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2
2. 개과천선 배우님(2)
‘오늘은 또 얼마나 지랄맞게 굴려나.’
도윤의 매니저, 유성호.
성호는 룸미러로 보이는 도윤의 잠든 모습을 보며 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조금만 버티자. 1년만 하고 바꿔 달라고 하는 거야.’
성호가 로드 매니저로서 처음으로 맡은 배우는 바로 지랄맞기로 유명한 도윤.
그간 도윤을 거친 매니저가 2년 동안 무려 4명이 넘는다는 건 한 달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방지턱에 차 흔들리는 걸로 난리 칠 줄은 나도 몰랐지.’
처음에는 그저 깐깐한 줄로만 알고 패기 있게 일을 시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사람을 깔보는 화법에.
과한 협찬 요구를 비롯한 갑질은 기본.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코디에게 욕을 퍼부은 데다.
심지어 새벽에 막 일을 마친 성호에게 한 시간 뒤에 바로 준비하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사실 1년이 다 되어 가는 성호는 아주 오래 버틴 거라 할 수 있었다.
슬슬 지쳐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전역 직후 이 바닥으로 뛰어든 성호의 목표는 돈을 최대한 모아 복학하는 것. 어려운 집안에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원래는 안 그랬다고 들었는데.’
사실 성호는 도윤에 대해 이전부터 조금은 알고 있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연기를 시작하고 특유의 차가운 마스크와 외모, 타고난 연기 재능으로 인기를 얻은 건 꽤 유명한 사실이니까.
그리고 전임 매니저가 말하길, 데뷔 초기까지만 해도 도윤은 상당히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들었다.
‘이래서 연예인병이 무서운 거지.’
수많은 연예인들이 갑자기 얻은 인기와 명예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골로 갔다. 대중들이 아는 것도 꽤 되지만, 대중들이 모르는 것도 더 많았다.
인지도도 높고 실력도 좋은데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춘 연예인들은 대부분 그런 식이다. 오만을 주체하지 못한 것.
그래도 자기가 담당한 배우이니 잘 좀 됐으면 하는 바람인데…… 갈수록 개차반이 되어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틀린 것 같다.
성호는 앞으로 1년을 더 버틸 생각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형, 일어나세요. 시간 됐어요.”
“…….”
“형. 일어나시라니까요. 오늘도 지각하면 안 돼요.”
도윤은 그제야 눈을 떴다.
“……성호니?”
성호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멍한 표정으로.
* * *
도윤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건 성호가 억지로 쥐여주다시피 한 대본 겉에 적힌 작품 제목을 본 후였다.
“? 이건 분명히…….”
.
동명의 노래를 모티브로 제작된 로맨스 장르의 드라마이자, 도윤이 세 번째 배역을 맡아 출연한 작품.
‘설마 정말로…….’
도윤은 마치 번개에 맞은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를 구하러 트럭에 뛰어들기 직전 뛰어든 염원.
꿈이라고 부정해 보려 해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도윤 앞으로 스태프 한 명이 뛰어왔다.
“아! 최도윤…… 배우님. 여기 계셨네요. 지금 PD님이 찾으세요.”
배우님이라는 호칭에서 잠시 머뭇대던 스태프.
그러나 도윤은 거기에 관심을 두는 대신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혹시 진주섭 PD님이요?”
“네? 네. 진 PD님이요.”
스태프는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러워 보이는 도윤의 모습에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뭘 잘못 먹었나.’
주제에 재능 좀 있다고 안하무인으로 군다는 소문이 슬슬 퍼지던 차.
안 그래도 몇몇 촬영장에서 도윤이 생떼를 부리거나 갑질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던 그녀는 도윤의 저 표정에 속지 않았다.
“지금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스태프는 그리고 멍해졌다.
생전 뛰기는커녕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느긋하던 도윤이 뛰고 있었던 것.
그것도 아주 빠릿빠릿하게.
마치 신인 연기자처럼.
“진짜 뭐 잘못 먹었나.”
스태프는 힐끗 고개를 돌려 도윤이 내린 카니발을 바라봤다.
당연히 호박으로 만들어진 마차일 리는 없었다.
* * *
도윤은 촬영현장 한구석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던 주섭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PD님.”
그리고 사방은 정적에 휩싸였다.
