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ng as the Perfect Narrow-Eyed Villain RAW novel - Chapter (2)
완벽한 실눈 악역을 연기하다-2화(2/300)
2화. 싫은 놈(1)
“후우…….”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고른 남자, 헤란드 크라이파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나열된 복도를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입을 쩍하고 벌릴 정도로 휘황찬란한 저택.
마치 궁전처럼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모르는 사람이 온다면 예술품을 감상하듯 찬찬히 음미해봤겠으나 헤란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도리어 식은땀이 주르륵 흘렸다.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복도 끝에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누구든 그렇겠지.
‘가고 싶지 않다. 만나고 싶지 않다.’
머릿속에 부정한 생각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 문 앞에 도착하자 그냥 이대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헤란드는 고민했다.
“헤란드 님, 주인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문 옆에 선 사용인에게 안내는 필요 없다며 손을 휘젖고, 헤란드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복도보다 더욱 고급지게 꾸민 응접실이었다.
그곳엔 한 남자가 물뿌리개를 들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난(蘭)?”
남자가 물을 주고 있는 식물은 난이었다.
휘황찬란한 저택의 주인치고는 소탈한 취미다.
그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실눈. 그리고 희미한 미소가 담겨있는 입가였다.
“오셨습니까? 헤란드 형님.”
“그, 그래.”
헤란드는 나긋한 목소리를 듣고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크라이파트 가문의 방계혈족 출신이지만, 가문 내에서 제일가는 검술 실력을 지녔으며 동시에 냉정함과 잔혹함을 타고난 괴물.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웃는 처형대’이겠는가?
저 물뿌리개를 쥔 손에 수많은 데몬과 인간의 피가 묻어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헤란드는 자신보다 나이가 적으며, 호족상으로는 동생이었지만 유리안을 두려워했다.
그는 ‘데몬’을 죽이는 것도, 인간을 죽이는 것도, 심지어 가족을 죽이는 것도 눈 깜빡하지 않고 행할 귀신이었으니까.
“머, 머리는 괜찮느냐?”
헤란드는 공포를 최대한 숨기며 입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유리안의 머리를 가리켰다.
“제도 변방에 나타난 데몬을 사냥하던 과정에서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다.”
“예.”
“주치의의 말을 듣자 하니 기억 상실 증상이 있다고 하던데…….”
“약간 있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근심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길.”
유리안의 말에 헤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고 보니 최근 네가 숙청한 하이란스 가문의 생존자들이 페레난드 신성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이란스 가문…….”
“기억나느냐? 그 가문의 차남이 널 유독 싫어했던 걸로 아는데. 뭐, 결국 네 손에 죽었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만 형님.”
고개를 돌린 유리안.
“기억나지 않습니다.”
담백하게 이어지는 말에 헤란드는 흠칫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유리안의 성격상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숙청한 인간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걸 하나 하나 기억하고 있을 리가 있겠나? 라고 되물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로군.’
이 실눈의 괴물 앞에선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고, 품은 진의를 숨겨선 좋을 게 없어 보였다.
헤란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대로 오늘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네, 네가 부상 중인 건 알고 있으나…… 원로회 분들께선 오늘 있을 ‘감은 눈’의 입단 테스트의 교관으로 네가 참가하길 바라시는구나.”
“‘감은 눈’…… 후후.”
초연한 웃음에 헤란드는 다시금 겁을 먹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괴물이 인간을 흉내 내며 웃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 그래…….”
“헤란드 형님도 함께 가십니까?”
헤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까지 안내해주라고 크라이파트가(家)의 원로분들이 명령하셨다.”
제국 사대명문가 중 하나인 크라이파트가(家)는 예로부터 혈통을 중시했다.
철저히 모든 게 직계 혈족에게 집중되었고, 혹시라도 방계가 이를 넘어서라 싶으면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방계혈족은 아무리 공을 세워도 정식적인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세간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러기에 크라이파트 가문은 직계와 방계를 구분하고자, 방계인 혈족에게 ‘프라손’이라는 미들 네임을 사용하게끔 하였다.
