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43
43. 예의가 안 바르길 바라야 하나?
악역.
엄밀히 말하면 해본 적은 있다.
“ 때처럼 개과천선하고 코믹한 악역 말고, 진짜 악역이요. 어우, 아까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하지만 성호의 말처럼 엄밀히 말해 진짜 소름 끼치는 악역은 아니다.
의 ‘김형찬’은 결국 개과천선하고 여주인공을 포기한 뒤,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사는 결말을 맞이하니까.
“형 눈빛 보면 딱 그 느낌 들어요.”
“무슨 눈빛?”
“음…….”
성호는 헙, 입을 다물었다.
도윤의 눈빛을 보니 숨이 턱 막힌 것이다.
“혀, 형?”
“쫄긴.”
도윤은 픽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그래.
악역.
‘나쁘진 않지.’
한번 해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배우가 다양한 연기를 해보는 건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아주 중요하니까.
물론, 고착화된 배역만 맡고도 인기가 좋은 배우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도윤과 추구하는 방향과 다르다.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야지.’
마음에 드는 배역이라면.
그냥 다 해볼 생각이다.
도윤은 그냥 연기를 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저기 쌓여 있는 대본들에는 그런 배역이 없다.
있어도 단발성 출연이라 분량이 너무 적거나,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 캐릭터가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깊이가 없다고 해야 할까.
극의 흐름을 위해 등장시키고, 극이 끝나면 곧장 퇴장하는 그런 캐릭터들뿐.
“형 악역하면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마스크도 원래 날카로운 마스크잖아요. 민주 누나도 종종 이야기했거든요. 악역 하면 시청자들 여럿 밤잠 설치게 할 거라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을 걸 상상하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뭐, 배역이 있으면 모를까…….’
방금 성호가 말한 것과 같은 배역이 나오는 작품을 알긴 하지만, 아직 쓰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였더라?
귀신을 보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였는데.
거기 경찰로 나오는 사람이 사실 알고 보니 사이코패스였고, 또 알고 보니 안에 악귀라는 존재가 들어 있어 그런 일들을 저질렀다는 설정.
“봐봐. 또 웃으신다. 아까 그거 때문에 그런가? 이제 웃기만 해도 무섭네.”
“더 무섭게 해줄까?”
“형, 제가 잘할게요.”
성호가 백기 투항에 도윤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니까 잘하자. 요새는 팬카페 안 들어가지?”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전 들어간 적이 절대…….”
“아, 그래? 민주한테 한번 물어볼까? 민주 번호가…….”
“그, 그, 그게요!”
도윤은 진짜 전화를 걸었다.
물론, 민주에게 전화를 한 건 아니다.
“아, 강 셰프님. 선물 잘 받았습니다.”
-오, 벌써 갔어요?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너무 마음에 듭니다.”
성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조만간 제가 술 한잔 살게요. 칼을 그냥 받기엔 좀 그렇네요.”
-그런 것도 알아요? 하하. 젊은 사람이라 미신 같은 거 안 믿을 줄 알았는데.
흔하디흔한 미신.
칼을 선물로 준다는 건, 그 사람과 관계를 끊겠다는 뜻.
그래서 받은 쪽에서 소량이나마 돈을 주고 ‘칼을 판 것’처럼 하는 경우가 있다.
원래 도윤은 미신을 믿는 쪽이 아니었지만.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은 마당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좀 그랬다.
“돈 드리는 대신 맛있는 술 한잔 사겠습니다.”
물론.
이참에 민혁과 한잔 꺾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기대할게요. 아니면 나중에 제 가게로 와요. 문 닫고 내 요리 안주 삼아서 마시는 것도 좋지.
“너무 좋은 생각 같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한 도윤은 성호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쫄긴.”
“아, 형! 진짜 전화하는 줄 알았어요.”
“찔리는 게 있긴 한가 보네?”
“그, 그게요.”
똑똑. 철컥.
그때 성호를 살린 건 이수철이었다.
“아, 도윤이 집에 아직 안 갔네? 다행이다.”
“아, 네. 팀장님.”
“팀장님, 오셨어요.”
수철이 씩 웃었다.
“대본 보고 있었냐?”
“네.”
“이번에는 뭐 해보려고? 마음에 드는 건 있어?”
“아직 눈이 가는 건 없네요.”
반대를 무릅쓰고 와 를 연이어 택했던 도윤다웠다.
저 많은 대본들을 다 읽은 걸로 아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다니.
“정확히는 당기는 배역이 없네요. 아직까지는.”
“벌써 예술병 걸리고 뭐, 그런 건 아니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도윤의 말에 수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야. 네가 뭘 하든 이젠 뭐……. 참, 아무튼 아직 안 정했다니 다행이다.”
