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195
195. 상황이 달라졌지!
빌은 유명 프로듀서다.
그것도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프로듀서.
드라마 몇 개, 영화 몇 개를 성공적으로 프로듀싱해 냈고.
그 과정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촬영 당시 주연 배우가 깽판을 쳤을 때도 무덤덤하게 대책을 강구하고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았을 정도고-
배우 한 명이 마약을 투약해 작품 자체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놓였을 때도 매번 침착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무려.
슈퍼히어로 영화를 만드는 미국 최고의 스튜디오 중 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무려 동양인에게!
물론 슈퍼히어로 영화에 동양인이 출연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단역이었고, 조연급이라도 대사가 거의 없거나 히어로의 사이드킥 수준에서 그친 게 전부.
“혹시 조연으로 오해한 거 아니지?”
그래서 물었다.
자신이 주연인지 조연인지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리고 빌은 도윤이 이 말에 놀라 나자빠질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주연이고 말고는 상관없는데요.
늘 그렇듯.
도윤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빌은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하, 지금 그거 무슨 반응이야? 다른 녀석이었다면 지금 환호성이 들려야 정상이라고!”
-제안 하나 온 건데요. 아직 모르는 일이죠.
“이런 제기랄! 제안이 왔다고! 주연 제안이! 무려 동양인한테! 아, 젠장. 나 인종차별주의자 아니야. 그냥 전례가 없었다는 걸 말해주는 거야!”
-알죠. 빌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절 데리고 미국에 가서 에 꽂아주지도 않았겠죠.
심지어 웃으며 여유롭게 이야기하기까지.
덕분에 빌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서울 한복판에서 영어로 열심히 떠들어대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빌은 꽤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어어,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거 아니야.”
물론 빌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도윤, 이건 엄청난 기회야! 잘만 하면 넌 롤스로이스 열 대를 수영장에 처박아도 아무렇지 않은 재력을 얻을 수 있다고!”
-백 대는요?
“내가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잖아!”
씩씩대는 빌의 휴대폰 너머로.
도윤의 낄낄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빌은 모르고 있었다.
도윤은 지금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을 시달리게 만든 빌에게 복수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당장 온 제안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빌이 그걸 알아차릴 리 없는 셈.
“젠장, 진지하게 들으라고. 이건 엄청난 제안이야! 그쪽에서 큰 프로젝트를 짜고 있어. 도윤, 넌 그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부가 된 거라고!”
-좀 더 지켜봐야죠. 당장 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너라면 지금 촬영하는 것들 싹 다 캔슬시키고 날 만나겠지!”
물론.
빌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남아달라고 사정사정을 해도 미국을 떠났던 도윤이다.
일단 한번 한 약속은 절대 저버리지 않는, 이 바닥에서는 흔하디흔한 계약 파기를 결코 고려조차 안 하는 배우가.
도윤이라는 걸.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잘만 하면.
세상 부를 잔뜩 끌어모을 수 있고.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
“일본이라고 했지? 내가 당장 갈게!”
-그러세요.
그래도.
가겠다는 걸 막지 않는 걸 보니.
아주 생각이 없진 않은 모양.
원래대로였다면 화가 나야 정상이지만.
빌은 그 반응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이상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윤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는 것.
“젠장, 각오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출연시킬 테니까!”
-한번 보고요.
“망할!”
화를 못 이겨 전화를 끊은 빌은.
씩씩거리며 다짐했다.
이 망할 녀석을.
반드시 그 영화에 출연시키겠다고.
* * *
안 기쁠 리가 있나.
솔직히.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다.
도윤도 남자인 이상 어린 시절 로보트를 보며 가슴이 뛴다는 걸 경험했고,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작품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수차례 생각했다.
한마디로.
이런 동심을 간직한 배우에게는 ‘꿈’이나 다름없는 제안인 셈.
아직 뭐, 구체적으로 어떤 히어로인지 알 수도 없고 제안이 어떤 수준인지도 모르지만.
고려할 가치는 충분하다.
어지간한 제안으로는 놀라지도 않을 빌이 이렇게 반응했다면 더더욱.
덕분에 도윤은 전화를 끊자마자 참았던 흥분을 살짝 토해냈다.
달뜬 날숨이 그 증거.
그리고 그걸 민주가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어쩌면 좋은 일.”
“좋은 일이겠네요.”
“어떻게 알아?”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좋은 일이죠.”
이쯤 되자 성호와 두칠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 맞는 것 같네요. 형님, 무슨 일인데요?”
“또 로맨스 작품 하나 들어왔어요?”
도윤은 은근 흥분한 듯한 둘의 모습에 피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들보다 더 좋은 일.”
그리고 빌과 나눈 통화를 적당히 요약한 뒤, ‘슈퍼히어로’라는 단어를 꺼내자.
“미친!”
성호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환호했고.
두칠은 멍해졌으며.
민주는 은근히 관심을 보였다.
“오빠라면 주연급이든 조연급이든 히어로 역할일 테고…… 당장 생각나는 건 ‘아마데우스 신’이랑 ‘크레온’, ‘보이머’, 그리고 ‘알판’ 정도인데.”
“너 되게 잘 안다.”
“그야 팬이니까요. 그쪽 팬.”
삼국지에만 미쳐 있는 줄 알았더니.
“보고 있으면 가슴 뛰잖아요? 삼국지처럼.”
슈퍼히어로 작품의 팬이 되는 이유 중.
저것만큼 정확한 이유가 또 있을까.
가슴이 뛴다.
지금 도윤의 가슴도 그랬다.
