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11
11. 팀 최도윤(1)
드라마, 영화 등 보통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콘텐츠 시장의 논리는 간단하다.
그래서, 잘 팔릴 것 같은가?
이 논리에 부합하는 작품에 비로소 원활한 제작이 가능한 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된다.
유명 PD.
스타 작가.
빵빵한 스폰서.
그 외 기타 등등.
물론 이러지 않아도 종종 상당한 제작비를 투입하는 특이한 작품도 있지만.
팀의 경우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미치겠네, 정말. 예상은 했지만…….’
배우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시대.
그래서 의 연출, 백제운 PD의 고심은 깊어졌다.
다른 드라마에 비하면 쥐꼬리만 한 제작비 편성.
한번 윗선에 밉보여 밑바닥을 찍었던 대가는 꽤 컸고, 케이블 방송사 xvN으로 이적한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한 환경에서 일하게 됐다.
물론 xvN에서도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드라마는 많다.
하지만 그건 거액을 주고 모신 PD들한테나 허락되는 일.
어디 한번 해보라며 간신히 기회를 얻은 제운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심지어 같이하게 된 작가는 신인.
드라마 바닥에선 PD 이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작가가 신인인 건 곤란한 일인 셈.
‘에휴, 그래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제운은 맞은편에서 열심히 대본을 들여다보고 캐스팅 목록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살피는 전아름 작가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제작비 부족으로 메인 작가가 둘로 나누어지는 일은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는 공모전 당선작.
그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신인 작가에 메인 작가 하나가 더 붙는 게 정상이나, 제작비 부족으로 보조 작가만 두 명 더 늘었다.
‘차라리 다행이지.’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신인 작가랍시고 높으신 분들이 메인 한 명을 더 붙여주면 둘 사이에서 줄타기하느라 머리가 분명 터졌을 것이다.
그래도 아름의 실력이나 열의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니, 오히려 좋다.
대본은 신인 작가답게 통통 튀었고, 그 장르가 오피스 드라마라 생소할지언정 퀄리티는 의심할 수 없이 좋았으니까.
유일하게 부족한 건-
명성?
‘그리고 그나마 다행인 건…….’
주연 배우가 확정되었다는 것.
커리어도 별로고, 연기력도 썩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지만 유명 아이돌 그룹의 리더라는 점에서 화제성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애초에 이 바닥이 화제성 싸움이 아닌가.
다만 아직 캐스팅 엄두도 못 내고 있는 몇 개의 배역들이 문제.
“저, PD님. 혹시 ‘강영준 대리’ 배역 말이에요, 이 배우는 어떨까요?”
제운은 열정 가득한 얼굴로 물어오는 아름을 보며 웃었다.
그래,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무참히 쓰러졌지만.
“어디 보자고.”
그렇다고 당장 저 열의를 꺾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배우의 이름을 본 순간.
‘최도윤이잖아.’
제운은 저 열의를 꺾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 배우는 안 돼.”
“네?”
단호한 거절에 아름이 당황한 것도 잠시.
“다른 쪽에서 이미 캐스팅 제안 들어갔다고 들었어.”
다른 쪽.
어딘지 말하진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말이 지닌 의미는 간단하다.
다른 그 어떤 드라마도 우리보다 제작 사정이 좋다.
그러니 우리는 안 된다.
“그래도 한 번 의사는 타진해 보는 게 어떨까요? 2주 전에 대본 보냈으니까, 지금쯤이면 보지 않았을까 싶은데…….”
제운은 그 배우가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려다 그만뒀다.
이 바닥 소문은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스타 PD와 스타 작가가 조연 한 명을 주목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그렇기에 아름도 곧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저 표정을 더 시무룩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전 작가. 힘들 거야.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 찾아보자. 이따 ‘사과엑터스’랑 미팅이니까 거기서 좀 더 타진해 보면 될 거야.”
“히잉. 아쉬운데……. 저 진짜 팬이거든요. 거기서 최도윤 배우 연기 보고 대박 반했는데. 완전 제 스타일.”
“후, 나도 최도윤 데려오고 싶더라.”
요새 슬슬 주목받는 신인을 자신도 왜 모르겠는가.
아쉽지만 어쩌겠어.
침 발라놓은 배우는 꼬시면 욕이나 먹지.
“그래도 힘 내보자고.”
“최도윤 배우 캐스팅이요?”
