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197
197. 슈퍼히어로 랜딩(2)
빌은 유명 프로듀서다.
그래서 이번에 도윤의 출연 건으로 협상을 벌이게 된 ‘오리진 코믹스 스튜디오’와의 대결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할 거라 믿어 의심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무슨 매니저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사실 협상은 자신이 할 게 아니라 도윤의 매니저 같은 대리인이 할 일.
미국의 한 가락 한다는 스타들이 모두 대동하는 그런 으리으리한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시즌 1, 2를 거치며 이미 코가 꿰어 버렸는데.
여하튼.
빌은 지금 눈앞에 있는 오리진 코믹스 스튜디오의 프로듀서, 잭슨 로저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저스 씨, 저희 측의 요구 사항은 같습니다. 촬영을 비롯한 모든 일정의 시작 시기를 10월 이후로 늦춰달라는 것입니다.”
저번에 이은 협상.
벌써 세 번째.
오리진에서 도윤을 원하는 만큼 세 번째 협상까지는 어찌어찌 끌어왔는데.
빌은 알고 있었다.
가급적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것을.
‘침착하자.’
도윤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은 것도 맞고, 이를 토대로 자신이 어느 정도 우위에 선 채로 협상을 할 수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상대는 오리진이다.
이미 슈퍼히어로 무비 사가(Saga)를 벌써 다섯 편이나 출시하며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시켰고.
전 세계 수억 명의 팬을 보유했다.
도윤 외엔 적당한 동양인 배우가 없는 만큼, 이들이 플랜을 실행시키기 위해서 도윤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맞지만.
오리진은.
그걸 다 뒤엎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짤 능력이 충분할 만큼 거대한 집단.
그래서.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10월이라…… 우리 오리진의 플랜은 확고하고, 배우 한 명의 일정으로 인해 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건 지금 ‘아이언 머신’의 주연 배우 역시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걸 이유로 배우가 현재 촬영 중인 작품을 당장 그만두고 날아오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신의의 문제입니다.”
빌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렇게나 듣기 싫어했던 도윤의 신념을 무기 삼아 역설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제안이 들어왔음에도 일정을 늦춰달라고 할 때 꺼낼 카드가 이것 외엔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망할 놈. 그러니까 바로 오케이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빌이 속으로 도윤을 욕하는 사이.
“그럼 우리 오리진의 제안이 지금 배우가 일본에서 촬영 중이라던 영화와 드라마만도 못하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하. 우리 솔직해집시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프로듀서죠.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배우들이 기존 약속을 깨게 만들고 자신과 손잡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이라니, 참 재미있네요.”
빌의 신경을 긁어대는 잭슨의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지금은 자신이 여기에 반응해선 안 된다.
어떻게든.
도윤을 이 ‘오리진 코믹스 스튜디오’에 합류시키는 게 자신의 사명.
“언제부터 미국이 과거의 일을 따지는 나라였습니까?”
“그렇죠. 미국은 미래를 보는 나라죠. 하지만 당신이 데리고 있는 그 배우는 미국인이 아니라 그런지 미래보다는 현재만 보는 것 같군요.”
역시 말로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다.
오리진 코믹스가 자랑하는 수많은 배우들을 발탁한 프로듀서, 잭슨 로저스.
어쩌면.
빌은 불리했던 싸움을 세 번째 협상까지 이끌어온 것만으로도 소임을 다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빌은.
스스로를 최고의 프로듀서라 생각하고 있기에.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10월로 연기하는 조건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그건 스스로 찾아야죠. 우리가 시간을 주면, 그쪽에서도 무언가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잭은 싱글거리며.
여전히 한 발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때였다.
빌의 표정이 바뀐 건.
“그럼 이렇게 합시다.”
* * *
다시.
일본.
빌은 수고스럽게도 미국에서 협상을 마친 뒤 좋은 소식을 들고 일본에 찾아왔고.
도윤을 보자마자 한 대 칠 기세로 씩씩거리다가 도윤이 준비한 브랜디를 내밀자 한결 누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기억해 둬. 산 마르틴스 30년산이 널 살린 거야.”
“술에 빚지기는 처음이네요.”
