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48
48. 여기는 내 무대다(1)
며칠 뒤.
-선배님! 정말 감사하지 말입니다! 저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덕분에 저 너무 행복하지 말입니다! 소개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 야호! 나 이거 너무 마음에 들어요! 캐릭터 완전 대박. 이거 원래 캐스팅된 배우가 케이블로 튀었다면서요? 완전 바보 아닌가?
주섭에게 추천한 둘로부터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주섭도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둘 다 좋던데? 특히 그 박유준이라는 친구, 물건이야. 도대체 뭐 하는 친구예요? 경력 하나 없이 이창욱 감독님 영화 한 편 찍은 게 전부던데요?
특히 유준의 연기력을 극찬했다.
-덕분에 캐스팅 대략적으로 마무리될 것 같아요. 본촬영 가기 전에 우리 조만간 술 한잔합시다!
좋은 일이다.
한편으로는-
‘내 행동이 이렇게 나비효과를 부르기도 하는구나.’
새삼, 회귀한 자신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실감하고 있었다.
여하튼.
광고도 찍었고.
그렇게나 원하던 차정수 사인과 서이솔 사인도 가족들에게 전해줬겠다.
이제는 를 준비할 시간.
도윤은 자신의 오피스텔 방에 틀어박혀 분석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다한…… 사이코패스지만 작품 초반부에는 기억을 잃고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캐릭터지. 이거, 확실히 만만치는 않겠는데.’
배역이 정해진 배우가 해야 할 일은 이렇듯 배역을 분석하는 것.
그러나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두 개의 인격이 본격화되는 시점이 약 8부부터라지만, 도윤은 그전부터 전조를 느끼는 ‘이다한’을 연기하며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연기해내야 한다.
쉽게 말해 1인 2역.
어지간한 베테랑들도 쉽지 않은 도전을 지금, 연차로 따지면 아직 신인이나 다름없는 도윤이 하고 있는 셈.
그렇다고-
막막하진 않았다.
‘봐도 봐도 소름이 끼치는데.’
[동전 던지기로 잃어본 가장 큰 게 뭐요?(What’s the most you’ve ever lost in a coin toss?)]지금 도윤은 이전에 몇 번씩 봤던 영화와 드라마, 그러니까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을 보며 분석 중이었으니까.
도윤은 지금 보는 의 ‘안톤 쉬거’라는 캐릭터를 비롯해 수많은 작품들을 분석하느라 벌써 며칠째 집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다음은 이거.’
한 작품이 끝나고, 몇 시간에 걸친 분석을 마친 뒤 곧장 다음 작품을 재생시키는 도윤.
도윤의 등 뒤엔 알맹이만 쏙 빠진 DVD 케이스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리딩까지는 한 달…… 시간은 충분해.’
그러기를 다시 며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묘한 위화감마저 느꼈다.
감정이 정리되질 않는다고 해야 할까.
수많은 사이코패스 캐릭터들을 보고 분석했지만, 뭔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느낌은 없다.
캐릭터의 욕망.
캐릭터의 과거.
캐릭터의 결여.
수많은 것들을 분석해도-
“묘하게 와닿질 않는단 말이지.”
그래서 도윤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프로파일러(Profiler).
프로파일링을 통해 범죄 해결을 돕는 직업이자, 통계와 심리학 등 각종 학문에 근거하여 사건을 분석하는 사람들.
형사처럼 범인을 검거하고 수갑을 채우진 않지만, 적어도 범위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사람들.
그래서 도윤은 그들을 분석하기로 결심했다.
정확히는.
프로파일러들이 사이코패스 유형의 범죄자들을 분석한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조XX…… 30세. 7명 살인.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살을 시도하다 검거.”
“육XX, 48세. 10명 살인 및 강간. 범죄를 끝까지 부인하다 증거 발견으로 구속 기소.”
과연.
실제 사건들을 접하고, 사례를 분석하니 뭔가 떠오르는 기분이다.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고, 어떻게 잡히게 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죄를 실토하는지에 대한 일련의 과정들.
덕분에 급히 주문한 프린터에서 뽑아낸 종이가 수백 장을 넘어 천 단위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도윤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이렇게 하고 싶어서 돌아오고 싶다고 간절히 빈 거니까.
그리고 재능은 재능.
재능을 가다듬는 노력이 없으면, 그냥 재능 좀 있는 배우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치미는 역한 감정을 경계했다.
괜히 최근 들어 배우들이 메소드 연기법을 멀리하는 게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배역에 너무 동화된 나머지 배우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하필 이번 배역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물론 메소드 연기를 한다고 사이코패스가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도윤은 카메라 밖에서조차 이 배역에 빠져 지내고 싶진 않았다.
자신은 배우고.
이건 연기를 하는 직업이지.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직업이 아니니까.
“후우.”
그러다 밤을 지새길 여러 번.
마침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도윤.
그리고 샘플 대본에 빽빽이 적은 메모가 가득해질 무렵.
도윤은 날짜를 확인하고 문득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회귀한 뒤로는 참.
시간이 빨리 가는 기분이다.
* * *
성호가 충성 맹세를 잊고 다시 슬슬 기어오르기 시작할 무렵.
첫 리딩 날이 되었다.
거진 한 달 만에 집 밖으로 나온 도윤은 칩거한 사람치곤 꽤 깔끔한 몰골이었다.
거기에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형, 오늘도 도라떼 사 갈게요.”
한 달 동안 놀리지 못해 애가 탄 성호가 한마디 툭 던지자 도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요새 심심하냐? 대기하면서 할 게 없어? 쉬었더니 근질근질해?”
“하, 하하. 그럴 리가요.”
도윤을 놀리는 게 중독성이 대단해서 그런 거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살이나 좀 빼. 쉬더니 더 찐 것 같다?”
