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31
31. 차기작 오디션(2)
탕, 탕, 탕, 탕.
정확하고 섬세한 칼질.
칼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깔끔하게 잘린 양파 조각들이 속살을 드러내고-
“정신 차려! 손님들한테 그따위 음식 먹이고 싶어? 당근을 누가 그따위로 썰어!”
마치.
옆에 정말 부하 직원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를 잡는다.
그 순간 조연출은 깨달았다.
도윤이 왜 저렇게 뜸을 들였는지.
“시간 없어. 빠르게 쳐내. 거기, 당근 다시 보고 썰어. 그리고 내가 이 짬에 여기 서서 양파 잡아야겠냐? 도대체 펑크가 몇 번이야!”
쾅!
도마를 쾅 치며 더해지는 신경질적인 대사.
강렬한 카리스마가 엿보인다.
마치.
진짜 호텔 주방 헤드셰프처럼.
“칼 똑바로 잡아. 2년 차라는 새끼가 그것밖에 못 해? 여길 똑바로 잡으라고! 어디 가서 내 밑에서 배웠다고 하기만 해봐.”
실력은 충분할 정도로 넘치지만.
그 외 다른 것들을 갖추지 못한 주인공 ‘오민석’.
주방에서 고성이 오가고 갈굼이 이어지는 건 일상이라지만, 지금 도윤이 연기하는 ‘오민석’은 그런 수준을 넘어 보는 사람의 피를 말릴 정도였다.
“야. 너 나가! 나가라고! 야. 내가 너한테 몇 번을 말하냐? 귀 없어? 아니면 이제 안 듣겠다는 거야!”
뭐라고 해야 할까.
갈구는 연기가 제법-
일품이라는 느낌?
‘괜찮은데.’
그리고 중간중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칼에 파슬리, 마늘, 베이컨 등 각종 재료들이 다져지며 팬으로 투입된다.
휙-! 휙-!
불을 올린 뒤 팬을 쥐고 선보이는 스냅이 예사롭지 않다.
이런 가운데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조연출은 물론.
꿀꺽.
지켜보던 창욱의 목울대도 울렁인다.
‘제대론데.’
그리고 조연출은 어쩌면 오늘 일찍 퇴근하고 맥주라도 한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지금 당장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저 냄새.
위장이 자극되어 미칠 지경이다.
지금 도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 까다롭던 창욱도 흥미롭게 보고 있을 만큼 ‘완벽한’ 오민석이었다.
이런 가운데.
감독 창욱, 조연출뿐만 아니라 오늘 오디션 진행을 위해 대기하던 스태프들도 허기짐을 느끼던 그 시점에서.
“3T. 바로 내보내.”
마침내 도윤의 요리, 크림 파스타가 완성되고.
“이상입니다.”
도윤이 지배하고 한순간 바쁜 호텔 주방을 방불케 했던 이 공간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짝, 짝, 짝.
조연출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제법이군.”
창욱은 드디어 요 며칠 사이 가장 진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해 온 건가? 아니면, 원래 요리를 배운 건가?”
“둘 다입니다.”
“어느 한쪽이든 상관없었는데, 둘 다라니. 더 좋군.”
창욱이 조연출에게 고개를 돌렸다.
“뒤에 몇 명이나 남았지?”
“32명입니다.”
“더 나은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창욱이 손뼉을 쳤다.
“일단 20분 정도 휴식하지. 환기도 시킬 겸. 다음 순서에 들어오는 배우들이 어디 배고파서 연기하겠나?”
지금까지 말을 아끼던 창욱.
그러나 한번 마음에 들자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붓고 있었다.
도윤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분석이 철저하더군. 방금 자유연기로 보여준 플래시백 장면은 그대로 대본에 삽입해도 될 정도야.”
이만한 극찬이 어디 또 있을까.
그 까다롭다는 창욱의 마음에 들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흠, 요리 실력도 대단해서 이만하면 풀샷으로 잡아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고…….”
사락, 사락.
도윤의 경력을 확인해 본 창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2012년에 첫 단역으로 데뷔했다고?”
“그렇습니다.”
“다시 보니 새롭군.”
까다롭다고 정평이 난 창욱을 이렇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좋군. 별문제 없으면 연락이 갈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도윤은 속으로 환호하고.
이 틈을 타 슬쩍 물었다.
“그럼 잠시 쉬시는 동안 요리 좀 맛보시겠습니까?”
그 말에 잠시 고요해진 분위기.