PD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던 조감독도, 옆에서 장비를 챙기던 스태프도, 인사를 받은 주섭도.
“어, 그, 어. 그래요. 최도윤 씨, 왔어요?”
“예. 스태프분이 찾으신다고 말씀해 주셔서 바로 왔습니다.”
스태프 한 ‘분’.
찾으‘신’다고 해서.
‘말씀해’주셔서.
‘갑자기 뭐야?’
주섭의 머릿속에 혼란이 찾아왔다.
“아, 다른 건 아니고…… 대본 수정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서. 곧 작가님 오시긴 할 텐데, 일단 저랑 먼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서.”
“아, 예. 어떤 부분이죠?”
치미는 의문.
‘뭘 잘못 먹었나?’
주섭은 당황했다.
요새 슬슬 안 좋은 소리도 들려오고 불편함을 호소하는 스태프들도 늘어나던 차였다.
그래서 이걸 빌미로 푸닥거리나 한번 해서 버릇을 좀 고쳐놓으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원.’
정말 뭐라도 잘못 먹은 건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의 설명을 경청하는 도윤의 모습.
“이 부분 숙지하겠습니다. 좋은 수정 같습니다.”
와중에 도윤은 주섭의 요구를 바로 납득한다.
아주 예의 바른 자세로.
덕분에 주섭은 본래의 목적은 잊은 채 멍하니 대본을 건네준 뒤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어, 음. 이따 그럼 스탠바이하기 전에 한번 다시 봅시다.”
“예, 숙지 잘해두겠습니다.”
“그, 그래요.”
떨떠름한 표정의 주섭은 멀어지는 도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래서야 뭐라 할 수도 없는데.’
그리고 주섭이 입맛을 다시던 그때.
“그래, 이게 발단이었지.”
도윤은 옛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미 개차반처럼 굴던 자신의 평가가 급락하고 급기야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소속사 사장에게 불려가 한소리 듣던 그 날.
그게 바로 지금 바로 이 대본 수정에 발끈해 PD, 작가와 대판 싸운 뒤 벌어진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내리막이 시작됐다.
타고난 연기 재능 덕에 시청률도 좋고, 캐릭터 평가도 좋았고, 인기도 상승했지만 현장에서의 도윤에 대한 평가가 급락하기 시작한 시점.
이후 한 번의 조연을 더 맡아 열연하고 끝내 주연 자리까지 꿰찼지만…….
그 시점에서 마약 사건이 터졌고.
기다렸다는 듯이 도윤의 평소 행실에 대한 증언들이 속속 터져 나오며 완전히 몰락했던 과거.
함정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이 바닥이 실력 하나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 그럴 일은 없다.’
돌아온 이상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시간이야 얼마나 걸리든.
도윤은 바보처럼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 두 번째 기회는 회귀 전 10년을 기다린 끝에 거머쥔 기회만큼이나 소중했으니까.
“일단 이번 배역부터 처리해야겠군.”
하필이면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인 시점으로 돌아온 게 조금 황당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는 더 이상 재능만 믿고 날뛰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겸허하고 끈질긴 인내로 10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버틴 사람.
도윤은 누명을 쓰고 다시 기회를 얻기까지 걸린 그 1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이 해 왔던 일들을 떠올리며 대본 속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기억나. 여주를 사이에 두고 남주와 끝까지 대적하던 연적(戀敵) 캐릭터였지. 악역은 아니었고…… 나름 이유가 있는 녀석이었었나.’
도윤이 이 미니시리즈 드라마 에 12화 이후 합류하면서 맡게 된 배역.
로맨스 장르에는 흔하디흔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사이를 훼방 놓는 스테레오타입의 캐릭터이자.
‘미니시리즈에 하나씩 있는 캐릭터지.’
극 중반 이후부터 등장해 남주와 여주 사이의 연애전선에 훼방을 놓고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역할.
하지만 마냥 스테레오타입이라 할 수도 없다.
그 훼방 과정에서 스스로 물을 먹어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주기도 하고, 허당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귀여워하는 시청자도 있었으니까.
도윤의 입에서 10년 전에 펼쳤던 대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뇨,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혜선이가 당신을 선택했다 해도 난 포기 못 합니다.”
