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22
“근데 그걸 왜 지금······?”
“에이, 한번 해봐. 여기 다들 선배잖아? 다들 첨삭은 알아서 잘 해줄걸?”
필요하면 조언을 주지 않겠냐며 선동하자 다들 장난스레 동의했다.
이게 바로 민심이고 천심이라 말하는 태도가, 아주 뻔뻔했다.
사실, 효신의 행동엔 약간의 심술이 묻어있었다.
‘구미호’에서 엄청난 색기를 뽐낸 태화를 보며 그녀는 ‘내년에 같이 로코를 찍어보지 않겠냐’고 꼬실 생각이었으니까.
그녀는 연기 속에서 풍기는 농밀한 매력에 자신이 있었고 평소 남녀주연이 전부 섹스러운 분위기를 펼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 해왔다.
날로 커지는 호기심 탓에 섹시 남배우 1위로 꼽히는, 더럽게 도도하고 신경질적인 구자준에게 자존심을 굽혀볼까 고민하던 찰나, 나타난 황금 선택지가 바로 ‘구미호’의 해조를 맡은 태화였다.
분명 바로 전작에서 같이 호흡을 맞췄음에도 그녀는 드라마 속 태화의 연기가 낯설었고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따라서 한 번 더, 조금 다른 분위기로 그와 함께 연기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벼르고 있었는데, 게다가 ‘같이 하면 재미있을 거 같지?’하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유혹한 주제에, 저 혼자 팔랑팔랑 다른 작품으로 날아가 버린 후배가 짜증났다.
“한상일이 임호영에게 하듯 한번 해봐. 귀엽게.”
“······애들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대요?”
“난 친구가 많거든.”
다른 이들에게 안 들릴 정도로 소곤거리던 효신이 씩― 이를 드러냈다.
숨기는 게 많은 자의 미소였다.
의뭉스러운 태도에 태화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최지환 감독의 심중까지 정확히 예측한 사람이니 소문난 잔치의 반찬 정도는 쉽게 알아냈으리라.
뭐 때문에 심통이 난 건진 몰라도 연기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흐음······.”
거기까지 생각한 태화는 도도하게 앉아있는 효신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포슬포슬한 웃음을 흘렸다.
“귀엽기보단 사람 속 잘 뒤집는 역할인데요?”
“흠?”
싱글거리던 효신은 슬쩍 눈썹을 치켜떴다. 귀에 달라붙은 목소리가 귀걸이처럼 달랑거렸다.
목소리도, 화장기 없는 얼굴도 평소의 태화였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아까완 묘하게 달랐다.
‘······이것 봐라?’
그녀는 작은 흥미를 담아 태화를 응시했다.
‘겨울나기’의 오현수와 다른 ‘무언가’가 태화의 거죽을 뒤집어 쓴 채 제 모습을 선보이고 있었다.
태화의 오현수는 눈 안에 정인에 대한 정열과 욕심을 담은 채 어른스러움과 냉정이란 갑옷을 둘렀지만 사실 다가오는 연인과의 이별에 절망하는 여린 남자였다.
연인의 농밀한 장난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도 좀처럼 본심을 드러낼 줄 모르는 서툰 인간.
그렇지만 눈앞의 사내는 달랐다.
오현수가 딱딱하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스티로폼 같은 남자였다면 지금 연기하는 누군가는 물을 담은 풍선을 닮았으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약간의 무게감도 있는, 몰캉몰캉한 물 풍선을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효신이 참 좋아하는 인간상이었다.
‘가면 쓰기를 참 빠르고 꼼꼼하게 잘한단 말이지.’
그녀는 살짝 잰 척이 섞인 태화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관대한 동시에 오만한 시선이 꽂혔음에도 남자, ‘한상일’은 태화처럼 쓴웃음을 짓거나 현수처럼 미간에 내천을 그리는 대신 사춘기 소년 같은 풋풋하고 개구진 미소를 그렸다.
