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ng fanatic's genius actors RAW novel - Chapter 39
천재배우 연기에 미치다 39화
리딩 날이 금방 다가왔다.
나는 밴 안에서 드라마 대본을 보고 있었다.
준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터라 대본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맡은 ‘하백’은 단순한 무림 고수가 아니었다.
어지러운 상황에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는 인물이었다.
겉으론 사대부 양반가 자손, 속으로는 비밀을 간직한 검의 고수.
드라마 전체 톤과 질감을 설정하는 입체성에 가볍게 접근할 수 없었다.
나는 대본을 받는 순간부터 ‘하백’을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리딩장으로 가는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누나, 여기 ‘이율’ 대사 좀 받아줘. 그냥 국어책 읽듯이 하면 돼.”
현아 누나에게 리딩의 상대역을 부탁했다.
“진짜 나 국어책 읽듯이 그렇게 읽어.”
“어. 그 정도면 돼.”
[나라의 왕이 어찌 백성을 섬길 수가 있느냐. 백성이 왕을 섬기는 게 하늘의 이치인 것을.]나는 하백이 되어 대사를 쳤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없고 나라가 없으면 왕도 없잖습니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연히 섬기는 게 정도가 아니겠습니까?]현아 누나는 딱딱하게 읽었다.
[그것은 섬기는 게 아니라 은혜를 내려 주는 거라 한다. 은혜를 내리는 것과 섬기는 것은 엄연히 하늘과 땅의 차이인 게야.]나는 하백의 마음이 되어보려 애썼다.
[그게 어떻게 다르오. 하늘과 땅은 인간을 똑같이 낳았소. 난 그렇게 믿으려오···]현아 누나와 수십 번을 반복해 읽어봤지만, 썩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인물의 생생함이 살아나지 않아 마음이 답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 번 더 읽어보려 했다.
“누나, 한 번만 더 해보자.”
“아이고 힘들다. 우진아, 더는 못하겠어.
아니 그냥 읽기만 하는 데 이렇게 힘들어? 연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
현아 누나가 대본을 놓으며 머리를 의자에 파묻었다.
“누나. 한 번만 더.”
“우진아, 내가 볼 때 너의 연기는 완벽해.
내가 사극을 정말 좋아하는데 전혀 안 어색해.”
“대사가 입에 짝짝 안 달라붙어.”
“난 전혀 모르겠는데.”
나는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쉬고 다시 해보는 게 어때? 긴장도 풀 겸. 누나도 힘들잖아.”
해일이가 백미러로 우리를 보며 중재했다.
“그래, 너무 그렇게 연습하면 가서는 집중력이 떨어질 수도 있어.”
현아 누나가 내 팔목에 얇은 손목시계를 채우고 톤 다운된 청색 재킷을 입혔다.
“오늘은 선생님들 많이 계실 테니까 얌전하게 입자.”
나는 누나가 꾸며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누나가 제안하는 스타일은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복식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그런데 대사가 제법 많네.”
“주인공 ‘이율’과 ‘하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엮어지거든.
사부님과 하는 대사도 많고. 1회 반이 하백이야.”
“사부? 사부님 역할은 누군데?”
“그게 아마. 임무석 선생님이지. 해일아 맞지?”
“응, 맞아. 임무석.”
“오~ 임무석. 우리 엄마가 진짜 좋아하는 배운데. 젊으실 때 인기 많으셨잖아.
멜로면 멜로, 액션이면 액션, 순박한 농촌 총각부터 부잣집 아들까지 안 맡은 역할이 없고, 못하는 역할도 없었지. 연기 대상도 한두 번 타셨을 걸.”
현아 누나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한 동안 못 본 것 같은데. 이번 작품 진짜 오랜만이다.”
“그 정도 인기에 그 정도 연기했으면, 연기 안 해도 될 만큼 충분히 여유가 있지 않을까? 비슷한 연배 연기자들 사업도 많이 하고, 빌딩 부자거나,
혹은 경치 좋은데 별장 지어 놓고 유유자적하게 사시던데.”