“저 매니전데요.”
“매니저 되려면 100kg 넘어야 한다는 조건이라도 있냐?”
“그건 아닌데…….”
하긴, 배우 스케줄 따라 덩달아 생활 불규칙해지고 개인 시간이라곤 가지기 힘든 매니전데.
“그럼 운동이라도 해. 너 그러다 일찍 죽는다. 아니다. 안 되겠다. 민주야.”
“네, 오빠.”
“나 촬영 길어지고 이럴 때마다 책임지고 얘 헬스장 데려가서 운동시켜. 아니면 니가 목줄 채우고 똥개훈련을 시키든가. 목표치 채우면 킬로당 보너스 줄게.”
“그거 흥미로운데요.”
과연 어느 부분이 흥미롭다는 걸까.
“아무튼 간다. 이따 보자.”
“다녀오세요, 오빠.”
“형, 저 진짜 운동…….”
툭.
그때 도윤이 시트에 놓인 자신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더니 성호에게 던졌다.
“이제 안 하겠다고 못하겠지? 간다.”
그리고 문을 닫고 걸어가는 도윤.
‘하여간 성호 저놈은…….’
살이 쪄서 옷 핏이 안 나오거나 하는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다.
회귀 전, 폐암 선고를 받았던 도윤이었기에 방금처럼 말한 것이다.
건강.
중요하다.
솔직히 성호에게 규칙적으로 생활하란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건강을 챙겨주고 싶었다.
‘하여간, 살이 얼마나 쪘는지.’
여하튼.
데브픽쳐스 사무실에 도착한 도윤은 곧장 리딩이 열릴 강당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하도 봐서 해지고 여기저기 메모하느라 까맣게 변한 대본을, 다른 한 손에는 물병을 든 채.
그리고 강당에 도착한 도윤은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텅 빈 강당과 자신의 팻말이 놓인 자리의 위치를 보고 묘한 쾌감을 느꼈다.
PD와 작가, 드라마를 이끄는 두 캡틴과 가장 가까운 자리.
작년.
를 시작할 때만 해도 주연과 단역 사이, 중간이었던 걸 생각하면…….
‘아니지.’
하지만 그깟 자리.
뭐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쾌감은 마약처럼 사람을 중독시킨다.
취하지 말 것.
도윤은 회귀 직후부터 다짐했던 말들 중 하나를 떠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도대체…… 뭐야? 내가 왜…….”
“누, 누구요? 제, 제가 연기를 한다구요? 제가 배우라구요?”
“아니야, 아니라고! 윽…… 머리가, 너무…….”
기억을 잃은 사이코패스 살인마이자 톱스타 연예인, ‘이다한’의 대사가 섬뜩한 감정을 타고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묘하게 이 부분이 안 맞네.”
도윤은 대사를 치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바로 끊고 톤을 바꾸거나 강세를 다르게 주는 등, 곧 있을 리딩에 앞서 쉼 없이 연습을 이어갔다.
지난 한 달.
이 배역, ‘이다한’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분석을 했음에도 말이다.
그런 와중에 도윤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게 사이코패스 살인마 배역에 동화되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이 지금 연기를 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기뻐서 그런 걸까.
확실한 건, 누가 와도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도윤이 몰입했다는 사실이다.
“몰입 좋네.”
도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은편.
역시나 감독과 가까운 자리에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선배님?”
“반가워. 우리 오랜만이지?”
한유나였다.
저 피곤해 보이는 얼굴.
에서 같이 호흡을 맞춰봤던 그 얼굴이 맞다.
평소에는 죽어가는 듯이 피곤해 보이다가 카메라 앞에만 서면 생생해지는 저 배우.
“선배님도 캐스팅되셨을 줄 몰랐습니다.”
“제작진이 엠바고 요청했어. 반전 새면 안 된다고.”
생각해 보니 그렇다.
첫 리딩 날까지 어떤 배우들이랑 함께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딱 너만 기사 나갔어. 캐스팅된 거.”
“본의 아니게 죄송하네요.”
“죄송할 것까지야. 제작진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유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손을 홰홰 내저었다.
그사이 도윤이 물었다.
“그럼 이번에 ‘서지아 기자’ 역 맡으신 거예요?”
“잘 아네?”
“그 배역 외엔 안 떠올라서요.”
유나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피곤함이 내려앉은 얼굴 아래 보이는 미소라 묘하게 눈에 띄었다.
기억하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카메라 앞에 서기 전이나 연기할 때 외에는 항상 체력을 아끼는 모습이었는데.
‘리딩 날이라 그런가?’
“드디어 다시 같이하게 됐네? 몇 달 만이지? 아무튼 잘 부탁해. 재미있을 것 같아.”
“저도요.”
한유나.
미래의 로코퀸으로 불리는 배우.
같이하게 된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겠지.
“뭐. 정수 오빠는 없지만. 그나저나, 주연 두 명이 먼저 온 건 또 처음이다.”
“그러게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당 문이 열리며 다른 배우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최도윤입니다.”
“오, 최도윤 배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캬. 장안의 화제. 신인상 탄 최 배우. 드라마 잘 봤어요. 이번에 그럼 주연인 건가?”
“어이쿠, 이거 여기서 미래의 대스타를 만나네.”
그리고 보이는 반응들은 확실히,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물론 이렇게 살갑게 반응하는 사람들 말고도 애매하게 인사만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도윤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기보다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 등이 그 이유일 것이다.
사실 그거야 뭐.
금방 해결될 문제.
이 배역, ‘이다한’을 준비했던 시간들.
그걸 떠올리자 자신감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리딩이 시작되면, 이 공간을 자신의 무대로 바꿔버릴 자신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