“속을 잘 뒤집는다?”
“뭐, 그래도 데이트 신청하는 상대에게는 좀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행동은 태화가 아닌 상일의 버릇이다.
말을 줄일 때 살짝 왼쪽 입꼬리만 올려 비웃는 듯 눈웃음치는 버릇도 마찬가지.
그러나 그 버릇들은 몸에 밴 듯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고 있는 이들은 차이를 잡아내지 못했다.
태화는 역할의 분위기와 태도를 유지한 채 어디까지 연기로 표현하면 좋을지 가늠했다.
틀이 없는 자유연기를 펼치고 있는 만큼 어떤 면까지 보여주고 어디에서 끊을지 범위를 정하는 것은 중요했다.
‘누님이 무슨 뜻으로 이런 장난을 친 건진 모르겠지만······. 뭐, 평가를 올리기 좋은 기회니까.’
연예계는 입 소문이 참 빠른 동네였다. 여기서 인상을 남긴다면, 아직까지 곳곳에 남은 ‘편견’어린 시선을 지우는 일에도 도움이 되리라.
“누님께는 안 보여줄 거지만?”
계산을 마친 그는 호영이 아닌 진혁에게 하듯 효신을 대했다. 물 끓는 냄비의 뚜껑이 폭폭 움직이는 것처럼 태화도 순종적인 척 콧대를 세우고 잔망 떨었다.
갑자기 막나가는 그의 행동에 구경 중인 이들은 ‘얘가 취했나? 왜 저러지’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들이 생각했던 연기 방식과 달랐기 때문에 나온 오해였다.
효신은 아닌 척 도도하게 흥흥 거리는 태화를 바라봤다.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이 조금 심술이 나, 곤란해 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대충 표정 연기를 하고 대사만 뱉는 걸로 넘기려 해도 약간의 야유와 함께 잠시 놀린 뒤 화제를 바꿀 요량이었다.
그랬는데, 순진한 후배가 ‘진짜로’ 캐릭터를 입어버리자 살짝 즐거워졌다.
‘이번 역할은 좀 먼치킨 닮았네. 여우 다음은 다리가 짧아 슬픈 고양이라.’
그녀는 배역과 어울리는 동물을 대입해봤다.
태화가 연기하는 한상일은 고양이는 고양인데, 다리가 짧아 높은 곳에도 쉽사리 뛰어내리지 못하는 고양이, 그 앙증맞은 외형으로 인간에게 사랑 받는 고양이를 닮았다.
특히 묘하게 콧대가 높아 잰 척하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작은 어린 아이가 잘난 척 하는 것과 비슷해, 웃음을 자아낸다는 점이 똑같았다.
180이란 키와 다부진 몸과 안 어울리게 귀여웠다는 의미다.
화장도 안 했는데 표정과 분위기 탓인지 태화의 얼굴은 연기하기 전 보다 네다섯 살은 여려보였다.
“그래도 난 보고 싶은데.”
효신이 적당히 받아주자 태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그러는 고얌?’이라 말하는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꺼풀을 몇 번 깜박였다.
그 멍청한 행동이 하찮으면서도 귀엽게 보이자 그녀는 제 눈이 미쳐 돌아가는 지 의심했다.
‘다 큰 남자가 저러면 한 대 때려주고 싶어야 정상인데······.’
그녀는 기억을 되짚으며 덫에 걸린 순간을 떠올렸다.
태화는 눈빛을 참 잘 이용하는 배우였다. 배역에 들어간 그의 눈엔 어떠한 미혹도 없으며 단순히 역할의 감정만을 비췄다.
처음 도도한 척 할 때 마주친 눈 때문에 이런 이상한 콩깍지가 껴진 것이리라.
슬쩍 주변을 훑은 효신은 다른 이들이 그가 연기 중이란 걸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갑자기 바뀐 태화의 태도에 의아해하거나 도를 넘는 깐족거림에 눈매를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한 사람과 그렇지 못 한 이들 간의 차이가 너무나도 극명해, 효신은 살짝 소름 돋았다.
