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ng fanatic's genius actors RAW novel - Chapter 127
천재배우 연기에 미치다 128화
방에 들어와 간단히 짐을 풀고 소파에 앉아 함준호 감독이 서울에서 보내온 소포를 정성스럽게 뜯었다.
시나리오 한 묶음과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배우진 님.
최종본 시나리오입니다.
배우진 님은 남파된 간첩 ‘박무정’ 역입니다.
시나리오를 직접 만나서 전해드려야 하는데
여건상 그렇지 못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차후에 좋은 시간 가지길 원합니다.
감독 함준호.」
카드부터 후딱 읽고,
‘폭풍 속으로’ 최종본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배역에 따른 배우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지섭 (설강오) – 국정원 대공 수사 1팀장
무정 (배우진) – 북한 저격 여단 소속
.
.
.
바로 읽어 내려갔다.
*
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달수 공원의 오전.
노인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다.
그 사이로 비둘기 떼가 무리지어 바닥을 쫀다.
특별할 게 없는 공원의 풍경이다.
공원 후문에 택시 한 대가 멈춘다.
남파 간첩 ‘무정’ (배우진)이 내린다.
‘무정’은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주변을 살핀다.
특별히 이상한 낌새는 없다.
안도하며 공중화장실로 들어간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칸 하나하나를 밀며 사람이 없음을 한번 더 확인한다.
그리고 안쪽 두 번째 칸으로 들어간다.
북한 저격 여단 특수부대 소속인 ‘무정’은 남한의 국무총리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작전 수행 중이다.
[제일 먼저 강신우 동무를 만나라우. 그 동무가 뭘 해야 하는지 자세히 가르쳐 줄 기야.]북한을 떠나기 전에 무정이 받은 밀명.
무정은 일본을 경유해 남한으로 들어오자마자, 비밀 사이트에서 ‘강신우’와의 접선 날짜와 장소를 해독했다.
‘무정’이 손목시계를 본다.
11시 정각이 되기 20초 전이다.
저벅저벅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무정’은 마른침을 한번 삼킨다.
똑똑똑 똑똑
똑똑똑 똑똑
“폭풍.”
“번개.”
암호는 정확하다.
‘무정’이 문을 열자,
검은색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지섭’ (설강오)이 문 앞에 서있다.
‘지섭’은 국정원 대공 수사 1팀장으로 대남 간첩 ‘강신우’ 행세를 하고 있다.
‘강신우’는 배신자가 되어 국정원에 정보를 팔아넘겼고, ‘무정’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
“서류는?”
무정이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차 안에 있소.”
“왜 직접 가져오지 않았소?”
“화장실에서 서류를 건넨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요? 차에 서류와 현금이 있으니 나갑시다. 공원 바로 옆에 주차를 시켜 놨소.”
“분명 여기서 직접 전달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무정’은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지섭’을 의심한다.
그때 노인 한 명이 화장실로 들어온다.
노인은 두 사람을 한번 쳐다보더니 소변기에 선다.
‘지섭’이 ‘무정’에게 따라 나오라는 눈치를 준다.
‘무정’이 ‘지섭’을 따라 나간다.
“혼자입니까?”
지섭이 묻는다.
“그런 건 물어보지 않는 게 불문율인데···”
‘무정’의 예감이 더 좋지 않다.
재빨리 공원을 둘러본다.
뭔가 이상하다.
아까는 없었던 솜사탕 수레.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젊은 남자.
조깅을 하고 있는 젊은 여자.
‘포위되었다. 공원 입구가 모두 막혔어.’
함정에 빠진 것을 눈치챈 ‘무정’이 행동에 나서려 할 때,
“가만히 있어.”
‘지섭’의 총구가 ‘무정’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다.
“교도대 지도국 저격 여단 소속 남파 공작원 박무정.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 공원에 우리 사람들이 쫙 깔렸어.”
‘무정’은 눈알만 굴려 주변 상황을 살핀다.
자신에게 겨눠진 총은 총 여덟 개.
화장실에 있던 노인까지도 총을 겨누고 있다.
‘무정’은 뛰어난 감각으로 타이밍을 잡아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공원에 있던 모든 국정원 요원들이 ‘무정’을 추격한다.
그 와중에 ‘무정’은 한 요원의 총을 빼앗아 도로 위로 뛰어든다.
탕!
탕!
여러 차례 총성이 들린다.