“다행이요?”
“ 같이 했던 강 작가 알지?”
강미나.
종방연에서 도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가.
술에 잔뜩 취해 누나라고 불러보라던 미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네. 알죠.”
“그쪽에서 이번에 케이블로 차기작 들어가는데 도윤이 너랑 미팅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캐스팅 건으로. 물론 주연.”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요?”
“그래. 그리고 아직 대본 아무 곳에도 안 보냈대. 너부터 만나고 싶어서. 아, 그리고. 배역은 악역이야. 그것도 아주 기깔난 악역. 상세한 건 가서 듣는 게 나을 거야.”
악역이라.
도윤은 성호를 힐끗 바라봤다.
성호는 도윤보다 기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거절해도 돼. 근데, 대본 아직 아무 데도 안 보낸 게 사실이면 좀 고민해 볼 만해. 보통 그렇게는 안 하거든. 그쪽에서 아마 널 강력하게 원하는 것 같다.”
“음.”
도윤은 수철이 내민 대본을 받아들었다.
제목은 .
에 이어.
이것 역시 자신의 기억 속엔 존재하지 않는 대본이다.
‘또 미래가 바뀐 건가?’
원래대로라면 강미나는 이 가 아니라 다른 작품을 쓴다.
그리고 신통찮은 성적을 기록하며, 이후에도 한참이나 고생하다 뒤늦게 빛을 본다.
때문에.
이건 아예 모르는 대본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흥미가 동한다.
‘그 남자의 메모리…… 제목은 좋은데.’
사락, 사락.
받아든 대본을 한 장 한 장 빠르게 넘겨보던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대본 읽어보고 결정할게요. 아, 미팅만이에요. 최종 결정은 가서 들어본 다음에 하겠습니다.”
“오케이. 언제까지 답 줄래?”
도윤은 힐끗 벽을 바라봤다.
수철은 도윤이 달력을 살피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윤이 바라본 건 달력이 아니라 시계였다.
“세 시간 안에 답변 드릴게요.”
* * *
드라마 제작사, 데브픽쳐스(DevPictures) 사무실.
강미나 작가.
그리고 강미나 작가의 대본을 본 순간 홀린 듯 연출을 맡게 되었다가 지금 후회하는 PD 유재훈.
‘내가 미쳤지. 어우, 이거 로맨스도 없는데 어떻게……. 아무리 요새 케이블 판이 커진다지만 괜찮을까?’
재훈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요즘 케이블이 뜬다기에 과감하게 이직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여기 와서 강미나 작가의 이 대본, 를 본 게 실책이었다.
‘미치겠네. 도대체 뭐지? 로맨스도 안 두드러지면서 왜 이렇게 몰입되는 거야?’
는 쉽게 말해 로맨스는 곁다리로 챙기는 드라마다.
중심이 되기는커녕 그냥 살짝살짝, 보일 듯 말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 는 기억을 잃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기억을 한 조각, 한 조각 떠올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자아와 과거의 자아가 갈등하는 게 바로 포인튼데…….
‘가 로맨스 별로 안 넣고도 성공하긴 했지만…… 글쎄. 에휴, 모르겠다. 대본 좋은 건 사실이니까. 그나저나 강 작가가 이런 걸 다 쓰네. 미니시리즈만 쓰던 양반이.’
아무튼 뭐,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다.
무르기엔 강미나 작가의 성질이 만만찮으니.
여기서 안 하겠다고 했다간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털이 다 뽑혀도 이상하지 않을 참이다.
“근데 말이에요, 이거. 최도윤 배우랑 엄청 어울리겠죠? 마스크 보세요. 비주얼도 그렇고. 처음에는 순진하고 성실하게 연기하다가 기억이 하나둘 깨어나면서 팍! 감정이 변하는 거죠. 그리고 인격도 변해가면서…….”
“그래, 그래. 근데 최 배우가 할까?”
“그게 제일 문제죠.”
시무룩해진 미나.
사실 쓸 때는 몰랐는데.
써 놓고 보니 알았다.
타이밍으로나 비주얼로나 최도윤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차가운 마스크를 장착했고, 연기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기에 얼마 전 영화 촬영을 마쳤다는 소식까지.
스케줄이 비어 있을 확률이 높은 셈이다.
물론 약간의 걱정은 있었다.
‘못 잡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도윤의 주가는 속된 말로 ‘떡상’ 중이다.
로 ‘강 대리 신드롬’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로 반전 요리 실력을 선보이며 ‘요섹남’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드라마 PD들은 드라마에 화제성만 더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사람들.
때문에 안 그래도 라이징 스타로 주목받는 데다, 요리 실력으로 화제성까지 갖춘 배우를 향해 엄청난 러브콜이 몰려든다고 들었다.