어차피 그린스크린 앞에서 열심히 촬영할 테고, 이펙트와 액션은 CG가 다 해줄 테지만…….
완성된 영상에서 악당을 무너뜨리고 대중의 환호를 받는 자신의 배역을 보고 있으면, 그것만큼 환상적인 일도 없겠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다.
이 바닥에서 ‘제안’만큼 불확실한 단어도 없으니.
그래도.
고무적인 건 사실.
“오빠 그 영화 찍으면 진짜 월드스타네요. 지금도 준 월드스타지만.”
“월드스타는 무슨.”
도윤은 아직 자신이 세계적인 인지도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즌1, 2에서 보여준 열연과 시즌3에서 예정된 주연 배역으로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건 사실이나-
그런 배우들은 지금껏 수도 없이 많았다.
요는 이거다.
한번 각인시킬 때.
얼마나 제대로 각인시키느냐.
그런 의미에서.
슈퍼히어로 영화,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작품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촬영 전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으니까.
“근데 형 되게 시큰둥하게 전화 받으시는 것 같던데. 제가 영어를 잘 몰라서 못 알아듣긴 했지만.”
“아, 그거.”
도윤은 성호의 질문에 씩 웃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몇 번 튕겨주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귀찮게 만들었던 빌에 대한 나름의 복수 방법이기도 했다.
뭐.
적당히 애태우고, 일본에 오게 만든 것으로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제 슬슬 이야기를 들어 볼 시간인 것 같았다.
* * *
빌은 도윤과 전화를 끊은 즉시 비서에게 연락해 일본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고, 그 길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택시기사에게 쉴 새 없이 “Fast!”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덕분에 바가지고 뭐고 필요 없다며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넣은 택시기사는 싱글벙글한 표정이었고.
“조심히 가십시오!”
그런 택시기사를 뒤로한 채 빌은 곧장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는 내내.
‘내 이 망할 녀석을 꼭 출연시킨다.’
아까 했던 다짐이 마음속에 가득한 빌.
“설마…… 그냥 튕겨본 건가?”
이런 와중.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의심.
세상천지 어느 배우가 위대한 프로듀서 빌의 제안에 저렇게 시큰둥하게 반응할 수 있곘냐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도윤이 내내 보여준 여유만만했던 태도를 생각하면…….
그러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망할, 길을 잘못 들여놨어.”
빌은 뒤늦게 자신이 페이스에 말려들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제안이 온 건 빌 자신이 아니라.
도윤이었고.
결국 빌은 프로듀서로서 도윤을 설득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복수의 칼날은 갈고 있었다.
복수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자유분방하다 못해 방종에 가까운 미국의 여러 배우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청교도적인 생활의 표본인 도윤이었기에.
마땅히 방법이 안 떠오르는 것이다.
여하튼.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어허, 쳐다보는 거 아니야.”
다급하게 끊은 덕에 최근 10년 사이 앉아보지도 않은 이코노미석에 앉은 빌은 여러 사람들의 시선 속.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빌은 도윤에게 전달받은 주소를 택시기사에게 보여주며 이번에도 “Fast!”를 외쳐댔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 어느 특급호텔에 도착, 도윤이 있는 방에 다다랐을 때.
“젠장. 염병할 가슴이 아직도 뛰잖아!”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너무 서두른 탓인지.
아니면 화가 나서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여하튼.
오랜만에 느껴보는 거센 심장박동이다.
“왔어요?”
반면 빌을 맞이한 도윤은 세상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가 없었다.
누구는 제안 받자 마자 여기 오느라 그 개고생을 했는데.
“참 편해 보여. 그치?”
“그럼요. 얼마나 좋은데요. 여기 소파가 예술입니다.”
“젠장!”
빌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스위트룸으로 들어섰고, 마침 눈에 들어온 맥주캔 하나를 거칠게 따 빠르게 들이켰다.
“크으.”
“마셔도 돈 안 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드세요.”
하마터면.
맥주를 뿜을 뻔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다.
“일단 앉아. 설명할 게 많아.”
빌은 도윤보다 먼저 소파에 앉더니 속사포처럼 제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연이야. 촬영 스탠바이는 내년이고, 만약 수락한다면 당장 올해부터 미국에 있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그쪽 스튜디오랑 미팅도 끊임없이 해야 하고 그쪽에서 검증도 할 거란 말이야. 하지만 그걸 감수할 가치는 충분해. 이거 하나만 하면, 바로 뜨는 거니까. 오케이?”
“영화가 망하면요?”
“망할 리 있나! 무려 ‘딘 형제’가 출동하는데!”
딘 형제.
도윤도 회귀 전 익히 들어본 바 있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감독 형제.
현 시점에서는 대중들에겐 크게 유명한 것 같진 않지만.
빌의 말을 들어보면-
“그 둘은 최고야. 기획부터 연출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고. 비록 아직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장담하건대 조만간 모르는 사람은 모조리 사라질걸!”
이쪽 바닥에서는 꽤 유명한 모양.
이런 걸 보면.
빌이 실력 있는 프로듀서가 확실한 것 같긴 했다.
여하튼.
“구체적으로 정해진 제안은 없고요?”
“아직 기획 단계지. 정확히 말하면, 도윤 네가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획을 할 수 있었던 거야. 미리 말해두지만,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
“계속 말하세요.”
“아무튼 이전까지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도양인이 사이드킥이 아니라 메인 히어로를 맡는 걸 상상할 수 없었어. 왜? 동양인이니까! 지극히 당연하고도 차별적인 이유지.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고. 에서 대단한 배우 하나가 나왔으니까.”
상황이 달라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도윤 너! 네가 나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