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131
131. 바로 시작하죠
도윤은 공항을 나선 순간부터 즐겼다.
미국의 공기.
사람들의 모습.
기나긴 고속도로.
공부한 것과는 조금 다른 영어 억양과-
그 외 모든 것들까지.
“일단 로스엔젤레스에 온 이상 딱 한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샌타바버라, 샌디에이고 등지에 있는 카지노입니다. 요새 한국인들이 꽤 많이 간다고 하더군요. 도윤, 혹시 라스베이거스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도박에는 관심 없습니다.”
사실 도박은.
회귀 직전,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 것으로 충분했다.
그걸 도박이라 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몸을 날렸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도박이겠지.
“여하튼 미국은 모든 게 가능합니다. 비자를 받은 외국인이니 제한되는 게 있겠지만,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가능한 일이 꽤 됩니다. 그러니 조심하세요. 정말 순수한 의도를 지니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 외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는 게 좋습니다.”
낙천적으로 보이는 성격과 달리.
빌은 도윤이 조심해야 할 많은 상황들을 가정하며 충고했다.
도윤은 그 충고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고, 아무리 미국에 대해 공부해도 피부로 와닿는 것과는 전혀 다를 테니까.
이런 한편.
“네, 그럴게요. 그럼 호텔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민주는 차에 탄 시점부터 누군가와 계속 통화 중이다가 이제야 전화를 마친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라 신경은 쓰지 않았는데, 도윤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미국에 아는 사람 있어?”
“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요.”
영어로 대화하는 걸 보면.
미국인인 것 같은데.
“마음은 놓이겠네.”
“마음이 놓이긴요. 그쪽에서 머물 것도 아닌데.”
뭐, 민주니까.
“일단 호텔에 이동해서 짐을 풀고, 약 10시간 후에 미팅을 위해 이동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스타일링을 위해 잠시 들를 곳이 있습니다. 레이첼, 예약 마쳤다고 했었지?”
“아직요.”
“뭐어? 아직이라고?”
“말했잖아요. 거기는 예약 잡기 힘들다고. 댄 리츠라면 모를까.”
순간 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댄 리츠.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배우다.
때문에 저 말은, 월드스타급이 아니라면 예약이 힘들다는 것.
물론, 레이첼이 도윤을 무시하려는 의도로 말한 건 아니다.
때문에 빌은 다른 쪽에서 자극을 받았다.
“이 빌 테일러의 이름을 댔는데도 안 됐다 이거지. 이거, 말이 다른데?”
아시아에서 온 한 배우에게 내줄 자리는 없다는 인종차별적인 의미일까.
그도 아니면, 단순히 명성의 문제일까.
뭐가 됐든.
“어차피 2안으로 진행할 예정이니 걱정 마세요.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빌은 일단 불쾌하지만 참아주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그때였다.
“스타일링은 저희 쪽에서 해도 괜찮을까요?”
민주의 입이 열렸고.
“방금 통화가 그 건이었거든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론 데이브 스튜디오’. 그쪽으로 방금 잡아뒀어요. 언제든 와도 된다고 하네요.”
빌은 민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론 데이브 스튜디오’라는 말에 경악했다.
“로, 론 데이브 스튜디오라면…….”
분명히.
방금까지 빌이 예약이 안 되어 분노하게 만든 메이크업 스튜디오보다 더 유명한 곳.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어려 보이는 여자가 전화 한 통으로 예약을 잡았다고 한다.
그것도, 시각을 정한 게 아니라 ‘아무때나’ 오라는 예약을.
빌이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사실이라면, 이 차에 대단한 사람이 한 명 더 탄 셈이네요.”
레이첼이 빌의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런 민주의 모습에 성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도윤은 조금 놀랐지만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한 명.
“민주 너 미국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었지?”
“어. 예전에 알고 지냈던 언니. 지금 거기 스튜디오에서 일한다고 해서 연락했더니 오라고 하더라.”
“잘됐네. 역시 민주라니까.”
두칠의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까지.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한데.’
덕분에 지금까지 도윤 딱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빌의 시선이 묘하게 분산되기 시작했다.
덩치는 산만 한데 어딘가 잽싼 한 남자.
굉장히 힙하게 입은 한 여자.
마지막으로, 헐리우드의 마초 스타들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체구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지닌 남자.
그리고 그 셋에게 둘러싸인.
이 최도윤이라는 배우.
뭔가…….
배우만 보고 데려왔는데.
다른 흥미로운 셋까지 딸려온 이 느낌.
“흐음…… 범상치 않군요.”
빌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씩 웃었다.
‘론 데이브 스튜디오라…….’
자신은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스튜디오라니.
이거.
아무래도 시작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 * *
“역시 미국은 미국이네요. 캬, 최고급 호텔!”
“한국이랑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누나는 진짜 감상 망치는 데 뭐 있다니까요.”
“민주랑 2년 정도 같이했으면 성호도 익숙해질 때 안 됐나?”
“아직도 오빠한테 주기적으로 개기는 앤데 뭘.”
“그래도 뭐, 좋은 방이네.”
성호, 민주, 두칠이 차례로 호텔방에 대한 감상을 쏟아내는 사이.
도윤은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 젖은 머리를 말리는 한편.
성호가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대본의 대사를 눈에 담아두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거의 강박증처럼 대본을 살피고 있었지만.
