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ng as the Perfect Narrow-Eyed Villain RAW novel - Chapter (67)
완벽한 실눈 악역을 연기하다-67화(67/300)
67화. 전화위복(2)
“제가 ‘검은 기사’라면 경은 어찌하실지 물었습니다.”
그 뜻을 다시 한번 강하게 내비치자, 제라르는 도리어 주춤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실한 증거는 없는 모양이다. 기껏해야 지금 입으로 열거한 자신의 추론뿐이겠지.
어딜 사람을 떠봐!
“세 치 혀로 사람에 누명을 씌우는 건 귀족들의 특기죠. 제라르 경.”
한 번 더, 강하게 나가자 제라르는 고개를 살짝 돌려 코웃음을 쳤지만,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보다 확신에 찬 기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휴.’
제라르의 분위기를 살펴본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일전에 있던 테넬론의 경우처럼 이야기가 좋게 흘러갈 것 같지는 않다.
테넬론은 오해였지만, 제라르는 내게 ‘의심’을 품고 있으니까.
‘괜히 붕대를 감았군.’
난 옆구리를 힐끔 쳐다본 뒤, 다시금 제라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황실의 검으로 일하면서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전 아직까지 살아서 황실 전속 기관인 ‘감은 눈’에 속해 있고, 더군다나 그곳의 대표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나는 허리춤에 찬 검집을 살짝 흔들었다.
“혀끝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순 있겠지만, 검 끝엔 확실하게 죽으니까, 말입니다.”
찰그락──!
검과 검집과 부딪히는 소리.
그 금속이 닿는 소리와 함께 내가 미소를 짓자,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낮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제라르 경, 전 귀족의 매끄러운 ‘혀’보다는 확실한 ‘검’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만. 어디 한번 구경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유, 유리안 경……?”
“갑자기 왜 검에 손을…….”
“저 미친놈.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내 행동에 연회에 모인 사람들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고, 이 연회의 주인인 아르바조차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제라르의 입가엔 비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것인지 녀석은 능청스러운 제스처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하, 왜 그렇게 정색하시나, 유리안 경. 지금 떠들썩한 소문인 ‘검은 기사’와 같은 부위를 다쳤다고밖에 하지 않았거늘.”
게임에서나 여기에서나.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그런 제라르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발 물러나야 한다.
여기서 쓸데없는 반박을 해봤자, 제라르가 원하는 이야기로 흘러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유리안이 검은 기사?”
“설마, 그럴 리가.”
본래 ‘유리안’이라면 저런 시선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뽑아 제라르를 베었을 것이다.
휴, 릴렉스. 릴렉스.
‘유리안’, 지금은 참아야 해.
‘우리’가 살려면 우선 ‘고드 리히’가문과 친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인맥은 중요하다!
이번만 조용히 넘어가자.
“그렇군요. 저를 ‘검은 기사’라 ‘오해’하시길래, ‘검’으로 증명하려 했을 뿐, 저도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이것도 귀족 유흥의 일부라네. 조금 더 배워야겠군. 유리안 경. 이런 사교 파티에 자주…….”
주절주절 떠드는 제라르의 말을 끊고 그의 약점 아닌 약점을 슬며시 흘렸다.
“하지만! 그 농담에 진실은 찾아볼 수 없군요. 최근, ‘무명객단’이란 곳에서 ‘검은 기사’를 자칭하지 않았습니까?”
무명객단.
그 이름이 나오자, 제라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찰나, 눈 깜빡할 사이 지나간 변화인지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리안’의 몸을 가진 난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뭐, 안 봐도 뻔한 스토리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내가 이 게임을 몇 번을 했는데.
“제라르 경 정도 되는 분이시라면 ‘무명객단’과 인연도 있을 테니,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설마 모른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후후.”
“……유리안, 너 이 새끼.”
응? 새끼? 분명 그렇게 들은 거 같은데.
주변을 힐끔 보니 나만 들은 듯하여 따지기도 애매했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르게 표정이 굳은 제라르는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내가 그 비천하고 하등한 잡것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말하는 건가?”
제라르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우두커니 서서 날 쳐다보았지만, 내 눈에는 그가 긴장했다는 것이 너무나 확연하게 보였다.
제라르 오클레앙.
그의 게임 속 캐릭터 설정은 단순했다.
‘어마어마한 독점욕을 지닌 남자.’
그 독점욕으로 ‘여명회’에서 서부 지부장을 맡았고, 음지로 눈을 돌려 빈민가의 ‘혈귀단’이 소유한 요정 ‘명월관’도 눈독을 들였다.
