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39
그중 두 작품은 상당한 인기를 얻어 한서린을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리는 데 한몫했다.
좁은 바닥인 만큼 알 만한 사람들은 그녀가 한 일을 다 알았다.
단지 힘없는 막내 작가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 줄 이가 없었을 뿐이다.
세 번이나 자신의 작품을 도둑맞은 연아는 그 충격으로 잠시 꿈을 접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정신을 추스른 무렵, 어찌어찌 닿은 인연 덕에 정식으로 데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한서린이 그녀에게 다가와 ‘과거엔 미안했다, 지금이나마 널 돕고 싶어서 좋은 자리를 마련했다’라며 월화로 고려되던 그녀의 데뷔작을 주말 특별 편성으로 집어넣어 주었다.
캐스팅 물망이 오른 배우들을 보기 전까지, 연아는 정말로 서린이 미안한 마음에, 호의로 그리해 준 줄 알았다.
“이 바닥에서 계속 살 거면 기억해요. 당신이 펜을 잡고 대중 앞에 서는 순간부터, 당신은 모든 기성 작가들의 경쟁자예요. 그건 당신이 문하생으로 있었던 작가라 해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했다 실토하는 그녀를 보며 철진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예계뿐 아니라 메마른 사회에서, 힘없는 자의 순진함은 멍청함이고 아둔함이었다.
‘하지만 그 힘없고 순진한 사람이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기회라는 게 생기지.’
다 알음알음 아는 소문을 국장이라고 모를까.
한서린에게 세 작품을 빼앗긴 막내 작가. 그렇게 빼앗긴 작품 중 두 개는 대박, 한 개는 평타가 터졌다.
아직 덜 긁혔지만 당첨일 게 높은 복권이다 보니 국장은 특별 기획 편성을 지워 버리는 대신 철진을 붙여 기회를 줬다.
철진도 그녀가 성공 가능성 높은 패라 생각하고 국장의 제안을 수락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연아만 모를 뿐이지, 승부에 자신 있는 이들이 그녀에게 판돈을 건 것이다.
‘초보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장면 연출 문제는 내가 일부 수정해서 끌면 돼. 급한 건 배우······.’
드라마는 내용뿐 아니라 어떻게 장면을 나누고 어느 장면에서 대사를 치느냐도 중요하다.
그리고 철진은 신인들이 실수하기 쉬운 연출을 기가 막히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남은 것은 그 연출을 소화해 줄 배우.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는데.’
그는 폰에 잠들어 있는 번호 하나를 떠올리고 입술을 핥았다.
누군가는 상당히 고민하고 고생하겠지만, 그리고 그것은 최종적으로 출연료를 결재해야 하는 국장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철진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이 동네는 인기만 있으면 대부분의 것이 용납되는 세계였고, 철진은 인기와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으니까.
‘나만 고생하는 건 좀 억울하잖아요, 국장님.’
방향을 정한 그는 머리 싸맬 누군가를 생각하며 심술궂게 웃었다.
***
“태화야!”
“무슨 일이세요?”
다리를 180도로 찢은 채 바닥에 누워 시간을 재던 태화는 호들갑 떨며 등장한 현규를 의아한 눈으로 살폈다.
영 마음에 차진 않아도 법정물의 검사 역할을 맡기로 결심한 게 바로 3시간 전의 일이다.
내일 아침 BGA를 통해 연락하기로 이야기가 끝났으며 대본이 오기 전까지 할 일은 관련 정보를 모아 역할에게 ‘상식’을 부여하는 일 정도였다.
매니저가 저리 부산스러울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장철진 PD가 너한테 시놉시스랑 3화 대본을 보내 왔어!”
“그분 올해 초에 작품 찍어서 쉰다고 하지 않았나요?”
“근데 이번에 주말 특별 기획을 맡게 됐대!”
사실 현규가 흥분한 이유는 철진에게서 온 연락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PD의 소식에 부랴부랴 얽힌 이야기를 알아봤다.
한서린 작가가 대놓고 견제하고 있다는 것도, 주연, 조연할 것 없이 연기돌이라 외치는 아이돌들이 포진했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KBC 드라마국 국장이 이번 작품에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철진이 성공을 위해 한 팔을 거들었다는 것도 다 주워들었다.
동률인 호재와 악재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대본이었다.
