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186
186. 얘가 진짜 걔야?(2)
도윤은 여기 오기 전 원칙 하나를 세웠다.
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배우를 선별하기 전까지는.
이름을 알아두지 않겠다는 원칙.
미리 이름을 듣는 순간-
혹시라도 자신이 회귀 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배우들 중 한 명이 떠오를지도 모르기 때문.
그래서.
지금 막 앞으로 나온 배우가 자신을 소개하려던 걸 제지했다.
“이름은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로 시작하시죠.”
“네, 네에. 알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지망생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 저건.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당신들의 이름은 상관없다.
나는 연기로만 평가하겠다.
이전까지는 사실 약간의 의혹이 있었다.
으레 이런 자리들이 그렇듯-
내정자가 이미 존재하고.
나머지는 들러리 아니냐.
모두를 납득시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납득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불공평한 오디션.
그런데 도윤은 지금.
이 자리에서 ‘공정함’을 강조했다.
물론 믿지 않을 사람은 끝까지 안 믿겠지만…….
적어도.
그런 의혹들 대다수가 사라진 건 사실이며.
‘나도 할 수 있어.’
이제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 포기할 명분도 사라진 셈이라.
열망은 더더욱 불타올랐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가운데.
첫 타자로 나선 수강생의 혼신을 담은 연기가 펼쳐졌다.
“당신? 아. 나도 봤지. 그 사건 파일. 아주 개판이던데? 형사라는 인간이 범인 하나를 뭐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쫓으시나? 아, 현장에서 일만 하니까 이쪽으로는 조금 약한가? 됐고, 이제부터는 딱 내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여. 그럼 최소한 헤맬 일은 없을 테니까. 구닥다리는 버리고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거지. 어때?”
나름대로 펼친 연기.
대략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도 연상이 된다.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도윤의 표정에 담긴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여, 여기까지입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도윤은 이게 끝이라는 지망생의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돌아가는 지망생의 어깨는 충격으로 축 늘어졌다.
누가 봐도.
‘탈락’ 같은 반응이었다.
‘세상에, 저 연기가 탈락이라고?’
‘말도 안 돼.’
‘너무 기준이 빡센 건가……?’
참고로 지금 자신 있게 나선 지망생은 이곳, 후 아카데미에서도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시작부터 저런 ‘탈락’이라는 반응을 끌어내자.
수강생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그리고.
“네, 수고하셨습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약간의 레파토리만 바뀌었을 뿐.
이어지는 연기에 도윤이 보인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표정이 변한다거나.
하다못해 미소를 짓는다거나 하는-
그런 최소한의 리액션조차 없이.
그저 무심하게 연기를 지켜보고.
“네, 수고하셨습니다.”
지금처럼 간략한 말만 남길 뿐이다.
마치.
이러려고 온 것처럼.
도대체 뭘까?
뭐가 마음에 안 들까?
참다 못 한 지망생 한 명이 물은 건 그때였다.
“간단한 코멘트라도 받을 수 없을까요?”
잔뜩 달아오른 얼굴에.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
하지만.
도윤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는 지금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하는 코멘트로 다음 연기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제야.
사람들은 도윤이 왜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며 석상처럼 그 자세 그대로 서 있던 건지 깨달았다.
여기 있는 지망생들 대부분은 간절하다.
그래서 온통 시선은 도윤에게 쏠려 있고.
도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할 게 뻔하다.
그런 상황에서 도윤이 막 연기를 마친 사람에게 어떤 코멘트를 던진다면-
그 코멘트를 듣는 다른 지망생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제가 원하는 건 여러분들이 지금 펼칠 수 있는 연기 그 자체입니다. 다른 사람의 연기에 제가 코멘트한 걸 보고 영향을 끼친, 변질된 연기가 아니라요.”
도윤은 그 한마디로 모두의 의문을 일거에 소거해버렸고.
방금까지도 울먹이던 지망생은 결국 납득한 채 자리로 돌아갔다.
당연하게도.
그 이후는 같은 말의 연속이었다.
이런 가운데.
첫 타자로 나설 기회를 놓친 후 내내 눈치만 보고 있던 이한영이.
마침내 손을 들었다.
“네. 나오시면 됩니다.”
도윤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나온 이한영.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지만.
이한영은 간신히 도윤과 눈을 마주친 뒤.
심호흡하고 지망생들을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
저들 중엔 분명히 자신이 실패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야 어떻게 연기하든-
지금 다음 차례를 생각하고 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지금.
저들은 이제 자신의 연기를 바라볼 ‘시청자’가 될 테니까.
“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도윤의 끄덕임 속.
이한영은 마침내 자신이 준비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당신이 왜 나를 사랑하는지 말해줄게.”
고요함 속.
방금까지 떨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뜨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마이크 하나 없이.
“첫 번째.”
강당 전체를 메우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를 신경 쓰고 있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바라보고, 나를 생각하고, 나를 좋아해.”
모두가.
빠져들기 시작한다.
남의 연기야 어떻든.
내 연기만 생각하던 이들조차 지금 이한영의 연기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
목소리는 깊고 떨림이 있었으며.
수십 명 모두가.
생각한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있다고.
빨아들이는 힘.
이것이 바로-
이한영이 펼치는 연기였다.
“당신은 항상 나에게 연락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모든 순간 나와 함께하고 나를 찾는다는 거, 그게 바로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또 하나의 증거야.”
숨죽이는 고요함.
모두가.
다음 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한영은.
마치 눈앞에 정말 사랑을 부정하는 연인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애틋하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마지막 대사를 이어갔다.