“그만큼 내가 개고생을 했다는 거지.”
빌은 브랜디를 꿀꺽꿀꺽, 대번에 들이켜더니 다시 한 잔을 따르곤 가만히 도윤을 노려봤다.
“너 같은 녀석은 처음이야.”
“저도 당신 같은 프로듀서는 처음이네요.”
“칭찬이겠지? 아니면 다음 날 기사가 뜰 거야. 한국의 대스타 도윤! 프로듀서의 손에 흠씬 얻어맞다!”
도윤은 과장된 빌의 말투에 낄낄거렸고.
빌은 곧 자신이 어떻게 협상을 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주 힘든 과정이었지. 아주 힘들었다고.”
“그럼 그다음에 뭐라고 했는데 그쪽에서 오케이한 건데요?”
“네가 찍을 작품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쪽에 합류하겠다고 했지.”
“네?”
도윤은 조금 놀란 눈으로 빌을 바라봤다.
그리고 빌은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잘됐어. 넘길 녀석도 있고, 나도 이제 다른 걸 해보고 싶었거든.”
“그게 가능해요?”
“이봐, 나 할리우드에서 먹어주는 프로듀서야. 나 같은 녀석이 그쪽으로 합류하겠다는데 오케이 안 하고 배겨? 그 녀석들, 그때까지 그렇게나 고자세로 있다가 내가 딱 그 한마디 하니까 바로…….”
도윤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배우 한 명을 합류시키려고.
몸값으로 따지면 도윤보다 훨씬 비쌀 사람이 같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니.
“정말 그럴 계획이었어요?”
“나도 동심 가득한 세계에 한 번 뛰어들어 보고 싶었다고. 1년 일할지, 2년 일할지 알 수 없지만.”
정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내가 ‘고작’ 배우 하나 때문에 잘나가던 일들 싹 때려 칠 인간으로 보여?”
빌은 은근히 설득력 있는 말로 도윤의 의심을 불식시키려 애썼다.
생각해 보니까.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대단한 프로듀서인 건 맞다.
이제 와서 체감되니까 그렇지.
“여하튼 해결됐어. 10월 이후로 합류하면 돼.”
“정말로 해결된 건가요?”
“그럼. 날 믿으라고.”
빌은 엄지를 세우며 자신을 가리켰고.
그 덕분에.
도윤으로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나.
최고-자칭이기도 하지만-의 프로듀서가 저렇게 말하는데.
“뭐, 나중에 거액 받고 이적할 기회는 놓쳤지만…… 그깟 돈쯤이야, 우리 잘나신 배우님께서 해결해 주겠지?”
그래서 도윤도 양심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쯤이야, 헤엄치게 해드리죠.”
“좋아. 우린 이제 그럼 한배를 탄 거야. 사실, 제안이 들어온 시점부터 이미 한배를 탄 거지만.”
째앵.
도윤이 든 브랜디 잔과.
빌이 든 브랜디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단숨에 잔을 비웠다.
티격태격하고.
서로를 디스하기 바쁘지만.
지금만큼은.
둘의 눈엔 신뢰가 가득했다.
‘이 망할 녀석…… 내가 꼭 성공시킨다.’
‘충분히 믿고 가도 되겠군.’
동상이몽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성공하겠다는 목표는 같으니-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 * *
.
일본 드라마답게 이름도 엄청나게 긴 그 드라마는 이제 촬영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도윤 상! 아주 좋네요!”
뭐, 좋다는 말도 이제는 질릴 법도 한데.
도윤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PD님 덕이죠. 어제 보내주신 편집본 잘 봤습니다. 연출 구도가 너무 아름다워서 넋 놓고 한참을 봤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도윤은 한국에서도 그래왔듯.
PD를 비롯한 제작진, 스태프들과도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아직 완벽하지 않은 일본어 탓에 한국처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행동으로 말하는 법.
몸에 밴 적당한 예의.
사람을 대할 때 나타나는 배려.
그리고 가끔 촬영장을 찾아오는 커피와 푸짐한 음식까지.