연예계 소식에 박식한 오해일이 말했다.
나는 전생의 기억에서 임무석을 찾아보았지만,
별 내용이 없었다.
인기 배우로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나오다,
어느 날부터 서서히 사라지고, 잊혔다. 정도?
“사인하나 받아가야겠다. 우리 엄마 너무 좋아하실 거야.”
***
MBS 대회의실에 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이 속속 모였다.
“안녕하세요. 배우진입니다.”
배우진이 대회의실에 들어오면서 인사를 크게 했다.
대부분 처음 뵙는 대선배님들이었다.
배우진은 한 분 한 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해일이는 약국에 들러 사온 드링크를 테이블에 한 병씩 올렸다.
“네가 소문의 배우진이구나. 실물 정말 잘생겼다.”
“젊었을 때 딱 나네. 나.”
“ 봤어요. 젊은 배우가 연기가 탄탄해. 연륜까지 느껴지던데.”
“나 어제 우리 딸이랑 봤잖아. 표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야. 허허. 나중에 싸인 한 장 해줘요. 딸이 좋아 할 거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대선배님들이었지만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리딩이 시작되었다.
‘하백’ 배우진과 그의 ‘사부’ 임무석이 대화를 한다.
[사부님. 오셨습니까?]‘뭔가 틀어졌어. 임무석 선생님은 눈치챘겠지?’
배우진은 첫마디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백아. 이율이 보이지 않는구나.]담담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임무석의 목소리.
[아마 또 저잣거리에 갔나 봅니다.]‘톤이 살짝 헛돌았어. 사극 톤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
[어허. 그놈 참. 하백 네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율을 잘 보살펴야 한다. 알겠니?]임무석은 흔들림이 없었다.
[율이도 이제 자기 앞 가름은 충분히 할 나이입니다.]‘조금씩 밀리는 느낌이야.’
배우진은 미묘한 실수를 자각했다.
[바람은 열린 창으로 들어오느니라. 애초에 창을 열어서는 안 될 것이야.] [네. 사부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이화는 터득하였느냐?] [오얏이 떨어지는 늦가을이 와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피디 작가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배우진의 연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의 연기가 무척이나 불만족스러웠다.
“수고하셨습니다. 준비 잘해서 첫 촬영에서 뵙겠습니다.”
이훈 피디의 인사로 리딩이 끝났다.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역시 소문대로 잘하네.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이훈 피디가 배우진에게 다가가 칭찬했다.
배우진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직 ‘하백’이 되기 부족합니다. 연습을 더 해야겠어요.”
“난 전혀 모르겠던데.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아.
그리고 홍 무술감독님이 너랑 민혁이 검술 액션 기대해도 좋단다.
하여튼 출연해줘서 고마워.”
이훈 피디는 계속해서 치켜세웠지만,
배우진은 기분이 찝찝했다.
‘이대로는 안 돼.’
배우진은 임무석 선배님께 다가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배우진입니다.”
“오, 그래. 배우진. 리딩 잘하던데.”
임무석 선배도 배우진을 칭찬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사극 톤을 잡아내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너무 사극 톤으로 해야지 그런 생각 하니까 그런 거야. 편안하게 생각해.”
임무석 선배가 간단한 조언을 했다.
“선생님. 괜찮으시다면, 따로 만나서 리딩 연습을 할 수 있을까요?”
배우진은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을 드렸다.
“따로 리딩 연습을 하자고? 1회 출연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임무석은 살짝 놀랬다.
“1회라 해도, 연기는 진짜여야 하잖아요. 저를 속이고 싶진 않습니다.”
까마득한 후배의 배우려는 자세가 기특해 임무석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 그럼, 그럼, 후배가 배우고 싶다는데 선배로서 도와줘야지. 얼마든지 환영이야.
