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167
167. 초대해 줘요
“으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아아아아악!”
마트 안쪽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그 비명을 듣는 ‘가즈’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모른다.
그러다.
한 명의 생존자가 간신히 죽은 자들을 피해 마트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철컥. 탕!
가차 없이.
무표정하게 그를 쏴 죽인다.
나를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
이 세상에서.
‘가즈’라는 캐릭터가 내세우는 방식.
그리고 ‘가즈’를 따르던 주변의 부하들은 숱하게 봐 온 장면임에도 그의 차가움에 몸을 떤다.
이어서.
방금 막 죽은 이를 쫓아 나온 죽은 자들이 그의 몸을 먹어치우기 시작했기 때문.
당연히 연기고.
저기 죽은 자들로 분장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는 배우를 둘러싼 것뿐이었지만.
그랜트의 연기 때문일까.
카메라 구도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조차 소름이 돋는 게 뭔지 느낄 지경이다.
도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배경에 스며든다는 게…….
저런 말이었구나.
그야말로.
녹아든다.
완벽하게.
“역시.”
도윤이 이 정돈데.
크리스는 말할 필요도 없다.
크리스는 저 그랜트를 섭외해 온 빌이 바로 옆자리에 있었다면.
분명히 붙잡고 키스를 퍼부었을 것이다.
보이니까.
시즌2 역시.
대박이 나는 광경이.
“이제 돌입한다. 모두 물리거나 긁히는 거 조심하고, 우리 외 움직이는 모든 건 모조리 쏴 버려.”
이런 가운데 ‘가즈’는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마트 밖부터 죽은 자들을 깔끔하고 빠르게 처리하며 진입하기 시작했다.
탕, 타타탕!
그리고 마트 안이 정리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으며.
‘가즈’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전리품,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 생존자들의 것이었던 물건들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또 살아남았군.”
‘가즈’의 시그니처 대사.
우리는 또 살아남았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가즈’는.
지금 연기를 지켜보는 도윤이 맡은 배역, ‘강석’과 대립하게 된다.
그걸 상상하자.
도윤은 마치 자신이 ‘강석’이 되기라도 한 듯 몸이 떨릴 지경이다.
‘할 수 있어.’
하지만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지금만큼은.
몰입해서 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저기 있는 그랜트에게 압도당한 나머지-
그 앞에서 제대로 연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얼마 만에 받는 느낌일까.
오히려 한편으로는 흥분된다.
역시.
연기의 세계는 넓고.
아직 자신은 모르는 게 너무도 많다.
도윤은 그런 생각 속에서 눈빛을 불태우며 그랜트, 아니 ‘가즈’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을 기세로.
* * *
노래에는 ‘카피’라는 게 존재한다.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특징 등을 말 그대로 ‘카피’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는 건데-
연기도 마찬가지다.
카피는 연기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이며-
아직 자신의 색을 찾지 못한 배우들이 여러 연기를 카피해 나가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도윤도 그렇다.
도윤은 색채가 뚜렷하진 않은 배우다.
왜냐하면.
모든 색을 확실하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니까.
그 이유는 바로-
도윤의 지독하리만치 반복되는 노력과.
회귀 전부터 연기를 위해 쌓아왔던 경험 덕이다.
그래서 도윤은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저번에 호텔방에 처박혔던 것처럼.
그랜트가 출연한 모든 작품들을 분석하고.
이번에는 그의 ‘연기’를 카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석양이 왜 지는 줄 아나? 바로 너 같은 악당의 마지막을 비추기 위해서지.]지금 기준으로 읊는 것조차 다소 오글거리는 대화들이 몇 포함되어 있었지만…….
도윤은 오히려 즐기기까지 한다.
그랜트의 모든 것들을 흡수할 기세로.
물론.
‘그랜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모방이 될 테니까.
[3초를 주지. 그 안에 항복하지 않으면 넌 모르는 사이에 죽을 것이다.]서부극의 향기 가득한 대사의 향연 속.
“3초를 주지…… 그 안에 항복하지 않으면…….”
도윤은 재생을 멈추고 대사를 따라하는 한편.
그랜트의 입 모양.
숨을 들이쉬는 구간.