하지만 아직 오디션장에 남은 냄새로 보아…….
그 제안을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 * *
출연이 확정되고.
개런티 협상 자리에는 수철이 함께했다.
그리고 도윤과 미리 이야기해둔 ‘러닝 개런티’ 건을 드디어 입에서 꺼냈다.
“출연료는 회차별 6백만 원에서 3백만 원 선까지 낮출 의향이 있습니다. 대신, 배우 측에서는 ‘러닝 개런티’ 조항을 원합니다.”
러닝 개런티(Running Guarantee).
흥행 결과에 따라 출연료 외 추가적인 개런티를 지급받는 방식.
보통 손익분기점을 기점으로 관객 한 명당 50원에서 100원 사이의 금액이 책정된다.
만약 500만이 손익분기점이라면, 500만하고도 1명부터는 기존 출연료 외 추가적인 수익이 발생하는 셈.
이 경우 1,000만 관객을 달성하고 1명당 100원 조항을 삽입했다면, 5억의 추가 수익을 얻는 것이다.
물론.
양날의 검이다.
손익분기점을 못 넘기면 기존 출연료를 깎은 의미가 없어지니까.
‘어쩔까.’
그런데 의외로 제작사 측에서는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무래도, 당장 제작비가 부족하다는 점이 그들의 발목을 잡은 듯했다.
‘하긴. PPL도 어지간해서는 안 받는 양반인데.’
창욱은 PPL을 꺼리는 감독이다.
어느 감독이 자기 작품에 맥락 없이 끼어드는 PPL을 좋아하겠냐만, 창욱은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특히 드라마와 달리 만회할 여지가 없는 영화였기에 더더욱.
받더라도 광고주가 싫어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여낼 지경이니.
거기에 첫작 에서 들어온 PPL을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쓰는 바람에 그다음부터는 PPL이 뚝 끊겨버렸다.
우스갯소리로 ‘광고주가 제일 싫어하는 감독’이라 할 정도.
그래서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충당할 수 있는 PPL이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들어온 제안이 꽤 반가웠던 셈.
이런 와중에 도윤은 웃고 있었다.
‘좋은데.’
미래의 창욱이 가지게 될 명성.
그리고 이 대본의 퀄리티.
이 두 개를 종합해 봤을 때…….
실패할 거란 생각은 안 든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주연으로서 이창욱이라는 감독과 인연을 맺어두는 셈이니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이렇듯, 도윤은 상당히 계산적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에 새삼 회귀했음을 깨달으며-
서걱서걱.
드디어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이것으로 도윤의 출연이 전격 결정되고.
[최도윤, 이창욱 감독과 손잡았다…… 출연 확정!] [최도윤, 이제 드라마를 넘어 영화로? ‘떠오르는 신인!’] [‘2년 만에 주연’ 최도윤, 이 성장세가 무섭다] [최도윤, 이제는 충무로로…… 셰프 주인공에 도전!]이에 맞춰 이엔 엔터 쪽에서 뿌린 보도자료들이 포털을 장식하고 ‘최도윤’ 이름 석 자가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까다로운 감독’ 이창욱, 최도윤 주연으로 택한 배경은?]-와 영화도 찍네 ㅁㅊㄷㅁㅊㅇ
-ㄹㅇ 성장세 개빠름
-비주얼 원툴인 줄 았았는데 연기도 잘하자너 ㅋㅋㅋ
-비주얼 원툴 오명은 에서 이미 벗었는데 뭔소리?
-ㄹㅇ 보면 비주얼 보러 갔다가 연기력에 빠져버림. 출구가 없음.
-기대된다ㅋㅋㅋ 꼭 예매해야지.
-감독 엄청 까다롭다는데 오디션을 용케 뚫었네;;
-아 할줄 알았는데 ㅠㅠㅠ
그리고 쏟아지는 댓글.
이미 의 인기로 도윤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에 대한 기대심리가 반영된 것.
이런 와중에 도윤이 창욱의 를 택했다는 소식을 접한 업계 관계자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아, 이번에 잡았어야 하는 건데!”
“영화 터지면 몸값 더 오를 텐데.”
“이번엔 조졌네. 다른 배우 찾아보자고. 작가님한테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아쉽다는 반응과.
“예술병 걸린 거 맞네.”
“가도 이창욱 감독 작품이야?”
“드라마나 계속하지 뭔 벌써부터…….”
약간의 질투심이 뒤섞인 부정적 반응이 있었고.
“별 이야기가 다 나오네요.”