시민들이 놀라 고함치고 차들이 멈춘다.
‘무정’이 바짝 따라붙은 ‘지섭’에게 총을 쏘려 하는데,
자전거를 탄 남자아이가 그 앞으로 튀어나온다.
‘무정’은 순간 주춤한다.
놓쳐버린 타이밍.
탕!
‘무정’이 어깨에 총을 맞는다.
어깨가 뒤로 튕겨 나가며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진다.
뒤따라온 국정원 요원들이 ‘무정’에게 달려들어 수갑을 채운다.
“야, 구급차 불러! 어서.”
‘지섭’이 고함친다.
‘무정’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긴다.
*
나는 시나리오를 쉬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전체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재미와 긴장은 배가 되었다.
‘이런 시나리오라면 한국 영화 최대 역작이 나오겠다. 한국에 가기 전에 분석을 다 끝내 야지. 빨리 감독님과 설강오 선배를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시나리오를 읽은 흥분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삐이익~
해일이가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시나리오 읽고 있었어?”
“어. 너무 재밌어. 아주 엄청난 영화가 될 것 같아. 캐릭터 흡입력이 장난 아니고, 사건 진행도 흥미진진해.”
나는 여전히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읽어보고 싶은데.”
“나 몇 번만 더 읽고 그다음에 줄게.”
“알았어. 차에서 대기할 때 읽어보지 뭐.
우진이 네 반응을 보니까 이번 영화도 초대박이겠다.”
해일이가 맞은편 소파에 앉아 들고 온 서류를 펼쳤다.
“싱가포르 일정 짧게 브리핑할게.”
“응.
“일단 첫 일정은 내일 아침 9시 터널 방송국 예능 ‘에브리데이 페스티발’ 녹화야. 거기 피디님 지금 우진이 너 만나러 호텔로 오시는 중이고.”
해일이가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리얼리티 예능이라 사전 미팅하는 모습 카메라에 조금 담고 싶대.”
해일이가 내 표정을 살폈다. 괜찮겠냐는 의미였다.
“좋지. 그런 모습은 언제나 시청자들에게 친근하니까.”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해일이가 서류에 뭔가를 체크해 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
“방송국 버스가 호텔로 와서 픽업을 하고 ‘싱가포르 국제 중학교’로 바로 이동할 거야. 학생들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까지 해서, 1시에 녹화를 마칠 예정이고.
그리고 오후 3시에 ‘플라자 싱가포르’에서 팬 사인회가 있어. 추첨을 통과한 3천3백 명의 팬들을 대상으로 하고, 종료 예상 시간은 오후 7시야. 그런데 아마 더 걸릴 거야. 마음의 준비를 해.”
“그건 왜?”
“싱가포르 팬 사인회 관행이 현장 추첨이래. 그래서 플러스 3백 정도 더 여유를 둬야 한다나. 그러니까 3천3백 명에 3백 명 더해서 3천6백 명인 거지.”
“중국에서 만 명도 넘게 했었는데. 그거에 비하면 뭐.”
“내일모레 오전에는 컨벤션 센터에서 기자 인터뷰하고,
총리 ‘고촉동’의 초대로 의회에 방문해서 싱가포르 명예시민증도 받고···”
일본 중국 홍콩보다 짧은 일정의 싱가포르였지만, 스케줄은 여전히 빽빽했다.
브리핑이 다 끝난 해일이가 서류를 닫고 시간을 체크했다.
“이제 피디님 도착했겠는데. 로비로 내려가자. 차 마시면서 내일 녹화 편하게 얘기하면 된댔어.”
“그래. 산새들이 로비 날아다니는 거 환상이더라. 다시 보고 싶어.
가자.”
***
샹그랄라 라사 센토스 호텔 로비에는 오션 월드라는 커피숍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여전히 산새들이 짹짹거리며 드나들었고, 벽면 대형 수족관에는 관상용 물고기와 거북이, 심지어 상어까지 헤엄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배우진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싱가포르 터널 TV의 예능 피디 울프강 리입니다.]
커피숍에 와 있던 울프강이 내가 들어서자 먼저 인사를 했다. 싱가포르에서는 다들 중국어를 사용했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울프강 말고도 작가와 카메라 감독도 함께였다. 카메라는 이미 우리의 만남을 찍고 있었다.