사실 도윤도 안다.
이쯤 하면 충분하다는 걸.
하지만 한국에서도 계속 이런 식이었다.
미국에 왔다는 이유로 도윤의 습관이 특별히 달라지진 않는 셈.
그러면서 최근 몇 달 사이 열심히 해둔 영어 공부까지 복기하고 있었으니.
“형, 쉬엄쉬엄하세요.”
“오냐.”
때문에 도윤은 으레 들려오는 성호의 잔소리에 간단히 답하고 머리를 대충 말린 뒤 침대에 몸을 누었다.
그리고 다시 대본에 집중하나 싶더니.
스르르, 잠이 든다.
“와, 기절했네.”
“피곤했겠지. 오빠 좌석에서도 많이 안 잤거든.”
“저 정도면 거의 의식을 잃은 수준인데.”
세 사람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도윤이 잠든 모습을 바라봤고.
살금살금, 성호만이 다가와 이불을 덮어준 뒤 조용히 방을 나섰다.
철컥.
방이 닫히고.
피곤함에 저도 모르게 잠든 도윤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 * *
HBU 신규 드라마, .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그려낸 이야기.
그 의 총감독이자 지금까지 여러 작품에서 나름의 성과를 낸 크리스 쿠퍼.
그의 심기는 현재 썩 좋지 않았다.
‘빌 테일러라고 했지. 좀 다른 프로듀서라고 하더니만…… 별로 다를 건 없어 보이는군.’
크리스는 스스로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온 이름도 모를 배우를 위해 자신이 내줄 시간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당장 미팅이 산더미다.
주연 리엄 네슬리부터-
이번 캐스팅의 하이라이트이자 주목받는 신인 안드레아 로드리게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 미국을 휩쓴 배우 사미르 펀스까지.
그리고 제작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오늘을 위해 무려 다섯 시간을 비운 크리스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과연-
어떤 녀석인지 한번 보자고.
어차피 가장 거슬리는 프로듀서가 자리에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 미팅은 총감독과 배우의 1 대 1 미팅이다.
아.
‘통역도 있겠지.’
영어를 괜찮게 한다고 들었는데.
그래 봤자지.
크리스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눌한 억양은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촬영하는 데 매번 통역에만 의존하면, 그건 그것대로 나름의 핑계가 될 수 있다.
본촬영에 들어가기 전, 지금 자신을 기다리게 만드는 아시아 배우를 홀대할 수 있는 중요한 핑계.
‘한국인 유학생 출신에 총기류, 그러니까 자동화기류를 잘 다루고 기계에 뛰어나다…… 이거 원. 듣도 보도 못한 설정인데.’
여하튼 크리스는 지금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에-더 중요한 미팅들을 미루고 이 자리에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 이름도 모를 아시아 배우가 의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는다는 사실까지.
어찌 됐든.
기다려볼 일이다.
그러는 사이.
“크리스, 지금 그 ‘도윤’이라는 배우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스태프 한 명이 크리스에게 도윤의 도착을 알려왔고, 크리스는 고개를 까닥였다.
곧.
문이 열리고.
“최도윤입니다.”
훤칠한 키에 나름대로 체격이 나쁘지 않은 동양인 배우 한 명이 들어서더니 상당히 나쁘지 않은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며.
스윽.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는 베테랑답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악수했다.
“크리스 쿠퍼입니다. 의 총감독을 맡고 있죠. 테일러 씨에게 제 이야기를 들었겠죠?”
“네, 만족시키기 쉽지 않을 거라더군요.”
그 말에 크리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또 다른 건요?”
“저라면 충분히 쿠퍼 씨를 만족시킬 수 있을 거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크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이거 봐라?’
저 말도 말이지만-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대담함과.
막힘 없는 영어가 나름 인상적이다.
하지만.
오늘 크리스가 원하는 건, 지금 이렇게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 이 아시아 배우가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
그래야.
이 화가 풀릴 테니.
“좋습니다. 그럼 서로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는 셈이니, 질질 끌지 말고 본론부터 들어갈까요?”
“원하던 일입니다.”
도윤은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크리스와 마주 앉았고.
자신의 자리에 놓인 새 대본을 바라봤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 혹시 이야기를 못 들었을 수도 있으니 지금 알려드리죠. 죄송하지만, 거기 있는 대본에서 기존 대사들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시간을 드릴 테니 한번 살펴보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뻔히 보이는 속에 도윤은 피식거렸다.
크리스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죠?”
“아뇨. 재미있어서요. 테일러 씨에게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러자.
크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낸다.
“아, 그거라면 미리 알아둬야 할 게 있습니다. 이곳은 프로듀서의 권한이 꽤 세다지만, 저 정도 되는 감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쉽게 말해.
기선제압이다.
분명히 여기 오기까지 대사를 달달 외워왔을 테니.
한번 당황해 보라는 뜻.
“대사 몇 줄 정도야 제 임의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
“아뇨. 그걸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도윤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냥,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
크리스의 미간 간격이 서서히 줄어드는 가운데.
도윤은 대본을 펼쳤다.
사락, 사락.
그리고 5분이 채 지났을까.
총 15개에 달하는 변경된 대사를 모두 훑어보더니.
“다 됐습니다.”
“네?”
“바로 시작하죠. ‘오디션’ 말입니다.”
오히려 크리스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도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