그리고 대본을 다 읽는 순간,
이거야 말로 태화가 맡아야 하는 작품이라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현규는 가타부타 말없이 대본을 태화에게 건넸다.
몸을 편하게 푼 태화는 손가락 두께의 얇은 책자 세 권을 확인하고 천천히 앞장을 열었다 처음 1화를 읽을 때 느긋하게 움직이던 손이 2화, 3화로 옮겨지면서 점차 빨라졌다.
느려질 줄 모르던 손길은 마지막 장을 넘기고서야 멈춰 섰다.
“······이거.”
대본을 덮은 그는 다시 뒤집어 앞장에 적힌 제목을 응시했다.
‘캐트시: 고양이 요정.’
너무나 평범한 어찌 보면 마이너한 제목이었으나······
“진짜 재미있네요.”
내용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난 반투명한 창을 끄던 태화는 불현듯 머리를 스친 점수에 멈칫했다.
완성도 3.5, 흥행성 5.0.
뭔가 처음 보는 숫자가 떠올랐다.
끝
ⓒ 마늘소금
‘내가 왜 모르는 거지······?’
5.0이란 숫자를 떠올리고 태화가 의아해했던 점은 ‘왜 이 작품을 들어보지 못했는가?’였다.
그는 분명 드라마보다 영화를 더 좋아했고, 딱히 로맨스를 즐기지도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히 이슈가 되어 성태나 극단원들의 가족 등이 언급하면, 한 번쯤은 찾아 감상하곤 했다.
‘4.5인 작품은 많이 봤어도 만점은 처음인데······.’
4.5부터는 주연 배우가 국어책을 읽거나 작가가 정신이 나가 작품을 산으로 보내고 점수를 바닥으로 내던지지 않는 이상 평균 이상의 시청률을 보였다.
감독, 작가, 배우의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지면 그 이상의 시너지도 가능했다.
신드롬 수준으로 인기를 얻은 ‘구미호’가 바로 그 좋은 예였다.
‘협력자들이야 회귀 전엔 아예 없었던 영화고 구미호는 해조 역할이 중심이라 4.5라도 은근히 까다로웠다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닌데······?’
‘캐트시’는 ‘구미호’와 같이 남주의 종족을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의 숨겨진 이야기와 진실, 사랑을 다뤘던 ‘구미호’와 달리 싱글맘인 여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춰 이야기가 진행됐다.
따라서 캐트시를 맡은 남자 주연이 고양이다운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편집과 연출을 통해 시선을 돌리게 할 방도가 있었다.
초반이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복잡한 감정선 또한 보이지 않아 전체적인 난도가 높지 않았다.
그렇기에, 태화는 도대체 자신이 왜 이 작품을 모른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아······. 혹시 협력자들처럼 나 때문에 편성되게 된······. 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잠시 나비 효과를 떠올리며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던 태화는 곧 너무 나갔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해했다.
그는 연기를 펼치기 위한 무대로서 작품을 살피지만, 누군가에겐 돈벌이가 되는 상품이었으며, 여러 이해관계와 자본이 얽힌 거미줄 위의 나비였다.
직접 관여하지 않는 이상, 고작 작은 날갯짓으로 사라지거나 생기는 건 힘들다는 의미다.
배우가 일부 바뀌는 경우는 있어도 회귀 전 봤던 작품들이 거의 그대로,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것만 봐도 그 점은 명확했다.
‘설마 작가가 중간에 던졌나?’
영화와 달리 드라마의 대본은 촬영과 함께 작성되는 일이 빈번하다.
그렇다 보니 전체적인 완성도와 흥행성 점수가 진행 도중 변하기도 했다.
석 달 전 종영한 ‘화성의 공주’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였다.
태화가 맡은 작품은 아니었으나 식견으로 확인했던 3화까지의 점수는 완성도와 흥행성은 각각 2.5와 4.0.
그러나 5화를 기점으로 완성도가 1점대로 떨어지더니, 10화를 넘어 3과 4를 오가던 흥행성마저 2점으로 폭락했다.
결과는 용두사미.
최종적으로 완성도 1.5, 흥행 3.0을 기록하며 ‘화성의 공주’는 태화에게 드라마라는 것이 얼마나 유동적인지 알려 줬다.
‘캐트시도 그랬을 수 있지만······. 그랬다면 욕하는 소리라도 들었겠지.’
‘화성의 공주’가 대차게 망했을 때, 시청자들의 원성은 위버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로 장대했다.