그리고.
대사의 강세까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단순히 연기를 펼치는 것만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까.
물론 뭇 여성들의 마음을 잔뜩 홀려놓았던 그랜트의 말도 안 되는 이목구비 덕도 있기야 하겠지만…….
‘수염을 좀 저렇게 길러볼까?’
도윤은 실없는 생각 속 카피를 이어갔고.
“너는 살려주지. 죽일 가치가 없…….”
덜컥.
그때 문이 열리며 성호가 들어왔는데.
“……형, 죄송해요! 차 타이어가 터졌어요!”
난데없는 이실직고에.
도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아무래도 죽여야겠다. 살 가치가 없으니까.”
“네? 네?”
“3초 준다. 가서 타이어 고쳐.”
“형, 그게 지금 연락했는데 사흘은 걸린다고…….”
“그래?”
도윤은.
방금까지 카피하던 그랜트의 싸늘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그럼 사흘 동안 죽어.”
“자, 잘못했…… 악! 악!”
그리고.
방 밖에 있던 민주와 두칠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냐는 듯,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각자 할 일을 한다.
잊을 만하면 사고 쳐서 신경을 긁는 성호.
여기에 반응해 주는 도윤.
“아, 형! 아파요! 아파! 어깨! 어깨!”
“아프냐? 내 타이어는 더 아팠을 텐데.”
“가, 갈게요! 제가 낼게요!”
“아냐. 그냥 내가 돈 내고 그걸로 갈굴래.”
“제가 내게 해주세요! 제발!”
민주는 들려오는 비명에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방음 잘 되네.”
“그러게. 자리 비워야 하나?”
“아니. 저러고 곧 돌아올 거야. 근데 타이어는 어쩌다?”
“모르지. 요새 자주 타고 나가더만.”
“형님이 천사네요, 천사. 저라면 제 차 남한테 안 맡기는데.”
두 사람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성호는 만신창이가 되어 방에서 쫓겨났고.
민주는 그런 성호를 보며 한마디했다.
“오빠가 일찍 끝내줬네.”
“그러게요. 오늘은 덜하네요. 근데 대사랑 표정이 어우…….”
“너는 개기는 걸 즐기는 것 같아.”
“그렇게 보여요?”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던 성호는 터덜터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두칠은 그런 성호를 보며.
생각했다.
도윤이.
왜 종종 정성스레 괴롭히는지.
알 것 같다고.
저렇게 종종 갈굼당하면서도 군말 없이 일하니.
저거야말로.
좋은 노예의 표본이 아닐까.
“종신계약 때문에 그래.”
“아.”
“성호 본인은 그렇게 주장하더라고.”
음.
솔직하지 못한 면도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서로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둘 다 그럴 성격이 아니라.”
두칠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촌철살인이었다.
* * *
촬영이 거듭되며 도윤은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았다.
그랜트의 연기에 대한 카피를 어느 정도 마쳤을 뿐만 아니라 매번 달라지는 환경에도 빠르게 적응해 가기 시작한 것.
“오늘도 좋군.”
덕분에 도윤은 한국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촬영장 NG가 가장 적은 배우였고.
스태프들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이기도 했다.
도윤의 씬은 항상 일찍 끝나고, 거의 모든 제안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데다, 젠틀하기까지 하니.
물론 그렇다고 마냥 예스맨인 건 아니다.
“이번 씬에서 왜 이런 변화가 있었던 거죠?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기 이 대사의 변경은 ‘강석’의 행동 개연성과 전혀 맞지 않은 것 같은데요.”
때로는 이렇게.
크리스가 진땀을 흘리게 만들 때도 있다.
너무 날카로워서 탈이라고 해야 할까.
가끔 보면.
깐깐한 프로듀서를 대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 그 부분은…….”
물론 크리스는 배우의 의견을 묵살하는 감독이 아니기에 적절한 답변을 내주었고.
그 결과 30분의 설명 끝에 도윤을 만족시키는 개선안을 제시하며 돌려보낼 수 있었다.
“끈질겨.”
좋은 의미로 중얼거린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즌1 때부터 1년 넘게 봐 왔지만.
