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ng as the Perfect Narrow-Eyed Villain RAW novel - Chapter (4)
완벽한 실눈 악역을 연기하다-4화(4/300)
4화. 타업자득(1)
‘바이엘 아카데미’의 부지는 실로 웅장했다.
단순 계산만 해도 여의도의 면적과 흡사할 정도로 거대했다.
제국 내에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이는 곳, 말 그대로 최고 교육의 산실에 어울리는 규모일지 모른다.
“어, 어떠냐 유리안. 오랜만에 모교에 들른 기분은.”
바이엘 아카데미를 둘러보고 있자니, 옆에 있던 헤란드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냐?”
여전히 ‘공포’를 뜻하는 보라색 아지랑이가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이야 이해 가지만, 딱히 아무것도 안 했는데 조금은 억울하다.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한 게 다잖아.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형님. 굳이 시간 내셔서 여기까지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다. 이왕 온 김에 ‘감은 눈’ 입단 테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싶구나.”
응?
엄청 겁을 먹길래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 줄 알았는데…….
여기서 조금 기묘함을 느꼈다.
내 특성인 <부정의 색>에 따르면 헤란드가 품은 감정은 ‘공포’가 확실하다.
당연히 그 원인은 나 ‘유리안’과 원치 않은 동행.
그럼에도 저리 대답했다는 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감시인가.’
크라이파트가(家)는 세간에 이름을 날린 방계 혈족인 ‘유리안’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심지어 쌓은 명성이 대게 악명이라, 가문 입장에선 골칫덩어리였다.
어떻게든 사사건건 파문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지.
‘정확히는 이번 입단 테스트를 감시하려고 온 건가?’
물론, 지금은 파문당해선 안 된다.
유리안에 빙의되었지만, 그가 기존에 가진 무력을 온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세간에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 가문에서 파문당한다면 외부 불만에 대한 억지력이 약해지고 말게 분명하다.
‘원한을 품고 있던 녀석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겠지.’
이 실눈 악역 캐릭터는 몹쓸 짓을 굉장히 많이 했다.
전쟁에서 포로를 고문하는 것은 고사하고, 평민도, 귀족도 황실의 명이라는 미명 하에 수도 없이 죽인 악인이다.
제국 내 유리안에게 복수를 꿈꾸는 자들은 많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인다면…….
‘그 즉시 목을 노리겠지.’
이 바이엘 아카데미만 둘러봐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유리안이야…….”
“그 ‘감은 눈’ 소속의 유리안?”
“왜 여기에 황실의 미친개가 있는 거야?”
“조용히 해! 목소리 낮추고, 눈 마주치지 마!”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학생들.
모두 한결같이 머리 위로 보라색 아지랑이를 띄우고 있었다.
유리안을 본 것만으로도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현재야 공포로 인해 억지력이 작용할 수 있지만, 그 밑에 눌린 감정을 고려하자면 절대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젠장…… 나도 잔뜩 공감해줄 수 있는데.’
나도 저들처럼 유리안 안티팬이 아닌가.
공포는 물론이고, 그 아래 묻힌 부정적인 감정에도 100%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어쩌겠는가, 내가 그 ‘유리안’인걸.
탐탁지 않은 현 상황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곁에 있던 헤란드가 크게 움찔했다.
이쯤 되면 미안할 정도다.
조금이라도 현실을 잊고자 서둘러 입단 테스트가 진행되는 장소로 향하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유리안 님.”
바로 뒤에서 간드러진 목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유리안에게 아는 척을 하다니, 꽤 배짱이 좋네.’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간 큰 인물의 얼굴을 확인했다.
밤바다를 연상하게 만드는 어두운 남색의 머릿결. 그리고 에메랄드를 수놓은 듯한 녹색의 눈동자.
남자라면 한 번쯤은 고개를 돌릴 법한 미모의 여성이었다.
“……아일린?”
아일린 드 도나시엥.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 등장하는 조연 중 하나다.
아드라탄 제국 마탑 소속으로 바이엘 아카데미 정교수를 맡고 있었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제5원소 중, ‘금(金)’ 원소를 5위계까지 다룰 줄 아는 마법의 천재다.
게임에서는 아카데미 스토리에 등장하여 주인공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아일린이 왜 유리안에게 아는 척을?
‘……유리안과 아는 사이였나?’
모른다.
내가 자세히 아는 건 게임의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와 그 주위의 인물들 뿐이다.
아무튼, 상대가 아는 척을 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녀 머리 위에 아지랑이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검은색에 가까운 적색.
‘이 색은…….’
처음 본 감정의 색에 당황하기 잠시.
시간이 지나자 ‘보라색 아지랑이’를 보았을 때처럼 어렴풋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혐오.
공포와는 다른, 벼린 칼 같은 감정이 내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어째서지?’
알 턱이 없다.
아일린이 왜 저런 감정을 품고 있는지.
‘분명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다는 소리인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그 감정이 ‘혐오’라는 거다.
‘적대’보다는 낫긴 해도, 혹시 모를 리스크를 생각하면 그다지 희소식은 아니다.
공포야 적이라고 해도 갑자기 덤벼들지 않겠지만, 적대에 가까운 혐오라면 언제든 무력으로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일린이 적으로 돌변한다면…… 만만치 않겠네.’
‘금(金)원소’를 5위계에 상위 마법사다.
기존의 유리안 능력이라면 단번에 당하진 않겠지만, 현재의 나로는 이길 가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더더욱 틈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
적어도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을 무색하게 생각할 정도로 강한 유리안을 완벽하게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도나시엥 가문의 반쪽짜리, 누가 말을 걸어도 좋다 허락했습니까?”