원로회를 장악한 크라이파트 가문은 이 괴물,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추락하기를 원했다.
더러운 방계혈족인 것도 모자라, 황실의 명이라면 갓난아이도 죽일 수 있는 괴물.
그런 인면수심(人面獸心)이 크라이파트 가문의 성을 달고 있었으니, 보수적인 원로회가 보기엔 당연한 입장이었다.
헤란드가 이곳에 온 이유도 이를 위한 발판 중 하나였다.
데몬과의 사투로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
그 진위(眞僞)를 확인하고 그의 몸 상태가 어떤지 파악할 겸 말이다.
“안내…… 안내라…… 후후.”
다시금 이어지는 미소.
저 미소를 통해 헤란드는 유리안의 생각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저 초연한 웃음의 의미는……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거겠지.
헤랄드는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까? 옷도 갈아입고, 오랜만에 일을 하는 거라 마음을 다잡고 싶습니다만.”
“……그,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어차피 테스트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런데 형님.”
그렇게 발걸음을 옮겨 돌아가려던 헤란드는 아우의 목소리에 움찔 멈춰 섰다.
또 뭐가 남았단 말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모두 털어놓았건만.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순간, 헤란드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너 때문에 그렇다!’라 소리치고 싶어졌다.
“어…… 어, 그래 보이느냐?”
“예,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은데 이걸 길러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유리안은 물을 뿌리던 화분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안에서 난초가 자라있었다.
“난……을 말이냐?”
“기르기 쉬운 식물이죠. 그늘 안에 두었다가 비가 올 때만 물을 주면 잘 자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유리안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 난초, 설마 관리를 못 해 죽인다면 내 목이 달아나는 건가……?’
지레짐작일 수 있으나, 유리안은 괜히 ‘웃는 처형대’라는 별명이 붙은 미치광이가 아니다.
북부 전선이건 제도이건, 목표로 한 상대의 목숨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정신 나간 녀석이다.
어떤 식으로든 명분이 생기면 바로 검을 휘두를 게 분명하다.
“고, 고맙다…….”
“천만입니다.”
유리한의 불길한 미소를 보며 헤랄드는 원치 않은 화분을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
응접실 구석 가득한 난초를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본래라면 하나, 많아 봐야 두 개만 기를 생각이었다.
근데 사용인이 말을 잘못 이해했는지 응접실 한구석이 정글이 되어버릴 정도로 가져왔다.
이렇게나 많은 난초, 대체 어디서 구한 거냐?
그래도 방금 하나는 처리했다.
정신적 안정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선물했으니 잘한 일이겠지.
“……헤란드 형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연기가 통한 모양이군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난 응접실 안쪽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들어온 것은 머리에 칭칭 감은 붕대와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가면을 쓴 듯한 은은한 미소다.
“눈이 이런데, 앞이 이렇게나 잘 보인다니.”
그것은 실눈.
눈동자의 안광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실 같은 눈이다.
혼잣말을 내뱉으며 거울에 비친 ‘나’를 곰곰이 살펴보았다.
‘걸어 다니는 위선’, ‘배신의 온상’, 흔히 ‘실눈 캐릭터’하면 연상되는 것들이 모조리 떠오를 정도로, 거울 속의 ‘나’는 음흉하게 생겼다.
아니 다른 사람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이 남자는 원래 내가 아니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내가 열광하고, 좋아했던 게임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 등장하는 증오스러운 악역.
그렇다.
지금 난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등장인물인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되어 있었다.
‘그 덕에 유리안으로 연기하기 편한 것도 있었지.’
거두절미하고, 난 이 캐릭터를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의 은혜를 원수로 갚고, 존댓말을 사용하지만 안하무인한 성격 하며, 최후에 순간엔 그의 숨통도 끊는 최악의 인물상이다.
그렇기에, 이 ‘유리안’을 연기하며 그의 대사를 떠올리는 것이 꽤 용이했다.