그곳을 차지하면 제국 귀족의 숨겨진 비사와 비밀을 이용하여, 그들의 약점을 쥘 수 있으니.
그러나, 귀족인 그가 빈민가에 직접 진출한다는 것은 주위의 시선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 무력이 강한 이들을 차출해, 그곳으로 잠입시켜 무명객단이라는 조직을 만든 거지.’
제국의 기사나 병사였던 정체가 들킬까 두려워 얼굴을 가린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인데, 어느새 그것이 ‘무명객단’의 아이덴티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빈민가는 ‘무명객단’, ‘혈귀단’, ‘여섯 손가락’이 삼등분 하게 되었고, 그들은 ‘혈귀단’과 ‘여섯 손가락’이 공멸하게 지속적으로 견제, 공작하였다.
결국엔 자신의 세력인 무명객단이 음지를 통합지배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왜 그러십니까? 제라르 경? 그저 ‘귀족의 여흥’ 아닙니까?”
내가 살짝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제라르는 작게 혀를 차고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붕대를 감은, 내 허리춤에 향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나밖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하는 제라르.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단 사실이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다.
하긴, 여명회가 ‘검은 기사’를 불쾌히 여기는 지금, 이 사실이 테넬론의 귀에 들어간다면, 제라르의 신변도 위험해질 것이 자명하다.
“후후,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요? 고매하신 제라르 경께서 ‘직접’ 바란 경에게 확인해보시지요.”
분노로 인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라르는 ‘바란’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더불어 주변에선 이곳을 쳐다보고 있던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농담이 불쾌했다면 이렇게 사과하지. 미안하네. 유리안 경.”
더 이상의 언쟁은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제라르는 재빨리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악수를 신청했다.
상황이 안 좋으니, 한 발 빼시겠다?
‘……그래, 이 정도로 끝내자.’
더 큰 소란을 만들 생각은 없다.
유리안이 아무리 ‘웃는 처형대’고 ‘황실의 개’라고 하지만, 여긴 제국 사대가문 중 하나인 고드 리히 가문.
더군다나 지속적인 친분 유지로 내 편으로 끌어 들어야 하는 가문 중 하나이다.
어쩔 수 없이 제라르의 악수를 받아들이려던 순간.
‘큭……!’
옆구리에 용암이 끓는 듯,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려던 찰나 제라르의 웃음이 시선에 들어왔다.
“크큭, 역시 내 손으로 ‘직접’ 확인해보지 않으면 모르겠단 말이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통증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니 ‘뜨인 눈’이 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것보다 먼저 결백을 위해 내 몸은 마나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개XX!!
“듣자 하니, ‘검은 기사’는 핀텔의 마법에 당해 옆구리에 큰 상처가 생겼다고 하더군. 손으로 훑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음?”
내 옆구리를 만지던 제라르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없다니, 설마 그럴……. 컥!”
그런 녀석을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격통에 몸이 움직인 난 녀석의 목을 잡고는 검집에서 뽑은 검을 목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
연회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엘레노아는 목을 붙잡힌 제라르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멍청한 남자 같으니.’
저 독점욕이 강한 남자는 예로부터 장소를 불문한 무례함이 몸에 배어버린 남자다.
비록, 그의 무례함이 여명회나 ‘아크 비숍’에게 향한 적은 없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손한 기운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엘레노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상대를 봐가면서 했어야지.’
그런 제라르의 ‘무례함’이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컥……, 커억.”
연회장은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오직 들리는 것이라곤 풍선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듯한 제라르의 신음뿐.
체격에 비해 우악스럽다는 표현에 걸맞은 유리안의 괴력이라면, 당장이라도 제라르의 목을 비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름의 처세…… 인가?’
유리안이 제라르의 ‘만행’을 간과하고 살려두고 있다는 것은 그가 같은 ‘여명회’의 비숍이란 것을 알아서 일지도 모른다.
엘레노아는 우선 유리안과 제라르를 지켜보기로 했다.
솔직히 그녀 입장에서는 누가 죽거나 다치거나 크게 상관없었기에.
‘둘 다 죽어버리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그녀는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긋이 살펴보았다.
“지,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당장 검을 거두시오!”
“아르바 님이 주최하신 연회를 더럽힐 생각입니까!”
가뜩이나 유리안이 의도적으로 검집을 만지작거리던 모습에 긴장한 귀족들은 기어코 검을 뽑은 유리안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달려들어 중재하는 이들은 없었다. 심지어 ‘고드 리히 가문’의 경비들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유리안의 무력은 악명으로 익히 증명했기에 다가가는 걸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군.’