〖우진 씨의 자연스러운 모습만 카메라에 담겠습니다. 시청자들이 우진 씨가 예능을 준비하는 모습부터 본다면 진심을 느낄 겁니다.〗
〖차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와서 주문을 받았다.
나는 싱가포르 사람들이 즐겨마신다는 마차톤을 시켰다.
녹차라떼와 비슷했는데 부드러운 우유가 듬뿍 있어서 풍미가 더 좋았다.
〖저희 ‘에브리데이 페스티벌’은 학교나 단체를 찾아가 그들의 재치 있는 이야기와 숨겨왔던 장기자랑을 뽐내는 예능입니다. 가끔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면서 소소한 감동을 뽑아내기도 합니다. 정해진 틀은 없으므로 매 화마다 새로운 접근방식을 씁니다.
배우진 씨는 내일 ‘싱가포르 국제 중학교’의 축제를 찾아가 학생들과 함께 즐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학생들은 저희 프로그램이 학교에서 녹화 중인 것은 알지만, 게스트가 배우진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울프강은 프로그램의 취지와 진행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지금 배우진 씨의 인기는 할리우드 배우나 홍콩 배우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엄청납니다. 배우진 씨가 축제에 참석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엄청 좋아할 겁니다.〗
작가는 들뜬 목소리로 ‘에브리데이 페스티벌’이 부담 없는 프로그램임을 알렸다. 혹여 아시아 투어로 지친 내가 프로그램 출연을 취소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저는 학생들 축제를 구경하고 함께 밥만 먹으면 되나요?〗
〖네, 그렇습니다.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우진 씨가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학생들을 만난다. 인생을 조금이라도 먼저 살아온 선배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아이들과 대화하고, 궁금해하는 인생 문제를 묻고 답하는 그런 코너를 넣어 볼 수 있을까요?〗
나의 제안에 피디와 작가의 눈이 커졌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중학생들을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아이들과의 대화를 먼저 제안하다니.
〖저희야 당연히 좋죠. 사실 그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면 하는 안건도 있었는데, 배우진 씨에게 너무 부담이 가지 않을까 해서 선택지에서 배제를 했었습니다.〗
〖아닙니다. 그 시기의 아이들이 얼마나 고민이 많고 힘든지 다 압니다.
아마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니라, 그들의 스타에게서 어떤 말을 듣고 싶을 겁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가 바빠졌다.
콘티북을 이리저리 넘기며 볼펜으로 줄을 긋고 메모를 했다.
긴급하게 내일 녹화 계획을 수정하는 것 같았다.
〖그럼 아이들의 연극이 끝나고 그 무대에 바로 배우진 씨가 서시면 되겠네요.〗
〖아이들이 연극을 하나요? 어떤 연극인가요?〗
〖기특하게도 ‘프린스 앤 플라워’를 각색해서 공연한답니다. 한 달 동안 합숙까지 하면서 연습을 했다더라고요.〗
〖영화를 연극으로 각색하는 게 만만치 않을 텐데···〗
나는 무척 놀랐다. 아이들은 나를 만날 것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무대에 올릴 연극으로 ‘프린스 앤 플라워’를 선택한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내 인기는 찐인 듯했다.
〖그러니까요. 사비를 들여서 무대를 만들고 소품도 준비하고 썬더 인형까지 만들었답니다. 그 유명한 파도 헤치는 장면을 재현할 모양이에요. 뭐 좀 유치하겠지만, 훌륭하지 않습니까?〗
울프강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프린스 앤 플라워’ 연극이 끝나고 학생들이 무대 인사를 할 때, 우진 씨도 같이 무대로 나가 인사하시고. 그리고 학생들과 대화를 이어하고···〗
작가가 내 표정을 살피며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그것보다는 제가 직접 무대에 올라서 연기를 조금 하는 게 어떨까요?
마지막에 ‘준’의 역할의 학생과 바꿔치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피디와 작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범접하기 힘들거라 생각했던 탑배우가 기똥찬 아이디어만 계속 내놓고 있으니.
〖아, 그거면 대박이죠. 아이들이 뒤집어지고 난리가 나겠는데요. 그림이 됩니다.〗
작가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잡히도록 활짝 웃었다.
〖그동안 많은 유명인들을 만나봤지만 우진 씨만큼 소탈하고 작은 일에도 진심인 사람은 처음입니다.
이번 68화 저희들도 최선을 다해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진 씨.〗
울프강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