“아니. 다른 배우 캐스팅. 전 작가 처녀작…… 아니, 첫작이잖아. 미안. 요새 이런 말 안 쓰지? 내가 옛날 사람이라.”
“전 PD님이 제가 본 PD님들 중에서 제일 멋있는걸요.”
“내가 처음으로 만난 PD라서 그런 건 아니고?”
“앗, 들켰다. 히히.”
제운은 아름의 모습에 피식거렸다.
그래도 저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니 힘이 난다.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그의 경력 15년.
맡은 작품은 그래도 시청률 중박은 처내고 대박 작품도 하나 찍은 경험이 있다.
‘안 되면 되게.’
철 지난 구호를 속으로 외치던 그때였다.
지이이이잉-!
회의실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몸을 떨며 진동을 토해냈다.
제운의 것이다.
“전화 왔네요?”
제운은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들었다가-
“어?”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반문하고 말았다.
“누군데요?”
아름의 물음에 제운은 휴대폰 화면을 천천히 아름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아름은.
“헙.”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수철 팀장님(이엔 엔터)]* * *
수철은 결국 설득을 포기했다.
그러니 이상하게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애초에 고집 센 놈이었지.
이제 뒷수습만 하면 끝일 거야.
“우린 끝났어.”
덕분에 이엔 엔터 사무실엔 한 마리 절망한 좀비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배우 하나가 미쳤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리고 그 배우는 지금 성호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수철과 함께 제작사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도윤아. 여기서 좌회전하면 되거든? 눈 딱 감고 좌회전하면, 네 배우 인생 펴는 거야. 응?”
출고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직 따끈따끈한 카니발 리무진은 지금 사거리에 서 있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의 제작사 ‘스튜디오로즈’가 나오고, 직진하면 의 제작사 ‘더블팩토리’가 나온다.
“팀장님, 이만 포기하세요.”
도윤의 웃음에 희망마저 날아간다.
그래, 어차피 못 할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황 PD에게 회신한 시점에서 주사위는 이미 손을 떠났다.
부우우웅.
신호가 바뀌자 카니발은 서서히 속도를 올렸고, 차선 변경 없이 깔끔하게 직진하며 결국 더블팩토리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예, PD님. 이수철입니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세 사람은 더블팩토리 사무실로 발을 디뎠다.
수철은 지옥문으로 가는 길이 이런 건가 싶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연출을 맡은 PD 백제운입니다. 여기는 저희 전아름 작가.”
“안녕하세요! 작가 전아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풍파에 찌들어 보이지만 열정을 간직한 PD.
보는 그대로 생기발랄한 신인 작가.
둘의 조합이 어떤 시너지를 낳을지 짐작하기 어려운 가운데-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배우 최도윤입니다.”
도윤의 속내 역시 짐작이 어려워 보였다.
그나마 신기한 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높은 곳’에서 제작사를 내려다본다는 것 정도?
보통은 제작사를 찾아가 제발 배역 하나만 달라고 읍소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은 상황이 반전되었으니.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해보자.’
스튜디오로즈의 황 PD 쪽은 대표 동민이 어떻게든 해결한다고 했으니, 나는 지금 하던 대로 배우를 전력으로 서포트하면 된다.
수철은 마음을 다잡고 사전 미팅에 들어갔으며.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오늘 더블팩토리에 온 목적인 ‘지정연기’ 시간이 되었다.
도윤의 배역은 조연이지만 주연 못지않은 비중을 자랑하는 ‘강영준 대리’.
도윤이 회귀 전 에서 맡은 배역과 다른 배역이다.
사실 이건 요식행위다.
가 캐스팅에 난항을 겪는 건 업계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신인이라도 황 PD쯤 되는 사람이 눈독 들이던 배우가 여기 왔는데 깐깐한 자세로 ‘평가’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도윤의 연기력이 최악이라면 떨어지겠지만…….
그럴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형 눈빛 또 달라지네.’
하지만 도윤은 무척 진지해 보인다.
‘시작부터 휘어잡아야지.’
도윤은 지금 이 상황에서 사실상 캐스팅이 확정되었다고 해도 자신의 연기에 최선을 다할 작정.
그게 배우의 자세니까.
그래서 도윤은 마지막으로 대본을 한번 살핀 뒤 자신이 지원할 배역이자, ‘강영준 대리’의 감정 속으로 몰입하며 오디션장으로 들어섰고.
‘볼 것도 없겠지.’
‘당연히 오케이죠!’
