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ng fanatic's genius actors RAW novel - Chapter 130
천재배우 연기에 미치다 (완결)
집 밥은 정말 최고였다.
한 달 넘게 외국음식만 먹다 엄마가 해주는 한식을 먹으니
몸 안 세포가 살아나 기운이 뻗쳤다.
“잘 먹었습니다.
엄마, 나중에 해일이가 데리러 올 때까지 방에서 좀 쉴게.”
“그래. 한 숨 더 자든 인터넷을 하든 좀 쉬어. 밥은 많이 먹었지?”
“더 먹을 수도 있는데,
다음 작품에서 살찌면 안 되니까 이 정도만 먹을게”
“과일 좀 내갈까?”
“아니. 지금부터 다이어트 시작해.”
나는 지금도 날씬했지만 북한 간첩 ‘무정’을 소화하기 위해 7킬로 정도 더 감량할 생각이었다. 결핍되고 거친 삶을 살아가는 ‘무정’에게 깡마른 근육질 몸에 번뜩이는 눈빛은 필수니까.
생수 하나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낯설었지만, 넓고 쾌적해서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 오면 설기한테 전화한다고 했는데, 지금 해 볼까?’
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언제 전화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금 통화 괜찮아?”
-당연하죠. 녹음 중이었는데 잠시 쉬는 시간이에요.
“홍콩에서 너무 바빠서 너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도 안 나더라. 잘 들어갔었어?”
-저도 그때 너무 정신없어서 선배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요.
“나, 영화 들어가기 전에 조금 한가해.
너랑 데이트할 시간이 충분하단 말이지.”
-전 선배랑 데이트할 시간은 언제나 충분해요.
우리는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홍콩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충분히 읽었기에 더 이상 썸은 필요 없었다.
인연이 이렇게 가까운 줄도 모르고,
전생에서는 설기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인생을 그렇게 끝냈었다.
나로 인해 폴 엔터가 망했고, 설기의 경력도 거기서 끝났을 테고···
내 인생 하나가 결코 나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절감했다. 주변 모두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현생에서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니 주변 사람들의 인생까지 모두 밝아졌다.
물론, 내 인생이 가장 빛나고 있긴 하지만.
***
포루쉐 가이아 127이 청안 종합 영화촬영소를 향해 부드럽게 질주했다. 해일이와 나는 함준호 감독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차가 미끄러진다는 말을 이제 알겠다. 이 차를 타기 전에 나는 그 의미를 정확히 몰랐던 거야.”
“모든 것이 부드러워. 핸들이 직관적으로 반응해. 차 스스로 운전하는 느낌이랄까.”
“역시 이름값을 하네.”
차에 타면서부터 시작된 포루쉐에 대한 감탄이 꼬리를 물었다.
“우진이 네 덕분에 내가 이런 호강을 다 한다.
사실 네가 나한테 매니저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까지만 해도,
네가 이 정도 대스타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상상?
나는 내 인생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나는 ‘해픈’으로 깐에서 상을 받고, 온 유럽과 예술 영화계를 강타할 거야. 그리고 지금 들어갈 작품 ‘폭풍 속으로’는 2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우리나라 역대 흥행작이 될 것이고.
큭큭. 여기까지 상상했는데 입술 사이로 웃음이 배시시 새어 나왔다.
행복한 상상은 조금 더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상상을 더 했다.
소율이 제작 감독을 맡은 ‘영웅정검’으로 미국과 아카데미를 점령하고.
그 뒤 나올 마블 시리즈는 내가 아니면 아마 제작도 못 들어갈걸.
“큭큭큭.”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었다.
“뭐야?”
“아니, 재밌는 상상을 좀 하느라.”
‘그런데 내가 회귀자가 아니었더라도 이 모든 기적이 시작될 수 있었을까.’
나는 회귀가 시작되었던 N타워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해일아, 아까 아빠랑 이사한 집 옥상에 올라갔는데, N타워가 보이더라.”
“오, N타워 전망.”
“거기 가 본지 오래됐다.”
“그러게. 예전에 학교 소풍도 자주 갔었는데 말이지.”
“한번 가보고 싶어. 너랑.”
“그럴까? 평일 폐장시간에는 사람도 많이 없을 걸. 나중에 가 보자.”
“그러자. 가서 서울 야경도 구경하고 달도 구경하고.”
“오케이.”
해일이와 나는 함준호 감독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N타워에 들르기로 했다.
***
1시간을 달려 청안 종합 영화촬영소에 도착했다.
세트 설치가 한창이었다.
현장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함준호 감독이 내가 나타나자 얼른 달려왔다.