‘유리안’의 과거 행동으로 보아, 검을 뽑아 든 이상 그에게 덤벼든 자는 끝맺음을 맺어야 하니까.
“검은 기사…….”
이때가 기회이다 싶어, 유리안은 나지막하게 말을 시작했다.
소란의 중심에 있는 자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 불한당과 저를 동일시하던, 말던 전 상관없습니다. 물론 제가 모른다면 말이죠. 하지만!”
“컥…….”
“제가 있는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제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제라르 경?”
유리안이, 제라르의 목을 잡은 팔에 힘을 주자, 가뜩이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그의 안색이 퍼렇게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비틀어버리고 싶지만.’
격통과 불쾌함.
그것 때문에 냉정한 이성을 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라 유리안은 생각했다.
“고, 고작해야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 자네를 비교한 것뿐 아닌가!”
귀족 한 명이 목소리를 높이자, 유리안은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는 명예로운 황실 전속 기관인 ‘감은 눈’의 소속입니다.”
당연하다는 듯, 유리안은 말에 힘을 주어 은근히 그를 압박하였다.
“황실의 율법도 지키지 않는 불한당과 저를 비교하는 것은 황실의 위상에 먹을 칠하는 행위. 그것을 방관하라는 것인지요?”
“그, 그건…….”
“제라르 경도, 저를 도발할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겠지요.”
“…….”
“이런, 이런. 제가 너무 얌전히 지냈나 보군요. 그동안, 제 이명을 잊어버리셨나 봅니다?”
웃는 처형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황실에 거역하면 죽여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그런 생각이 그들 머릿속을 다시금 지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리안은 생각했다.
지금은 제국 신민들을 위해, 귀족을 물리친 영웅, ‘검은 기사’가 아닌.
다시금 실눈 악역, ‘유리안’이 되어야 한다.
“유, 유리안 경……!”
그런 그들 사이로 유약해 보이는 소년이 튀어나왔다.
‘응? 네가 왜 나와?’
연회의 주인공인, 아르바 고드 리히다.
“아르바 도련님, 위험합니다!”
“저 미친…… 큼, 유리안 경이 검을 들고 있습니다. 접근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용인들의 만류에 겁먹은 듯 아르바는 주춤했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유리안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 그만 하세요. 이곳은 저희 고드 리히 가문의 연회장입니다.”
부들거리는 몸이건만, 강단 있게 입을 연 아르바.
그의 행동에 유리안은 실소가 지어졌다. 이 녀석을 이용한다면,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자는 황실 소속인 저를 모욕함으로써 황족들의 명예를 더럽히려고 했습니다.”
조곤조곤하지만, 확고한 유리안의 말투에 그는 더 겁먹은 모습을 보였다.
꼬리를 만 강아지 마냥 보기 안쓰러울 정도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연회장에 모인 모두가 생각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용감하게 나서긴 했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만큼, 아르바는 사대가문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고드 리히의 장남으로서의 기백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르바 경, 그만하면 됐습니다. 경께선 평소 하시던 대로 방관하시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네?”
“고드 리히 가문의 허수아비 장남. 그 이름처럼 말입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엘레노아는 유리안의 표독스러운 말에 살짝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제라르와 무관한 연회의 주역에게 굳이 저런 말을.
“지금 감히 아르바 도련님을 욕보이신 겁니까!?”
엘레노아의 생각대로 아르바를 보필하던 집사와 귀족들이 광분하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너무 오만한 것 아니오! 유리안 경!”
“어서 아르바 도련님에게 사과를…….”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지금 아르바 경과 이야기 중입니다. 아니면 제가 직접 그 입을 직접 닫게 해야겠습니까?”
그러나, 고드 리히의 집사들과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한순간에 입을 닫았다.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아르바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유, 유리안 경, 연회에 참가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더 이상의 행패는 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힘이 실린 아르바의 말투에 유리안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거야.’
벌벌 떨며, 유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확실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떠나라고.
“돌아가십쇼.”
아르바의 말에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은 적잖게 놀랐다.
저 자신감 없는 고드 리히의 장남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다니.
심지어, 상대는 유리안이다.
실눈의 악마, 웃는 처형대.
곧 있을 폭풍에 귀족들은 침을 삼켰다.
“아르바 경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예. 그렇게 하지요.”