‘싫어하는 놈일수록, 자세히 보이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달가운 것은 아니다.
첫날은 두통 탓에 침대에 드러누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용인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괜찮냐는 등의 소리를 해댔다.
머리가 아픈 와중이었기에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꺼지라고, 그 결과.
“기억 상실증이라는 소문이 도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라는 게임의 등장인물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중에서 하필이면 유리안에 빙의했다는 사실이겠죠.”
음, 그렇고 말고.
“그나저나 혼잣말도 존댓말로 변환되는 겁니까?”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뒤, 다시금 거울 속에 비치는 실눈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캐릭터 성향
⇒ 실눈
⇒ 존댓말
⇒ 포커페이스
⇒ 존재감 과시
⇒ 표리부동
⇒ ……
√특성
⇒ 놀라운 직감
⇒ 부정의 색
⇒ 타고난 검사
⇒ 마왕의 그릇
⇒ 탁월한 마나 컨트롤
⇒ ……
====================
눈앞엔 익숙한 창이 하나 떠올랐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 사용되는 UI 창이다.
지난 5일간 이 사용법을 깨우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그중, 캐릭터 성향에 적힌 ‘존댓말’이란 부분에 시선을 집중했다.
【 캐릭터 성향 《 존댓말 》 】
√효과
└ 입 밖으로 내는 모든 언어에 존중이 담깁니다. 당신은 아이, 어른할 것 없이 모두에게 존대합니다.
음흉한 ‘실눈 캐릭터’라면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 성향, 바로 존댓말.
지금 내가 빙의한 등장인물 ‘유리안’도 음흉한 ‘실눈 캐릭터’ 중 하나였으며, 작중에서 모두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혼잣말에도 적용이 된다니 너무한 것 아닙, 아닙…… 아닙니까? 에이 됐습니다!”
억지로 말을 짧게 해 보려고 했으나, 어떻게 된 모양인지 존댓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가뜩이나 신경 쓸 일도 많은데, 여기에 쓸데없이 기운을 빼고 싶지 않다.
피로함에 응접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몸을 던졌다.
“젠장……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 일어났군요……!”
격하게 불만을 토로하던 난 앞으로 ‘유리안’으로 살아야 한다는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타공인 대단한 검술 실력과 마법에도 조예가 있는 천재.
어린 나이에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의 일원이 될 정도의 실력자.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인공인 영웅, 하이든 라이히의 수제자.
‘동시에…….’
미치광이. 소시오패스.
인두겁을 쓴 괴물, 북부 전선의 악마, 웃는 처형대.
이토록 사나운 이명이 많다는 것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그만큼 적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심지어 그가 속해있는 ‘크라이파트 가문’은 유리안이 방계 혈족이라는 이유로 끔찍이도 싫어했다.
천애고독.
그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이 녀석은 기댈 곳이 없는 놈이다.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가진 무력뿐이다.
하지만 그 무력도 지금은 무용지물이다.
‘실눈 악역’에 빙의한 나 ‘이시후’는 딱히 검술에 조예가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막막하군요…….”
현재 상황이 막막한 건 이 때문이다.
‘유리안’이 쌓아 올린 악명을 생각하면 이 제도(帝都)에 내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사정없이 물고 뜯겨 죽을 게 자명했다.
그러니, 정말 싫지만. 아주 싫지만!
나는 완벽하게 ‘유리안’을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제국 내 모두가 두려워하는 음흉하고 정신 나간 실눈 캐릭터를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원로회에서 말한 감은 눈 입단 테스트의 교관으로 참여하는 것부터겠군.’
그리 생각하며 머리에 둘둘 감았던 붕대를 풀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또 어떻게 하면 원래 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그건 차차 알아내는 것으로 하자.
현재는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서 살아남는 게 먼저다.
“골치 아프지만, 교관 노릇을 잠시 해야겠군요…… 군요! 군요! 혼잣말은 좀 넘어가면 안 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