흥행성 만점의 작품이 폭락했다면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으리라.
“재밌지? 문제가 몇 가지 있지만 그걸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다고 할까······?”
결론이 나지 않던 머릿속 쳇바퀴는 매니저의 도움으로 끝이 났다.
현규의 설명을 듣자 부족했던 미싱 링크를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장철진 PD가 메가폰 잡은 다음 이상민 배우가 참여 의사를 밝혔고, 서하라 배우도 네가 참여한다면 기꺼이 여자 주연을 맡겠다고 했다더라.”
침몰하는 배에 탑승하는 배우는 없다.
그러나 그 배가 의외로 튼튼하다면, 그리고 안에 든 것이 황금이라면 약간의 위험을 무릅쓸 배우는 충분히 많았다.
‘그 정도면 망할 일은 없을 거고······. 세 살짜리 고양이 역이라니 재미있겠네.’
아직 검사역을 하겠다고 연락을 보낸 것이 아니니 거절하더라도 문제는 없으리라.
거의 확정되어 있던 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태화는 이 흥미로운 역을 다른 배우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대본에 홀린 그는, 계획과 전혀 다른 작품의 출연을 결심했다.
***
차기작으로 ‘캐트시’를 선택했다는 태화의 말에 스마트폰으로 신상 브러쉬를 확인하고 있던 나래가 눈썹을 치켜떴다.
어제 헤어질 때만 해도 분명 법정 드라마의 검사역을 맡는다고 들었거늘, 왜 검사가 고양이가 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흠. 대본으로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재미는 있네.”
“그쵸?”
시큰둥한 표정으로 3권의 대본을 다 읽은 그녀는 룸미러를 통해 상기된 배우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나, 어제 종일 다음 검사역 어떻게 이미지 화장해야 하는지 고민했더니······.’
나래는 작은 심호흡으로 화를 가라앉혔다.
태화가 저런 배우라는 건 2년간의 작업으로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역할이 있으면 선택하지 않는 게 당연한데도 고민했고, 촬영 도중 들어온 배역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다작하면 안 되겠냐는 걸 그녀와 현규가 간신히 설득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연기에 관해선 집요했고, 노력을 쏟아부었으며, 약간 충동적이었다.
‘······그러니까 오빠가 말려야 하는데.’
슬쩍 옆을 흘긴 그녀는 재차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기색으로 보아 저 두 남자 모두 대본에 홀린 듯 보였다.
성격과 달리 일 처리만은 빠릿빠릿했던 현규마저 배신을 때리자, 나래는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애써 미소를 그려 냈다.
일단 꿈속을 허우적거리는 저 두 남정네부터 현실로 불러들여야 했다.
“근데 이거, 태화 네가 바라던 상남자 역할이 아니잖아.”
“앗.”
“엇······.”
‘그래 내가 뭘 더 바라니······.’
‘설마’가 ‘역시나’로 변하는 순간, 그녀는 서늘한 눈빛으로 옆에 앉은 현규를 응시했다.
기대와 배신감은 비례한다.
나래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현규를 믿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커다란 배신감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오빠.”
“어······.”
어설프게 눈치 보는 그를 보자 그녀는 조금 더 화나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 쓸지, 쓸 수는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진 화장법도 떠올랐다.
“태화가 백설공주 소리 쏙 들어가도록 남자다운 역할을 맡고 싶어 했잖아.”
“응······.”
나래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미미한 분노를 담아 말했다.
배우에게 이미지란 중요하면서도 성가신 것이었다.
그 어떠한 이미지도 덮어지지 않아 여러 작품을 맡았음에도 인상 하나 남기지 못해 공기처럼 사라지는 예도 있었으며.
한 번 강렬한 역할을 맡았다가 다른 역할로 벗어나지 못한 채 역할에 잡아먹히는 일도 왕왕했다.
그런 의미에서 태화는 어떠한 역할의 이미지든 쉽게 소화하고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연기력을 지닌 배우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배우.
때문에 ‘배우 이태화’는 어떠한 이미지도 갖지 않은 무채색을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라는 게 그를 보조하는 이들의 공통 의견이었다.
태화가 공주라는 단어를 빼고 싶어 할 때 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이기도 했다.
“매니저가 돼서 대박이라고, 역할도 재미있다고 배우가 짰던 계획을 어그러트리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