흔히들 ‘톱스타’라고 하면 건방지고 예의 없고 촬영장의 왕처럼 군림하는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도윤은 오히려 ‘톱스타’에 걸맞은 품격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아, 도윤 상. 혹시 인스타는 안 해요?”
“하죠. 근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저인 거 공개 안 하고 쓰는 계정이라서요.”
“어라? 그럼 알려줄 수 없는 거예요?”
“미안해요. 한번 잘 찾아봐요.”
상대 배우 스즈와도 꽤 친해졌다.
거의 10화 정도를 촬영하며 내내 붙어 지냈으니.
안 친해질 리도 없는 것.
물론 도윤은 최소한의 선을 지켰다.
끝나고 다 같이 한잔하는 자리에는 가급적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단둘이 보거나, 그럴 기미가 보일 만한 자리에는 가지 않았다.
거의 중반 무렵부터는 스즈가 대놓고 호감을 표시하는 데도 말이다.
‘여자친구가 있나?’
있을 리 있나.
하지만 도윤은 그저 관심이 없는 것뿐이다.
연기와.
회사 운영과.
카메라 외에는.
오죽하면 성호가 대신 억울해했겠는가.
저 얼굴로 살면서 저렇게 솔로로 있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하지만 사람은.
엄청나게 큰일을 겪으면 변하는 법.
회귀라는 거대한 일을 겪은 도윤처럼.
“아. 다음 씬이 끝이네요.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도윤 상이야말로요. 이제 곧 전체 촬영도 끝이네요.”
“그러게요. 재미있었는데.”
도윤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스즈는 그 웃음에 조금 멍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도윤이 친 철벽으로 봤을 때.
‘안 돼!’라는 외침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다음에…… 또 같이 촬영할 수 있겠죠?”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물론 도윤도 이것까지 철벽을 치진 않았다.
“물론이죠. 스즈 상과 함께하는 촬영, 얼마나 즐거웠는데요.”
머릿속에 종이 치는 이 기분.
그래.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스즈는 차라리 이게 낫겠다 싶었다.
괜히 더 다가가려다가 거리만 멀어지면.
그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테니.
대신.
스즈는 연기에서 쏟아내기로 했다.
“자, 그럼 슛 들어가겠습니다.”
마지막은 아니지만.
마지막과도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번 씬에서 말이다.
“시로.”
스즈가 연기하는 ‘아야’가 도윤이 연기하는 ‘시로’를 애절하게 부르고.
“우리는…… 계속 같이 걸을 수 있는 걸까?”
묻는다.
헤어짐과 만남을 몇 번씩 반복한.
자신의 연인에게.
그리고 ‘시로’는 대답한다.
“잘 모르겠어.”
새로운 사랑을 마주해야 할지.
아니면 늘 그래왔듯, 함께하던 사람과 같이해야 할지.
이들이 이렇게 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방식이 다르고.
궤적이 달랐을 뿐.
그리고.
“…….”
“…….”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애절한 눈빛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연기를 지켜본다.
옅은 바람이 휘날려 두 사람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쏴아아…….
백사장에 선 둘 뒤로 파도가 다가온다.
이별을 직감하는 둘의 눈빛.
알고 있다.
다시 이어지면.
또 한 번.
무너질 것임을.
“…….”
“…….”
이어지던 침묵 속.
‘시로’는.
마침내 이별을 고한다.
“잘 있어. 아야.”
“시로, 너도.”
‘아야’ 역시.
더 이상 자신을 보지 않는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고.
서로.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풀샷.”
PD의 나지막한 지시 속.
카메라는 서서히 멀어지며 걸어가는 둘을 일정한 구도로 잡았고.
마침내.
“컷! 완벽합니다!”
외침 속, PD의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며.
‘시로’와 ‘아야’의 이야기는 그렇게 잠정적으로 끝을 맺는다.
“완벽하네요. 도윤 상, 도대체 왜 지금까지 로맨스 장르를 잘 안 찍었던 거죠?”
“그러게요. 저도 흥미가 동하네요.”
“캬…… 이 느낌이면 아주 훌륭합니다. 아주 좋네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화 촬영만 남았네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서 촬영을 할 날이.
그리고.
미국으로 향할 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