‘다들 최도윤을 노리는 거지.’
이제는 최도윤이라는 배우가 하나의 키워드가 된 셈이다.
거기다 하나 더.
미나의 주력은 사실 이런 스릴러 종류가 아니라 미니시리즈.
그래서, 조금 걱정이었다.
주력 장르가 아닌 다른 장르를 썼다는 이유로 배우들이 의문을 품을까 봐.
하지만 미나에겐 그럴 법한 이유가 다 있었다.
재훈이 살짝 물었다.
“근데 말이야, 잘 쓰던 미니시리즈 안 쓰고 갑자기 이런 대본은 왜 쓴 거야? 아, 퀄리티 의심하고 그러는 건 절대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아, 그거요?”
미나는 입꼬리를 있는 대로 말아 올리곤 이를 갈았다.
“유정연 그년 때문에요.”
“유정…… 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을 떠올린 재훈.
“걔가 저한테 동창회에서 뭐라고 했더라? 평생 미니시리즈 쓰면서 아줌마들 발바닥이나 긁어주라고 했었거든요.”
“그, 그래?”
재훈은 그 날이 혹시 항간에 떠돌던 미나가 정연의 뺨을 후려갈겼다는 사건이 일어난 그 날과 일치하는지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다.
“그래서 쓴 거예요. 유정연 코 좀 납작하게 해주려고. 그리고 타이밍도 좋잖아요? 망해서 유정연은 한동안 쉴 테고,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이걸로 성공하면…….”
요컨대.
정연이 미나를 도발했던 것과 가 부진했던 기존의 과거에-
도윤이 회귀함으로써 가 원래의 미래와 달리 막판 큰 성공을 거두자 미래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탕!
미나가 갑자기 테이블을 쳤다.
“그러니까. 최도윤 배우가 꼭 합류해야 한다 이 말이죠.”
“유, 유정연 작가 때문에?”
“아뇨. 그건 아주 작은 이유뿐이에요. 물론 그년 코가 납작해지는 것도 볼만…… 그거 알아요? 걔 코 고친 거?”
알 턱이 있나.
“모르시면 됐어요. 아무튼, 최도윤 배우가 와야 이 배역은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재훈은 느껴지는 섬뜩함에 식은땀을 흘렸다.
“일단 오, 오면 이야기하자고. 진정해, 진정.”
“동창회 때 빰을 더 세게 후렸어야 했던 건데…….”
사실이었구나.
재훈은 가급적 미나 앞에서 정연 이야기는 삼가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나저나 최 배우, 대본 보고 온다고는 했는데…….”
그나마 희소식은.
도윤이 일단 이 자리에 오긴 한다는 것.
1차적으로는 대본이 마음에 들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그냥 최도윤이라는 배우의 예의가 특출나게 바른 것일 수도 있고.
왜. 그렇지 않은가.
급 높은 배우들은 굳이 거절하기 위해 스튜디오까지 찾아오지 않는다.
그냥 전화를 걸거나.
그도 아니면 소속사에서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는 게 전부.
‘예의가 안 바르길 바라야 하나?’
미나는 도윤이 거절하기 위해서 온다고 한 게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일단 입을 잘 좀 털어 봐야죠. PD님, 이거 만약 오케이되면 편성 언제쯤 될까요?”
“빠르면 9월? 오케이사인 떨어지고 캐스팅 완료한 다음에 리딩으로 확정까지 지으면…… 얼추 그쯤 될걸?”
“조오금 늦네요.”
“쪽대본 안 쓰면 좋은 거잖아. 요새 분위기가 쪽대본 안 가려고 한다고.”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일단 제가 쫑파티에서 코를 살짝 꿰어두긴 했는데…… 되려나 모르겠네.”
“어이구, 이 바닥에서 그냥 지나가는 말에 오케이하는 거 별 소용 없는 거 알잖아?”
“그야 그렇지만, 기왕이면 최 배우로 하고 싶다구요. 다른 배우들도 좋긴 해도, 기왕이면요.”
여하튼 그렇게 미나가 희망 사항을 열심히 피력하던 그때.
“지금 최 배우 도착했다고 합니다. 바로 올라온대요.”
스태프가 도윤의 도착을 알려오자 두 사람은 재빨리 준비했다.
“네! 준비할게요. 아, PD님, 여기 실밥 묻었다.”
“냅둬. PD가 너무 깔끔해도 이상해. 적당히 더러워야…….”
그렇게 둘이 투닥거리던 사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안녕하세요, PD님. 작가님.”
수철과 성호, 민주가 차례로 미팅룸으로 들어섰고.
마지막으로.
“안녕하십니까. 신인 배우 최도윤입니다.”
도윤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