“어서 와요. 배우진 씨. 드디어 보게 되네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야, 실물로 보니까 느낌이 살아 있네.”
“저도 감독님 무척 뵙고 싶었습니다.”
영화계의 거장 함준호도 바빴고 나도 바빴다. 영화를 함께 하기로 약속만 한 상태에서 이제야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두 손을 덥석 잡고 마구 흔들었다.
“아시아 투어는 잘 다녀왔어요? 그동안 신문이고 인터넷이고 온통 그 얘기뿐이었어요.”
“네,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감독님, 말씀 놓으십시오. 그래야 제가 편합니다.”
“아, 그럴까?”
“싱가포르에서 감독님께서 보내주신 시나리오를 읽고,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 참느라 혼났습니다.”
“아, 나는 ···우진 씨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대한민국 모든 제작사와 투자사가 달려드는데, 그거 감당하느라 진땀 뺐네.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제작사와 투자사가 있는지도 몰랐어. 허허.”
우리가 인사하는 동안에도 거기 사람들은 바쁘게 세트장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두리번거리며 관심을 보이자,
“지섭과 무정이 함께 지낼 집을 짓고 있는 중이야.”
함 감독이 나를 세트장 안으로 데려갔다.
스태프들이 일하는 중이었는데 함 감독 눈에 어설픈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 이층을 조금만 더 높게는 안 될까? 약간 높이감이 있어야 서로 분리된 느낌이 나거든. 그리고 계단은 좀 가파르게 해줘. 긴장감이 있으면서도 집이 좁아 보이는 효과가 있으니까. 계단은 7개로 하고 폭은 좁게 해요. 배우진 다리가 기니까 계단이 낮으면 어색하게 보여서 안 돼.”
함 감독이 깨알같이 지시를 내렸다.
“난관은 어떻게 할까요? 전부 나무로 할까요?”
“아니, 아니. 1층은 지섭이가 자는 곳이니까 밝은 황토색 나무로 하고 이층은 차갑고 단절된 느낌의 회색 철제 난간이 좋겠어. 둘이 대비가 되어야 하거든. 그러니까 아래쪽은 따뜻한 분위기로 가고 위쪽은 좀 휑한 느낌으로 가자고. 아···그리고 저기 책상에 각휴지 말고 두루마리로 교체해줘. 남자가 사는 곳인데 좀 안 어울려.”
함준호의 꼼꼼한 일 스타일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아직 안면도 트지 않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조금 어색했다.
함 감독이 뻘쭘하게 서있는 나를 보곤,
“아, 이럴 게 아니라 사무실로 가자. 여기 있으면 우진 씨 세워 놓고 계속 일만 할 것 같네.”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우리는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연기학 개론, 촬영의 심리학, 성공하는 시나리오 법칙, 편집의 예술 등 영화와 관련된 책들이 작은 책꽂이에 빼곡히 꽂혀 있었다.
함준호는 내게 앉을자리를 권하고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커피도 있고, 국화차도 있는데. 뭐 마실래?”
“감독님 커피 맛있다고 소문났던데요. 꼭 마셔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소문까지 났나.”
함준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커피를 탔다.
탁자 위에 스토리보드가 놓여 있었다.
“감독님, 여기 스토리보드 좀 봐도 될까요?”
“어, 봐. 어차피 우진이 너랑 얘기하려고 갖다 놓은 거야.”
“네.”
나는 스토리보드를 집어서 표지를 넘겼다.
카메라 구도와 조명, 주 조연 배우의 동선과, 그 동선에 잡히는 소품 하나까지 적혀있었다. 1200원짜리 도루코 커터 칼, 전날 먹었던 육개장 사발면 용기, 비대칭으로 쪼개진 나무젓가락···
‘역시 디테일해.’
“자, 여기 나의 특제 믹스커피.”
함준호는 자신만만하게 커피 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에서 고소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한번 마셔 봐. 기가 막힐 거야.”
나는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마셨다.
“음, 조금 달긴 한데, 뭔가 풍미가 장난 아닌데요. 감독님 커피 맛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무슨 커피예요?”
“나만의 제조법이 있지. 비밀인데 우진이 너니까 특별히 가르쳐준다.
믹스커피에다가 원두커피를 섞는 거야. 단순해 보이지만 비율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나 따라 하지 못해.
···이제 영화 얘기 좀 해 볼까?”
함 감독이 스토리보드 달수 공원 장면을 펼쳤다.
“는 남과 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남파 간첩과 국정원 요원이 신분에서 오는 갈등을 극복하고, 우정으로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야.