“그래서, 돈도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혜선이한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사랑? 그것도 가진 자나 할 수 있는 거죠. 안 그런가요, 도민우 씨?”
돈 많고 잘생긴 데다 사회적 지위까지 확실한 재벌 3세.
지금 기준으로 오글거리는 대사들의 향연이 펼쳐졌지만 도윤은 오히려 반갑다는 듯 더욱 몰입하기 시작했다.
“훗. 이거 보입니까? 도민우 씨의 친구분 가게 권리서입니다. 여기 안을 보면…… 뭐야, 이, 이거 왜 비어 있어? 어, 어디 간 거지? 분명 넣었는데!”
“가만 있어 봐! 여기 분명히…… 기다려! 차에 다녀올 테니까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 어억! 아이 씨! 길에 이딴 게 여기 왜 있는 거야!”
그러다 ‘형찬’이 제 꾀에 빠지는 장면에서는 방금의 그 찌질함과 비호감을 벗어나 바보 같은 표정을 순식간에 짓는다.
아무리 도윤이 주목받는 조연이었다고 할지언정 회귀 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10년의 인고.
그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인 내공이 발휘되기 시작했으며.
도윤의 주변으로 감정의 격류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대본을 보고 리딩하는 것뿐인데도 달라지는 분위기. 회귀 전, 악성중피종 환자 역을 맡아 연습하던 그때와 같았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최도윤이 리딩을 다 하네.”
“보여? 아주 빨려 들어가겠다. 30분 전부터 저러고 있어.”
“뭘 잘못 먹었나. 지 평판 안 좋은 건 알고 있나 봐?”
꽤 많은 사람들이 도윤의 이 모습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
처음에는 리딩을 한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보니까 연기 꽤 하네. 비주얼만 좋은 줄 알았는데.”
“왜, 에서도 임팩트 컸잖아. 대사 한 줄로.”
“그건 분위기랑 비주얼 덕이지. 비주얼 원툴로 뭘…… 그래도 뭐, 나쁘진 않은데.”
몇몇은 저도 모르게 힐끗대며 도윤의 리딩에 빠져들었고, 비주얼에 반한 몇 사람은 아예 넋을 놓기 시작했다.
차가운 인상과 칼날로 베어낸 듯 날카롭게 떨어지는 콧날.
마치 유령처럼 흰 피부.
쭉쭉 뻗은 팔다리.
그런 도윤이 살짝 짝다리를 짚은 채 대본을 들여다보는 광경은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이었다.
“진짜네.”
도윤의 매니저, 성호는 그런 도윤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탠바이 직전까지 차에서 처자다가 나오는 놈이 참 신기하네. 진짜 뭐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냐? 안 그러고서야…….”
하지만 다른 배우의 매니저가 중얼거리는 순간 성호는 저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아 새끼, 말 함부로 하네. 야, 그래도 내가 매니전데 담당 배우 욕하는 거 옆에서 들으면 좋겠냐? 뭐? 머리에 총? 이 자식이…….”
“야,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거 엄청 발끈하네. 어제는 뭐 때려친다 뭐 한다더니. 너 저 인간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 지금 네 말이 심하잖아. 말이.”
“알았다, 알았어.”
성호는 옆에 있던 매니저를 흘기면서도 속으로는 설마 했다.
‘PD한테 무슨 욕이라도 먹었나? 이상하다. 그런다고 달라질 인간이 아닌데.’
하지만 지금까지 봐온 게 있었기에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도윤이 대본에서 시선을 떼고 한숨을 돌리는 그 순간.
“형, 여기요.”
잽싸게 달려가 평소처럼 도윤이 피우던 담배를 내민 성호는 깨달았다.
“아. 됐어. 담배 끊으려고.”
“네?”
“그거 버려. 너 피우든가.”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심지어-
“나 슬슬 스탠바이라서 이제 간다. 그리고 차에서 좀 쉬어. 피곤해 보인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말까지 들려왔다.
‘차에서 좀 쉬라고?’
성호는 멍한 표정으로 도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진짜 쉬었다간 영원히 쉬게 될 거야. 암, 그렇고말고.’
속지 말자.
저놈은 최도윤이다.
방지턱 넘느라 차가 흔들린 걸 가지고 지랄 발광을 하던 최도윤.
성호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며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