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21
······라고 생각했으나 최근 그 기록이 경신되었고 작품당 실패 횟수라면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갈아치워 지고 있었다.
그 일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주술사 집단 ‘검은 호랑이’의 수장 임진혁이었다.
“저기요! 제가 정말 잘못했거든요!”
태화가 급히 고개를 꺾자 바로 옆으로 얼음 가시가 스쳤다.
서늘한 한기가 그의 뺨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그는 저것에만 3번 당한 전적이 있다.
“저기요 라니! 예의가 없지 않느냐!”
가볍게 일갈한 남자가 손을 휘젓자 그 자리를 얼음 가시들이 채웠다.
가시라곤 하나 하나하나가 손가락 굵기라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같이 떨어져 나간다.
느껴지는 감각은 살짝 따끔한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정신적 충격이 상당한 공격이었다.
“스승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급하게 소리치며 태화는 장갑 낀 손으로 허공을 쓸어내렸다.
촬영이었다면 녹색 스크린 앞에서 팬터마임 하는 손짓에 가까웠겠으나 대본 안 세계에서는 검게 빛나는 글자들이 떠올랐다.
한상일이 만든 주술 도구의 힘이었다.
전투 주술사라고는 하나 브로커의 실체는 주술사보다 장인에 가까웠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응용하는 머리를 가졌어도, 전개된 주술의 허점을 한눈에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녔어도, 그는 주술사로서 가장 중요한 주술 구현 능력이 떨어졌다.
다른 주술사들에 비해 새 모이만큼도 안 되는 미약한 능력이 없었다면, 그래서 문자에나마 힘을 실을 수 없었다면, 그는 단순히 머리 좋은 일반인으로 남았으리라.
“스승이라니! 난 5년 가까이 잠적한 제자 같은 건 없다!”
진혁의 일갈에 태화는 쓴웃음을 삼켰다. 잠적이라 말했지만 사실 쫓겨난 것이다.
도구와 문자 없이는 불 하나도 못 피우는 주제에 주술을 개선하고 도구로나마 평범하게 주술사 행세를 하는 그를 모두가 미워하고 시기했으니까.
물론 전부 태화의 추측이었지만, 그는 이후 전개되는 내용에서 등장하는 다른 ‘검은 호랑이’ 출신 주술사들의 시선과 태도, 그리고 경멸 어린 발언들을 통해 그 점을 확신했다.
‘도구로 온몸을 감싼 걸 건방지고 천박하다 손가락질하고, 도구 없인 주술도 못 쓰는 반푼이라 비웃고, 저리 오만방자하니 장로들에게 밉보여 파문당했다고 수군거리는데 틀릴 리가.’
한상일 성격상 그런 태도나 대화를 맞닥뜨리는 부분에서 전부 깽판 치는 대사가 따라붙었지만 이미 흘러버린 물은 그 얼룩이 선명했다.
“그럼 흑호의 주······!”
“흑호라니! 흑호라니! 정이 너무 없잖느냐!!”
‘진짜 무시무시하네······.’
태화는 남자의 격해진 감정에 힘입어 나타난 얼음 덩어리들의 향연을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한상일이 노력으로 커버해야하는 일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성공하는 괴물.
작중 한국 최강자인 만큼 상일의 스승은 굉장했다.
그리고 화가 나면 더 굉장해졌다.
‘그래도 이번엔 다 버텨냈네. 세 번 연속인가?’
슬슬 패턴에 적응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태화는 재빨리 호영의 뒤로 숨었다.
진혁의 입장에서 한창 흥이 오른 이 전투를, 단박에 끝내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저 여자 친구도 데려왔단 말이에요!!”
참 비굴하고 짠내 나는 방법이었다.
***
애인 데려왔다는 말에 둘을 방안으로 들인 진혁은 내용을 전부 들은 뒤 코웃음 쳤다.
“애인은 무슨. 짝사랑이지 그게.”
“짝사랑이라뇨! 제가 그런 걸 할 것 같습니까!”
‘흥!’이라며 태화는 도도하게 앵알졌다. 그러면서도 진혁의 어깨를 주무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야무지게 안마를 하던 그는 살짝 턱을 치켜올리며 뻔뻔하게 말했다.