달수 공원 총격 씬에서 ‘무정’이 아이 때문에 ‘지섭’에게 총 쏘는 것을 망설이잖아. 그 부분에서 ‘지섭’의 생각이 첫 번째로 흔들려.”
“그 장면 저도 감동 있게 읽기는 했는데.”
나는 내가 분석한 시나리오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어릴 때부터 살인 훈련을 받아 온 ‘무정’이 순간 튀어나온 아이 때문에 적에게 총을 쏘지 못한다는 설정이 관객에게 먹힐까요?”
“시나리오를 잘 파악했네.
사실 그래서 그 장면 사이에 잠깐 플래시백을 넣을 거야.
‘무정’이 북에 두고 온 동생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함 감독이 스토리보드를 넘겼다. 다음 장에는 무정과 동생이 방패연을 날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네, 그런 식이면 관객들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겠네요.”
그 후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에 대한 얘기들을 쏟아냈다.
어느새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대화하니까 시간이 정말 잘 간다. 자리 옮겨서 계속 얘기해도 될까?”
함 감독은 나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지 2차를 제안했다. 평소 같았으면 흔쾌히 오케이 했겠지만 오늘 밤 나는 해일이와 N타워에 가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다.
“다음을 기약해도 될까요? 친구와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 촬영하면서 차차 얘기하지 뭐.
다음 주 토요일 2시에 첫 번째 전체 미팅이 있어.
그때 보자. 매니저에게 연락이 다시 갈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는 사무실에서 나와 해일이에게 갔다.
“함준호 감독님은 어땠어?”
“기대했던 것 이상이야. 감독님이 왜 거장인지 알겠더라.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꼼꼼하셔. 이번 영화 무척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네 표정을 보니까 얼마나 좋았는지 알겠다.
자, 이제 N타워로 가자.”
포루쉐가 밤의 적막을 뚫고 N타워로 출발했다.
***
폐장시간에 맞춰서 N타워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사람이 거의 없어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그땐 두 발로 서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는데.’
나는 전생의 마지막 날 내가 섰던 곳에 섰다.
하늘의 달이 그때처럼 크고 밝았고,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다.
가을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바람이 제법 쌀쌀해졌네. 금방 겨울이 오겠다.”
해일이가 셔츠를 바짝 당겨 몸을 감쌌다.
“해일아, 내가 싱가포르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줬던 악몽 이야기 생각나?”
“응. 생각나. 언제 그런 악몽을 꿨대? 그때 통역해주시는 분한테 얘기 듣고 조금 놀랬어. ···그런데 그건 왜?”
“그 악몽을 끝냈던 곳이 바로 여기 N타워였거든.
그땐 추운 겨울이었고 모든 것을 잃은 난 죽을병에 걸려 있었어.
마지막으로 저 반짝이는 빛들이 보고 싶어, 너한테 여기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었다. 넌 내게 남아있던 유일한 사람이었거든.
넌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나를 감싸 안고, 날 여기로 데려와 줬었어.”
“무슨 꿈이 그렇게 디테일 해?”
“하늘에 밝게 떠있는 둥근달에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는데, 눈을 뜨니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어.
그때부터 난 단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었어.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또 날려 먹을 수는 없잖아.
매일매일 열심히 정진하다 보니 오늘날의 내가 됐어.”
“악몽이 선몽으로 바뀐 거네.”
“응. 인생이란 마음먹기에 달렸더라고. 선몽도 악몽이 될 수 있고, 악몽도 선몽이 될 수 있고.
해일아, 고마워. 그 악몽에서 내 곁에 끝까지 남아줘서.”
“꿈속에서 해 준 일로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쑥스러운 걸.”
“너마저 날 떠났었다면 나에겐 1프로의 희망도 없었을 거야.
고마움의 표시로 내가 그 꿈속에서 봤던 비밀 하나를 얘기해 줄게.”
“악몽에서 비밀까지?”
“그 꿈에서 봤는데,
너 박은하랑 결혼하더라.”
“뭐? 악몽에서 결혼을?”
“악몽은 나한테나 악몽이었던 거고, 그 꿈속에서 너는 행복했어.”
“휴~ 다행이다. 고마워. 그런 엄청난 비밀을 말해줘서. 포루쉐 받았을 때보다 더 좋다.”
“이제 절대로 악몽 따윈 꾸지 않을 거야.”
“너 다음 주부터 촬영 들어가면 악몽 꿀 시간도 없어.
그리고 네가 어떤 꿈을 꾸더라도 난 언제나 네 옆에 있어.”
“그래. 내 옆에 딱 붙어 있어라.”
나는 하늘의 달을 쳐다봤다.
달님,
이번 생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사람이 될지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