긴장감이 연회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과 달리, 유리안은 흔쾌히 그의 말을 따랐다.
털썩.
그가 목을 부여잡던 손을 놓자, 숨을 쉬지 못하던 제라르가 바닥에 추욱 쳐졌다.
“코, 콜록…… 콜록!”
숨통이 트이자, 격렬한 기침과 함께 제라르의 얼굴엔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축하받을 자리에서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아르바 경.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유리안은 아르바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제라르를 위아래로 한 번 훑으며.
“앞으로 제 앞에서 ‘검은 기사’라는 불쾌한 이름을 입에 담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라.르.경.”
경고를 보냈다.
그런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유리안은 연회장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
유리안이 자리를 떠나자,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대, 대단하십니다! 아르바 경.”
“예, 그 유리안을 내쫓으시다니!”
“아르바 경,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이런 연회와 그 미친개는 물과 기름! 절대 섞일 수 없어요!”
연회장에는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번 그들의 화두(話頭)는 아르바 고드 리히였다.
그 유리안을 상대로 나름의 성과를 냈으니 말이다.
“아뇨, 그 저는 아무것도…….”
“그 ‘웃는 처형대’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기백이었습니다!”
“허허, 제 아들이 아르바 경을 본받았으면 좋으련만.”
일련의 사태가 끝난 후.
아르바를 향한 귀족들의 태도는 명확하게 바뀌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르바를 부르는 호칭이다.
인식이라는 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과 연관된 것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도련님에서 경으로 바뀌었네.’
고드 리히 가문의 유약한 장남에서, 차기 가주 후보로.
몇 달은커녕, 몇 년이 걸려도 바뀌지 않을 수 있는 ‘인식’을 유리안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그 ‘인식’을 바꿔주고 만 것이다.
‘설마, 유리안 경께서 여기까지 계산하시고……?’
아르바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유리안을 모멸차게 비웃는 멸칭(蔑稱) 중 하나인 ‘웃는 처형대’.
자신이라면 오히려 비웃는 이들을 향해 검을 들이밀던지, 공을 세워 다른 ‘멸칭’으로 바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했다.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한다…….’
물론 유리안 경의 월광검에서 오는 강한 무력도 아름답지만.
자신에게 없는 그 태연자약(泰然自若)을 아르바는 더 동경했다.
처음 황실에서 만났을 때부터, 데몬의 습격으로 도움을 받을 때까지.
아니, 앞으로도 계속.
누가 뭐라고 해도.
아르바의 우상은 ‘유리안’일 것이다.
***
‘……확실해, 의도된 행동이야.’
같은 ‘비숍’이지만, 무례한 제라르에게 격의 차이를 몸에 새겨주고, 동시에 고드 리히 가문의 차기 장남에게 빚을 만들어두기로.
물론, 본인이 모른다면 허투루 돌아갈 일이었으나.
‘저 유약한 아르바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이니 말이야.’
엘레노아는 아르바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유리안이 사라진 장소로 하염없이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도 유리안이 저지른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엘레노아는 유리안이 사라지기 전, 그와 시선이 교차한 것을 떠올렸다.
지금 이 ‘모습’으로는 처음 보는 것임에도 유리안은 엘레노아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기분 탓이겠지.’
***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고드 리히 가문의 연회장을 떠나, 화장실에 들어간 난 조금 전, 제라르가 움켜 진 상처 부위의 붕대를 천천히 풀어헤쳤다.
그러자, 단단하게 굳은 ‘솜브라’가 상처 부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로 제라르에게 들키진 않았을 테지만…….’
상처의 틈새.
제라르의 손이 다가오기 전, 빛과 같은 속도로 그곳에 ‘솜브라’를 접착시킨 뒤, 굳혀 그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더럽게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마력을 담은 ‘솜브라’는 이질적인 감촉이다. 신경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그런 느낌마저 받았다.
‘후우…….’
긴장을 풀고, 마나의 흐름을 차단하자 ‘솜브라’는 평소처럼 흐물흐물해지더니 형태도 없이 사라졌다.
‘그 어린놈이 눈치 좀 채면 좋을 텐데.’
통증 탓에 빨리 자리를 떠나기 위함이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연기’해줬는데.
‘제라르.’
빌어먹을 면상이 떠오르자, 옆구리 통증이 도져오는 거 같았다.
고개를 들어, 세면대에 배치된 거울을 쳐다보았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실눈이 그곳에 있었다.
평소라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실눈이라고 욕했겠지만, 이번엔 확실히 알았다.
‘아무래도, 넌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