도윤은 이 소식들을 전해듣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형이 작품 뭐 하든 지들이 뭔데 구리다느니 뭐느니 난리야?”
어차피 성호가 대신 화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남의 평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
평가야 바꾸면 그만이니까.
도윤이 성호가 더 흥분하기 전에 적당히 화제를 돌리려던 그때.
“오빠, 이거 좀 보세요.”
민주가 옆에서 슬며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뭔데?”
“오빠 카페요. 최도윤 팬카페.”
“이런 게 생겼어?”
“네. 얼마 전에요.”
“용케 찾았다?”
“제가 부매니전데요.”
배우 전속 스타일리스트가 배우 팬카페 부매니저라니.
회사 노조에 기업 간부가 침투한 느낌이 이런 걸까.
‘어떻게 부매니저가 된 거야?’
“오빠 희귀짤 보내주니까 카페 매니저가 좋다고 부매니저 달아주더라구요. 아, 원래 내가 만들려고 했는데. 까비.”
“…….”
“괜찮아요. 이상한 사진 아니니까. 저번에 오빠 커피앤탑 화보 촬영할 때 같이 찍은 거요.”
“부매니저로 뭐 하게?”
“앞으로 관리하면서 어그로 끄는 놈 있으면 미리미리 쳐내게요. 그런 놈들 그냥 두면 나중에 물만 흐리거든요.”
이런 가운데 보이는 민주의 닉네임은 ‘여포네집사’였다.
“여포네 집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 여포예요. 바보거든요. 츄르만 보면 고장이 나서. 아, 맞다. 우리 여포 조만간 병원 데려가야 하는데.”
“…….”
참 민주다운 작명 센스였다. 츄르만 보면 고장이 나는 고양이라.
그나저나 팬카페명은.
‘달달한 도라떼’.
“그리고 지금 가입자 800명 넘었어요.”
“진짜?”
“네. 제가 홍보 중이거든요. 가입하라고. 그리고 다른 가입자 데려오면 등업 포인트 주기로 했어요. 희귀사진 볼 수 있는 게시판 보려면 등급업 필요하니까요.”
그거 다단계 아닌가.
심드렁하게 말하던 민주는 문득 휴대폰을 도윤 쪽으로 돌렸다.
“웃으세요.”
“응?”
찰칵.
말릴 새도 없이 사진이 찍히고.
“뭐 하려고?”
“배우 본인이 카페에 인증 한번 해줘야죠. 그럼 가입자 엄청 늘거든요. 오빠 아이디 있으면 줘봐요.”
도윤은 하는 수 없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불러주고 될 대로 되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에서만큼은 철두철미한 민주이니 말이다.
그리고 팬카페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 보면 아주 좋은 일이다.
계속 잘 되고 있다는 증거니까.
“형, 시간 됐어요.”
뭐, 아무튼.
이제 시간이 됐다.
도윤은 문을 열고 내리려다 성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커피 좀 사와.”
“당연하죠.”
“너 도라떼 사 오면 죽는다. 다른 걸로 사 와.”
“서, 설마 제가 사, 사 오겠어요?”
“응. 그러니까 다른 거 사 와. 내 마음에 들 만한 걸로.”
말 안 했으면 당연히 사 왔겠지.
요새 그걸로 틈만 나면 놀리니까.
그래도 뭐.
‘커피앤탑’에서 아메리카노 다음으로 제일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게 ‘도라떼’라고 하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얼마 전에 새로운 포토카드 출시를 위해 촬영도 마쳤고.
물론 도윤은 도라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달아서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걸 마실 때마다 회귀 전의 자신의 행동이 떠올라서 그렇다.
오히려 그래서 더 겸손해지는 것도 있지만 말이다.
도윤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성호를 한 대 쥐어박을까 고민하다 차에서 내렸다.
“형, 이따 봬요.”
“오냐.”
난생처음으로 참여하는 영화 리딩.
딱히 두려움은 없었다.
그저-
가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면 그만.
물론.
배우의 앞길을 막는 건 이런 종류의 생소함만 있는 게 아니다.
“반가워요. 최도윤 배우. 장수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
“패기가 대단하다던데. 연기 좀 하나 봐요. 준비성도 철저하다 들었고.”
그랬었지.
이런 바닥이었지.
도윤은 리딩장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가장한 시비를 걸어오는 배우를 바라보며.
“반갑습니다, 선배님. 최도윤이라 합니다.”
웃었다.
어디 한번 와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