고작 일 년도 못 되는 짧은 시간이 흘렀는데, 그의 연기는 상당한 진보를 보였다.
그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그녀는 조금 무서웠다.
‘진짜 남자라 다행이야.’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배우가 여성이었다면 효신도 제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을 것이다.
남자라서, 그렇기에 대놓고 겨룰 위치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건 그거고.’
속으로 태화의 연기력에 감탄하던 효신은 그의 양쪽 뺨을 손으로 꾹 눌러 고정했다.
당황한 와중에도 연기를 지속하는 것이 아주, 아주 곤란했다.
“누님······? 윽!”
효신은 부들거리는 태화의 볼을 마구 문질렀다. 아기 피부처럼 보송한 얼굴은 촉감마저 좋았다.
“이거 귀엽잖아!”
고양이의 귀여움은 치명적인 실수조차 용서 받는 레벨이다.
태화가 선보인 한상일은 딱 그녀가 귀여워하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친한 이들에게만 살근살근 꼬리를 흔들며 다리에 몸을 비비는, 그러면서도 도도한 척은 혼자 다하는 맹한 고양이가 생각나 심장이 아팠다.
효신이 과장되게 흥분하며 태화의 머리를 헝클어트리자, 구경 중이던 이들은 그제야 그가 지금껏 연기 중이었음을 눈치 챘다.
그녀가 친하다고 무작정 띄워주는 성격이 아니니 저리 흥분한 모습에 이유가 있다는 것도, 그녀가 본 것과 그들이 본 것이 약간 다르다는 것도 함께 알아차렸다.
‘역할의 성격과 행동에 맞게 애드리브 한 거야?’
‘예고도 없었는데 역할 감정이 그리 순식간에 잡았다고?’
‘이쪽을 전혀 보지 않아서 불확실하지만 눈이 좀 특이했던 것 같은데······.’
둘의 행동을 지켜보던 배우들은 다른 직업을 가진 멤버들과 달리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태화를 응시했다.
아무런 전조 없이 연기를, 그것도 대본에 적힌 대사가 아니라 상황에 맞춰 역할다운 언행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장의 슬레이트의 마찰음은 소리와 영상을 맞출 뿐 아니라 배우의 역할 몰입을 돕는 도구이기도 했다.
육상에서 화약을 터뜨려 시작을 알리 듯, 일종의 기폭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어떠한 예비 동작 없이, 바로 역할을 연기하고 상대마저 역할의 무대로 끌어들이는 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귀엽다라······. 생각해보니 쌜쭉한 표정이 다른 사람 같긴 했지.’
괴롭히는 것에 가까운 효신의 태호와 곤란해 하며 만류하는 태화를 보고 그들은 흥이 깨졌다는 듯 둘에게서 시선을 뗀 채 주변으로 흩어졌다.
모임의 분위기는 원래로 돌아왔으나 그들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화장은 스위치가 아니었다. 단지 태화를, 그의 연기를 좀 더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었다.
인공위성이 넘치는 세계에 새로운 1등성이 나타났다.
***
“후······, 이 전투 끝나면 나랑 사귀지 않을래?”
잔해들을 전부 막아내느라 너덜너덜해진 태화가 호영을 향해 물었다.
그 와중에도 가벼운 언행은 고쳐지지 않았으나 짙은 피로가 목소리에 실렸다.
“······그거 사망 플래그입니다.”
“아니 사망 플래그보다 네가 걱정하는 거 보니까 좀 가능성이 보여서. 내가 너한테 나쁜 놈은 아니었잖아.”
태화는 상일에 대해 떠올렸다. 분명 그는 호영 이외의 사람에겐 미친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대화할 때는 어느 때보다 평범하고, 어딘가 모자란 것 같은 인간이 되었다.