처음과는 너무도 다른 배우처럼 느껴진다.
여하튼.
도윤은 오늘도 남들보다 더 일찍 촬영을 마쳤고.
오늘 하루만큼은 호텔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기로 했다.
“도윤, 준비됐어? 남자들의 스포츠에 열광할 준비가?”
바로.
칼과 함께 NFL(National Football League)을 보러 가기로 한 것.
“글쎄.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매우 간단한 스포츠야. 공을 들고, 터치라인을 넘어가면 되는 거지. 그걸 반복하다가 더 높은 점수를 얻은 쪽이 이기는 거야. 축구와 비슷하다고. 혹시 축구는 좋아하나?”
“그럭저럭.”
“그럼 이제 축구에는 흥미가 사라지겠군. 미식축구야말로 지상 최고의 스포츠니까.”
칼은 미식축구 예찬론자였다.
뭐, 미국 남자들 중에서 미식축구와 야구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
칼의 미식축구 사랑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곳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 로스앤젤레스 램스(Los Angeles Rams)의 오랜 서포터이자 그곳 선수들과도 꽤 친하다고 할 정도니.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날 경기장에 데려가신 결과지. 심지어 어머니랑 이혼한 날에도 날 데려가셨다고!”
그런 이유로 칼은 자신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에서 경기장으로 가는 내내 신나게 떠들어댔다.
쿼터백이니 라인배커니 도윤으로선 살면서 한두 번 들어봤을까 말까 한 단어들을 줄줄 읊으며 말이다.
그래도 꽤 재미는 있었다.
오늘은 나름대로 여유를 부리는 날이니까.
“그리고 말이야, 이것도 모를 것 같은데…… 우리 팀에 한국인 키커가 있는 거 알고 있어?”
“한국인 키커?”
“그래! 이번 시즌부터 합류했는데, 킥이 무슨 매그넘 같다니까? 찰 때마다 쾅(BOOM)! 소리가 나는데…….”
이건 약간 흥미가 생긴다.
로스엔젤레스의 한국인 키커.
들어본 적이 있던 것 같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도윤이 LA에서 뭔가 연기 외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토크쇼나 TV 프로그램은 전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출연했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칼이 떠드는 소리는 도윤에겐 BGM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기장에 도착해서.
오프닝 킥오프(opening kick-off)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쾅, 콰아아앙!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죽여버려!”
“개자식들을 담가버리라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환호와.
열광적인 분위기.
그리고 푸른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육탄전의 향연은-
도윤의 시선을 끊임없이 붙잡아두고 있었다.
“봐. 내가 마음에 들 거라고 했지?”
칼의 의기양양한 목소리 속.
치열한 경기가 전개되었고.
경기는-
공교롭게도 칼이 말한 한국인 키커의 발끝으로 결정되었다.
동점 상황에서 마지막 킥으로 1점을 추가하며 로스엔젤레스가 승리한 것이다.
“그렇지! 이게 미식축구지!”
칼의 환호가 들려오고.
도윤은 앞으로 스포츠 경기를 직접 보러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름의 여흥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라운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두 사람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바로.
“어, 어어?”
한국인 키커.
조성환이었다.
“이봐, 조(Jo)가 네 앞에 왔어!”
도윤은 칼의 말에 고개를 돌렸고.
정말 헬멧을 벗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조성환을 발견하고 조금 당황했다.
거기에.
“최도윤 씨, 맞죠?”
자신을 바라보며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조성환.
“젠장, 나는 안 보이나 봐!”
칼의 절규.
그리고.
툭.
도윤은 조성환이 던져 준 미식축구공을 엉겁결에 받았다.
“팬입니다. 오늘 스코어 결정 지은 공이에요. 그거 줬으니까, 다음에 나 촬영장에 한번 초대해 줘요. 당신 꼭 보고 싶으니까.”
들려오는 당당한 부탁에 도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씩 웃으며 떠나가는 조성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젠장! 도윤! 방금 한국어였지? 너한테 뭐라고 한 거야? 사랑한대?”
세상 누구보다 로스엔젤레스 선수들과 친하다고 믿었던 칼의 배신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도윤은.
지금 손에 들린 공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