“나는 너를 사랑해. 죽을 만큼. 그래서 당신도 날 사랑하는 거야.”
충격적인 고요함이 흐르고.
몇몇은.
지금 이한영이 펼친 연기를 부정했다.
‘말도 안 돼.’
지망생들은 사실.
은연중 서로를 평가하고 서열을 나눈다.
대강 가능성이 보이고 원장에게 자주 칭찬받는 학생들은 ‘데뷔’가 가까워진 학생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데뷔’와 거리가 멀다고 판단-
그렇게 ‘급’을 나누는 것.
그런 의미에서…….
‘쟤가…… 저 정도였어?’
이한영은 다른 지망생들이 놀랄 만큼.
멋진 연기를 펼쳐냈다.
지금까지 본 이한영의 연기는 마치 위장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원장은 웃고 있었다.
‘그래, 진작 그렇게 했어야지.’
항상 자신감이 부족해 자신의 실력을 100% 끌어내지 못하던 이한영의 모습.
원장은 내내 그 모습이 안타까웠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사람이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는 다양하다.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거나.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거나.
또는.
우상으로 여기던 누군가의 앞에 서거나.
실로 다양한 케이스에서.
이한영은 자신감을 끌어낼 수 있는 완벽한 상황을 마주한 셈이고.
“네,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도윤의 준비된 멘트에 자리로 돌아갔지만.
마음만큼은 후련하고, 또 기뻤다.
오히려 흥분되기까지 했다.
아직까지도 손발이 벌벌 떨리게 만드는 이 아드레날린.
이게 바로.
연기구나.
이한영은 마침내.
우상 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처음 제대로 펼쳐본 것이다.
그래서 이한영은 더 이상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겠어.’
물론 일말의 기대감은 있지만.
마지막으로 연기를 했다는 후련함에.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걸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앞에서.
후련하게 연기하고.
이 강렬한 쾌감을 느끼는 것.
그 대상이 자신의 우상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셈 아니겠는가?
이런 가운데.
이한영은 물론이고.
다른 지망생들도 마찬가지였고.
원장조차 보지 못했지만.
‘이 사람이었군.’
도윤은.
이한영이 돌아가는 사이.
웃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 * *
아마.
아카데미가 이렇게 시끌시끌했던 건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을 것이다.
배우 최도윤의 기습적인 방문 이후 실시된 즉석 오디션.
어떤 코멘트도 없고.
그 자리에서 발탁한 지망생도 없었다.
도윤은 마지막 한 명의 지원자까지 같은 멘트만을 반복한 뒤.
“추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김빠지는 말만 남긴 채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은근히 도윤이 조언을 주거나 강연 같은 걸 해주길 원했던 지망생들은 실망했지만.
지원자로서 연기를 펼친 지망생들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오늘 아카데미에 출석했다.
퀭한 눈.
짙게 내려앉은 피곤함.
혹시라도 연락이 올까 싶어.
밤새 제대로 쉬지도 못한 것.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이제 지망생들은 약간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되겠어? 그냥 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던데.”
“코멘트나 다른 말 해서 영향 끼치기 싫었다잖아. 기다려 보는 게 어때?”
“에휴, 난 모르겠다. 완전 그냥 조졌는데…….”
핑계와 합리화인 건지.
아니면.
그냥 정말 절망한 건지.
“잘한 애들도 있는 것 같던데. 이한영, 걔는 원래 그랬었나?”
“뽀록이지. 가끔 그렇게 딱 한 씬 터지는 애들 있잖아.”
“근데 그 타이밍이 최도윤이 온 타이밍이라 그렇지.”
이런 와중에 언급되는 이한영의 이름.
이한영은.
최도윤과 다른 의미로 지망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평소 별달리 눈에 띄지 않았던.
어떻게 보면 그저 그런 느낌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잘하다니.
시쳇말로 ‘뽀록’이 터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지금까지 실력을 숨긴 게 아니냐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한영이 지금 다른 지망생들보다 훨씬 더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
“저 정도면 곧 데뷔 아니냐?”
“데뷔가 무슨 연기 한 번 좋았다고 다 하는 거면 여기 있는 애들 다 데뷔했지.”
“그래도, 저 정도면 진짜 대박이었는데…….”
여하튼.
이번 후 아카데미에 최도윤이 방문한 건.
여러모로 큰 화제를 낳았고.
이제.
남은 건 도윤의 연락뿐.
하지만.
하루가 가도.
이틀이 가도.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백프로네. 그냥 간만 보다가 간 거네.”
“마음에 드는 애들이 없었던 건가?”
“그냥 보여주기식이었던 거지.”
“그런 것치고 기자는 한 명도 없었잖아.”
“아, 왜 자꾸 희망을 가지냐? 그냥 수업이나 듣자.”
다른 지망생들의 희망이.
점점 사그라들고.
이한영은.
마침내 원장을 찾아갔다.
“저, 이번 달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아요.”
이한영은 마음을 굳혔다.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그날.
비록 카메라 앞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연기를 후회 없이 쏟아내었기 때문.
미련은 더 이상 없었다.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
원장은.
이한영이 생각한 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반응.
‘그래, 이거였지.’
원래 이랬었다.
원장은 자신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았고.
종종 아쉽다는 듯, 재능을 좀 더 살릴 방법이 없겠냐며 고민해 보자고 말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이한영은 더 슬퍼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후회하지 않겠어?”
“네.”
단호한 그 말에.
원장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쉽네. 그쪽에서 널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네?”
“도엔터 말이야. 얼마 전 왔었던, 최도윤 배우가 세운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