백제운 PD.
전아름 작가.
시작하기도 전에 박수를 칠 준비부터 하고 있던 두 사람을-
“신민재 씨. 여기는 회사입니다. 백 마디 변명보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죠.”
시작부터 경악에 빠뜨렸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에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죠. 그러니까 중요한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하는 겁니다.”
차가운 비주얼에 더없이 어울리는 얼음 같은 대사.
폐부를 깊숙이 찔러 숨이 턱턱 막히는 분위기.
그리고 이어진 다음 대사는 마치 둘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아들었습니까?”
내 ‘연기’를 알아들었냐고.
* * *
는 오피스 드라마다.
중견기업이라 하기엔 규모가 조금 작은 중소기업에 입사한 한 신입사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른바 ‘현실감 넘치는’ 드라마.
작가 아름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고, 갑질, 꼰대, 비정규직 등 최근 한국의 주요 이슈들을 반영한 드라마.
그래서 제목도 다.
당신은 .
이 세상이 당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무섭고, 잔인하고, 편협하며, 아름답지 못한 곳인지.
도윤이 맡은 배역 ‘강영준’은 그런 드라마에서도 한때 열정을 품었으나 이제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배역이다.
그러나 주인공이자 신입사원 ‘신민재’에게 서서히 감화되어 잊었던 꿈을 품고 변화하는 역할.
지금 도윤이 펼친 연기는 이제 막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민재’에게 시스템의 불합리함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장면.
더없이 차갑고.
‘무섭다.’
마치 정말 사수 앞에 선 신입사원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PD 제운은 드라마제작국에 처음으로 입사한 날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아름도 다르지 않았다.
끈적하게 내려앉다 날카롭게 꽂히는 대사에 이 드라마를 쓰게 된 계기인 과거의 직장생활을 떠올렸다.
‘진짜…… 장난 아니잖아?’
아름은 신인이다.
그래서 많은 배우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궁금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배우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이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까?
“신민재 씨. 회사의 시스템을 따르세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뒤에서 욕이야 조금 하겠지만, 앞에서 욕을 먹는 것보다는 낫겠죠. 안 그렇습니까?”
싸늘하고 칼 같은 조언.
아니, 저건 조언이라 하기엔 너무도 무심하다.
마치 너 하나 없어도 아무런 문제 없다는 태도.
그래서 아름은 하마터면 울컥할 뻔했다.
저 ‘강영준’이란 배역의 모티프가 된 자신의 전 직장 상사가 떠올라서.
‘개새끼.’
물론 그 직장 상사와 도윤의 비주얼엔 수성과 해왕성의 거리만큼이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
저 정도 비주얼이었으면 더럽고 치사해도 좀 더 참고 다녔을 거야.
아름이 실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도윤의 지정연기는 계속 이어졌고.
“회사는 당신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해도 될까 싶으면 하지 마시고, 해야 하나 싶으면 하세요. 아니, 당신이 느끼는 어떤 궁금함을 잠시 잊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나서지 마세요. 괜한 오해 받기 싫으면.”
열정적이고 의욕 넘치는 신입사원을 향해 꽂히는 촌철살인의 대사가 오디션장을 부유했다.
마치 안개처럼 뿌옇게.
과연 저 배우가 에서 악역인 척하는 허당 재벌 3세로 코믹 연기를 선보인 최도윤이 맞을까.
그때는 저 차가운 인상과 배역 사이의 ‘갭 차이’로 인해 매력적이던 모습은 지금 이 순간 맞춤 정장처럼 꼭 맞는 옷이 된 것 같았고.
도윤의 대사로 이뤄진 안개가 눈앞을 진하게 가릴 무렵.
짝, 짝, 짝, 짝.
드디어 지정연기가 끝남과 동시에 박수와 감탄이 터져 나왔다.
“너무 완벽한데요.”
행복해 보이는 PD 제운의 함박웃음.
“저…… 오늘 악몽 꿀 것 같아요.”
순간 겁에 질렸다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작가 아름.
‘진짜…… 이거 하려는 이유가 있던 건가?’
수철의 묘한 흥분까지.
“역시 도윤이 형이야. 그쵸, 팀장님?”
여기에 성호의 감탄이 화룡점정을 찍으며-
[‘괴물 신인’ 최도윤, 드라마 합류!] [백 PD, “완벽한 캐스팅이 될 것” 극찬]도윤의 합류가 전격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