가볍고 깃털 같아 그의 말은 전부 허상이 되어 호영을 스쳤지만 그러는 사이 그 허상들은 가랑비가 되어 둘 사이를 적셨다.
“그냥 지금 고백하고 가세요.”
“지금은 거절 할 거 같아서 싫어. 나도 상처 받을 줄 아니까.”
어느 정도 기운 차린 모습을 연기하던 태화는 얌전히 있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 두어 번 두드렸다.
“갔다 올게. 오면 고백 할 거야.”
“그러니까······!”
그는 그 말을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
홀로 남은 호영은 복잡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거 사망 플래그란 말입니다······.”
영화의 종장에서 여인을 둘러 싼 철벽에 금이 갔다.
끝
ⓒ 마늘소금
‘협력자들’은 독특한 캐릭터들을 엮어 흥행에 무리 없는 진부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클리셰를 잘 따랐단 의미다.
물론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들 덕분에 전체를 조명하지 않는 한 그러한 서사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악을 물리치고 행복해졌습니다. 딴따란-.’의 구조로 흘러갔다.
정확히 왕도를 걸었음에도 읽는 이가 끝을 예측하기 힘들어하고 긴장한 건 위에서 이야기한 주연들의 독특함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태화가 연기하는 한상일과 상일의 부관 임호영이 그러했는데, 둘은 때때로 제4의 벽을 넘었다.
언급이 금기시된 ‘플래그’에 대해 떠들 뿐 아니라 푸념 어린 말을 종알거리다가 다른 인물들이 ‘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냐?’라며 얼굴을 일그러트리면 ‘아니, 저기서 지켜보는 누구 씨들한테 한 말인데?’란 대사를 뱉곤 카메라가 있을 방향을 응시했다.
다른 주연들도 조금씩 또라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태화는 그 이유가 짧은 시간 작품을 완성해야 했을 작가의 분노는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했다.
‘어쩌면 단순히 작가 취향일 수도 있고.’
이 정도 규모에 참가할 수 있는 인물은 정해져 있을 텐데, 익명으로 대본을 배부했다는 것은 그만큼 편견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만족스러운 한 권의 대본이 여러 작가가 갈아져 완성된 결과물임을 몰랐기에, 태화는 나중에라도 만날 작가를 상상하며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둘러봤다.
한상일은 최후의 결전에서 빠졌다.
마지막 전투는 그야말로 괴물들의 싸움이었고, 그는 도구의 힘으로 균형을 맞췄을 뿐 한없이 평범함에 가까운 인간이었으니까.
그는 무술에 엄청난 재능을 보이는 천고의 기재가 아니었고, 선천적으로 괴력을 지닌 초인도 아니었으며, 의지만으로 주변을 주물러 비일상을 완성하는 괴물도 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머리는 비상해도 도구 없이는 일반인에 가까운 상일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브로커는 삼국의 최강자들을 모아달란 의뢰만 받은 중개업자였으니까,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오히려 작품 전개를 위한 억지력이었지.’
사실 그의 역할은 세 영웅들을 한데 묶고 일선에 서게 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상일이 리스크가 큰 장소에 머무르며 일반 군인들이 사용할 화기에 약간의 주술을 걸어 주고 가끔 한 손을 거든 건, 삼국의 정부가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약해졌기 때문이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하는 작품이라더니······.’
상일이 남았던 이유를 떠올리던 태화는 PPL 뺨치는 속 내용을 상기하고 혀를 찼다.
상업적 작품의 기저에는 정부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정부 밑에서 일하는 이들이 그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내용이 군데군데 드러났다.
심호영이 ‘그래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게, 제 손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게 상당히 보람차니까요’라고 말한다든가, 일본에서 온 초인 니지스케 우메가 ‘야쿠자도 국가의 중요성 정도는 알아. 정부가 사력을 다하고 있는데 한 팔 거들어야지’라는 대사를 뱉는 것도 그런 무의식을 통한 세뇌 작업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