입에 담고 나서 생각한 거지만.
진짜 이 새끼는 몇 번 죽어도 할 말이 없다.
문제는 그게 나란 거지.
시발.
***
마법사에게도 방계란 평생을 안고 갈 불이익이었다.
마법사는 세대를 거듭하며 체내에 쌓이는 마나의 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연히 이 축복은 직계만이 계승을 할 수 있고, 방계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를 두고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불순물이 섞였다고들 한다.
하지만 실제로 마법 활용 능력에선 큰 차이가 없다.
그저 혈통을 중시하는 마법사 사회에 만연한 차별이자 낡은 관습이었다.
‘개새끼.’
아일린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아까 유리안이 자신을 보고 한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를 부르는 멸칭 ‘도나시엥 가문의 반쪽자리’.
젊은 나이에 금(金)원소 5위계라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도나시엥가의 방계 혈족이라는 이유로 반쪽짜리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피에는 마법과 하등 연관이 없는 평민의 피 절반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아는 척을 했던 게 실수였다.
상위 데몬을 사냥하다가 머리를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부 차 말을 걸었던 건데…….
여전하다 해야 할지 그 천박한 인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싸가지 없고,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만방자함의 극치였다.
‘자기도 나랑 같은 방계면서!’
무엇보다 열받은 건 자신도 똑같은 처지인 주제에 그렇게 말했다는 점이다.
아일린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감은 눈’의 입단 테스트가 진행되는 연병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인 그녀가 굳이 기사만 올 장소에 온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의 일원이자 크라이파트 가문의 방계. ‘웃는 처형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유리안이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흥, 입단 테스트가 함정인지도 모르고.’
아일린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연병장에 모인 희망자들 사이에는 크라이파트 가문과 친분이 깊은 토르소 가문의 차남이 포함되어 있었다.
입단 테스트는 교관에게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입단할 수 있었다.
방식은 예로부터 대련으로 실력을 확인했다.
즉, 교관인 유리안은 입단 테스트를 위해 토르소 가문의 차남과 대련해야만 한다는 소리다.
‘그 과정에서 토르소 가문의 차남이 다친다면 원로회가 가만히 두지 않겠죠.’
이전부터 원로회를 장악하고 있는 크라이파트는 방계이면서도 눈엣가시인 유리안을 파문시킬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번 입단 테스트는 이를 위한 연극에 가까웠다.
아무리 황실의 비호를 받는 유리안이라 하더라도 이번 추궁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원로원에 속한 귀족들이 똘똘 뭉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쉽지 않겠지.
유리안은 어떻게든 이 자리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곧 연병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유리안을 보고 아일리는 조소했다.
근데 그때, 입단 희망자를 쭉 둘러본 유리안이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입단 희망자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하지만, 전부 쓰레기들 뿐이군요.”
순간 술렁이기 시작하는 입단 희망자들과 관중들.
하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알다가도 모를 묘한 분위기에 압도된 것이다.
이를 지켜보면서 아일린은 과거를 회상했다.
저 모습이 이상적으로 보였던 때를 말이다.
아일린이 처음 유리안을 만난 건 바이엘 아카데미 재학 중이었을 때였다.
당시 유리안은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선배였다.
한 학년밖에 차이가 안 나는 데도 방계라는 꼬리표를 단 채 다른 직계의 귀족들보다 빛났으며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전무후무한 검술로 제국의 신예로 금세 떠올랐다.
보통 출신에 절망해 방계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기에 십상인 상황에서 유리안은 특별했다.
특히 ‘방계’ 꼬리표를 떼어내고 인정받고 싶은 아일린에게 더욱 그랬다.
말 그대로 동경했다.
이 사람이라면 ‘방계’를 대표해서 세간의 인식을 바꿔줄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당시 너무 어렸던 아일린은 ‘동경’과 ‘연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을 담아 유리안에게 러브레터를──.
“아아아아악!”
자신의 흑역사를 떠올린 아일린은 머리를 부여잡고 조용히 절규했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기억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겨우 숨을 골라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무튼, 그때 유리안은 지금과 달랐다.
수많은 방계를 대변해주었으면 한다고 여길 정도로 명예를 중시하고, 신중하고, 거기에 실력도 상당한 인재였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유리안은 변절했다.
방계 귀족의 희망에서 황실의 미친개로.
출세를 위해선 어린아이도 죽이는 등, 그야 말로 자신의 명예와 성공을 위해 악명을 점차 쌓아나갔다.
그런 행보에 세간의 평판은 물론, 특히 아일린과 같은 방계 출신 귀족들의 강력한 반감을 사게 되었다.
안 그래도 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유리안의 악명이 더해져 ‘방계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하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차라리 잘 됐어. 이 김에 귀족 직위를 박탈당하는 게 나아.’
최근에 사고가 있었단 얘기에 살짝 걱정되긴 했어도 그뿐이다.
심지어 안 좋은 쪽으로 멀쩡한 걸 확인한 이상, 이번 기회에 더는 설치지 못하게 몰락하길 바랐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으니까.
‘대련하는데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방법? 그런 게 있을 리가…….’
“입단 희망자 여러분…….”
그때였다.
연병장에 고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일린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입을 연 남자,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에게로 향했다.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아십니까?”
그 한마디에 모두가 두려움에 전율했다.
아일린은 그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자신이 너무나도 그를 과소평가했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