 피의 흔적만이 죽어간 마인들의 단말마였으나, 그조차 검은빛에 물들어 사라졌다.
“……그 녀석한테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마인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을 승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창때의 소녀다운 수치심에, 그녀는 마인들의 피의 흔적과 더불어 그들의 사체마저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이러면 눈치 못 채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