“단순 구애입니다.”
태화는 저가 뱉고도 부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짝사랑이 맞는데,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되는 듯 상일의 대사는 절대 짝사랑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성희롱이겠죠.”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호영은 한 마디도 안 졌다.
‘칫, 어영부영 받아줄 줄 알았는데’라는 대사가 작게 따라붙자, 태화에게 어깨를 맡기고 있던 진혁이 불신어린 눈으로 그를 흘겼다.
오랜만에 본 제자의 행동이 영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너 거기까지 떨어진 거냐? ······잘라야 하나.”
그리고 좀 끔찍한 발언을 내뱉었다.
슬쩍 아래로 향하는 시선에, 태화는 기겁을 가장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뭘요? 뭘 잘라요! 전 데이트 신청 열다섯 번, 접촉 시도 네 번, 사귀자는 말 스무 번만 했을 뿐입니다! 다 실패한 것도 서글픈데 뺨도 맞았다고요!”
‘······평범하진 않지.’
태화는 대사를 뱉는 와중에 냉정히 생각했다.
작품 전개상 고작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정도 했으면 그냥 스토커다.
임시일지라도 일단 상사에 외모가 순하고 치근덕거리는 행동이 어설픈 새끼 고양이처럼 웽냥거려 넘어간 것이지, 혐오스럽단 시선을 받고 꺼려져도 할 말 없었다.
진혁도 그것을 알고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호영을 바라봤다.
“미안하군 이런 멍청이라. 애가 주술만 하면서 커서 인성 교육이 덜 됐어.”
“괜찮습니다. 며칠 겪고 알았으니까요. 국가를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감수해야할 수준까지 떨어진 상일의 처지가 안타까우면서도 동정심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태화는 살짝 서글퍼졌다.
***
“태화야, 너 초대장 받았다며? 축하해. 한잔 받아.”
효신의 먹자 모임의 고정 구성원, 이혜영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맥주를 들었다.
오늘 시음회의 주인공인 버디와이저사의 버디라이트 오렌지맛이었다.
“고마워요.”
“나이 차이 얼마 안 되니까 말 놓으래도? 편한 자리잖아.”
태화는 그 이상 뭐라 하는 대신 웃으며 잔을 뻗었다.
한살차이니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맞지만 그녀는 효신의 데뷔 동기였다.
7년차 까마득한 선배에게 말 놓는 모습을 친하지 않은 배우에게 보였다간 언짢음을 살지 몰랐다.
순식간에 떠 주시하는 이들도 많은데, 굳이 흠 잡힐 만한 언행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에 쌜쭉한 표정을 짓던 혜영은 곧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띤 채 잔을 채웠다.
배우 업계는 나이보다 인기와 년차를 먼저 따졌다.
호적 메이트 수준으로 친하거나 데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면 모를까,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 배우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일부의 반감을 사기 좋았다.
특히 이성의 경우 구설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엮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철벽이야, 철벽.’
한창 잘나가는 모습에 조금 더 친해져볼까 생각했던 터라 그녀는 약간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 자리가 개인적인 만남도 아닌 효신도 자리한 그룹 모임인 만큼, 밉보일 행동은 자제하는 편이 나았다.
기분 좋은 모임과 태화화의 관계 변화를 저울질 하던 혜영은 곧 결론을 내린 뒤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 태화 너 백종에 이어 창룡에서도 초대장 받았다며? 축하한다?”
바로 옆에 앉아 맥주를 병째 홀짝이고 있던 효신이 혜영의 여우 같은 행동에 피식 웃음을 흘리곤 바톤을 이어받았다.
들고 있는 병의 바닥 쪽을 태화의 컵과 부딪친 뒤 그녀는 단숨에 남은 술을 들이켰다.
“고마워요 누님.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강원 형님께는 안 될 거 같아서······.”
“흥. 감히 한정판을 사도 취급하는 아저씨 따위. 될까보냐.”
그녀는 ‘과일맛 맥주 따위 사도다!’를 외치며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강원을 잘근잘근 씹었다.