근데 내가 평소에 시간이 없어서.
혹시 나 있는 곳으로 와 줄 수 있겠나?”
“당연합니다. 선생님.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지. 주소는···”
임무석은 옆에 있는 종이에 주소를 적어서 배우진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
나는 놀이동산 정문 앞에 서있었다.
임무석 선배가 적어준 주소로 찾아왔더니, ‘신나랜드’가 눈앞에 나타났다.
숲 속 한적한 그곳엔 사람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해일아, 여기 맞아?”
마음이 심란했다.
“선생님이 적어주신 주소로는 맞는데···
여기 봐. 여기 적혀 있는 주소랑 같잖아.”
해일이는 놀이동산 안내판에 붙어있는 주소와 임무석 선배가 적어준 주소를 번갈아 봤다.
“놀이동산에서 만나자고 했을 리는 없는데···.”
나는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졌다.
“근데 이 놀이동산 운영하는 거 맞나?”
현아 누나가 매표소 안을 힐끔 쳐다봤다.
그곳은 비어있었다.
놀이동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생명체라곤 나, 오해일, 현아 누나뿐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와 시원한 바람 정도가 존재했다.
“내가 임무석 선생님께 전화해 볼게.”
나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은 들렸지만 받지는 않았다.
“아, 전화를 안 받으시는데. 아직 9시 50분이니까. 10시까지 일단 기다려보자.”
해일이와 현아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놀이동산 안을 바라보고,
정문 앞에 섰다.
“혹시, 선생님이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계실까 봐 그게 걱정이야.”
“나도.”
“맞아.”
우리는 초조하게 임무석 선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놀이동산 안쪽 저 길 끝에서 낯선 형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지?
그것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어, 어 저게 뭐야?”
“복슬복슬 한 대.”
“앗~ 양이다.”
털이 수북한 양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맹렬히 달려왔다.
아무도 없는 놀이동산에 뜬금없는 양이라니.
우리는 당황스러워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자, 잡아. 잡아.”
양 뒤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아저씨가 양을 뒤따라오며 ‘잡아’라고 외쳤다.
작업복에 긴 장화,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아저씨의 달리기는 팔팔한 양을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양과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졌다.
“잡아. 어서. 헉헉”
아저씨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이 많이 찬 것 같았다.
우리는 일단 양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일아, 저기 양 앞을 막아.”
“알았어.”
“누나는 정문을 지켜. 문 밖으로 나가면 진짜 곤란해질 거야.”
“응, 알았어.”
우리는 순식간에 양 잡기에 돌입하고 각자 포지션에 섰다.
양은 앞이 막히자 정문 쪽으로 틀었다,
그곳도 막히자 내가 지키고 선 곳으로 왔다.
“좋았어.”
나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양의 털을 움켜잡았다.
양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털이 푹신해서 잡고 있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해일이와 현아 누나가 재빨리 와서 나를 도왔다.
우리 셋이 힘을 합쳐 제압하니,
양은 저항을 포기하고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었다.
“잡았다.”
“오, 우리가 잡았어.”
“녀석, 순한데 왜 도망을 쳤어?”
“아까 뒤쫓던 아저씨는 어디 계시지?”
우리가 양을 잡은 것을 보고는,
아저씨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젊은 사람들이라 역시 다르네. 어~ 고마워.”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 그 녀석 오늘 털 깎는 날인데, 도망을 갔지 뭐야?
저번에도 그래서 얼마나 혼쭐이 났는데. 허허.”
아저씨는 밀짚모자를 벗고 우리 앞에 섰다.
환한 미소가 낯익었다.
“서··· 선생님?”
“선생님??”
“임무석 선생님?”
아저씨는 임무석 선생님이었다.
“아니, 어떻게? 선생님께서?”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어이. 왔어. 어서 와. 때마침 잘 왔네. 양 잡아줘서 고마워.”
임무석이 양을 쓰다듬으며 활짝 웃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