일주일 전, 11월에 있을 ‘창룡영화상 시상식’의 후보자들에게 초대장이 발부됐다.
태화의 초대장에는 남자 배우 주연상에 후보로 올라간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같은 작품에 출연한 최강원 또한 남우주연으로 노미네이트돼, ‘괴물’의 영향력을 알렸다.
“그래도 일 년차 루키보단 가능성 있으니까요.”
“글쎄. 또 모르는 일이지. 사실 흥행 면에서 네 역할이 가장 컸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가 관객 수 890만을 넘겼다.
15세 이상가만 되었어도 천만 관객을 찍었을 거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고, 그 말을 입증하듯 블루레이와 VOD가 불티나게 팔렸다.
정말 성인들만 구매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친구는 적당히 가려서 사귀어.”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작달막한 목소리로 조언을 건넸다.
고작 일 년 만에 신인상도 아닌 주연상 후보까지 올라간 태화를 다들 눈여겨봤다.
우연인 척 다가오는 이들도 늘었으며 효신이나 모임의 멤버들에게 다리를 놔달라 청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물론 효신의 술친구들은 대부분 아쉬울 게 없는 위치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그런 류의 청탁을 에둘러 거절하는 편이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못했고 태화는 종종 건너 건너로 만나게 된 ‘친구’를 사귀었다.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적당한’ 교우관계였다.
“물론이죠. 누구에게 이것저것 배운 덕에 선을 지키는 건 잘하거든요.”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효신은 툭툭 연예계에서 필수적이고도 경험이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덕분에 태화는 그리 오랜 시간 업계에 머무르지 않았음에도 타인이 파둔 반짝이는 함정이나 중의적인 언어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었다.
“흠, 좋은 일이네.”
후배의 아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효신은 입가에 부드러운 곡선을 머금은 채 새 맥주병의 뚜껑을 열었다.
“연습은 잘 되가? 위환 선생님께서 붙었다며.”
“힘들어도 즐거워요.”
“너라면 그리 말할 줄은 알았지. 잘 배워둬. 나처럼 로맨스만 죽어라 팔 거 아니면 위환 선생님께 배우는 건 상당한 기회니까.”
효신은 오고가며 인사만 나눴을 뿐, 위환에게 무술이나 동작을 사사받은 적이 없었다.
홍위환은 바쁜 사람이었고 아무리 약간의 실랑이, 무술적 조언을 필요로 하는 장면이 있더라도 사랑 이야기로 가득 찬 로맨스물에 섭외될 리 만무한 인물이었으니까.
솔직히 영원히 일로 엮이지 않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더 힘내고 있어요. 미팅 전까지 독점할 수 있다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거든요.”
“오, 분발하고 있네?”
“당연하죠.”
살짝 잰 척하는 태화를 보고 효신은 히쭉거렸다.
그에겐 조금 불안하게 와 닿은 미소였다.
“······왜요?”
“자, 그럼.”
조곤조곤 이야기 하던 그녀가 목소리를 높히며 과장되게 양 팔을 벌렸다.
저들끼리 웃고 떠들던 이들의 시선이 하나 둘 그들에게 꽂혔다.
이 술꾼 누나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어, 태화는 슬쩍 눈썹을 치켜세웠다.
“곧 맡을 역할 좀 연기 해봐.”
그리고 예상을 예언처럼 따르듯 폭탄 발언이 장내를 채웠다.
끝
ⓒ 마늘소금
“뭐야 뭐야? 우리 막내 뭐 하는 거야?”
“차기작 연기? 그거 맞지, 아시아 히어로물!”
“아, 박현호 찍는 그거? 조연들 캐스팅이 한창이던데.”
마련된 술들을 마시며 저들끼리 놀던 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을 한 채 태화를 향해 소곤거렸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기다리듯 그들의 눈빛은 나이에 맞지 않게 반짝였다.
“너 맡은 역할이 좀 독특하다며? 그 말 듣고 궁금해서.”
모이는 시선을 느끼며 효신은 슬쩍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웃음기 섞인 음성이 귀를 간질거린다. 태화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