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54
‘물론 촬영하면서 같이 녹음되는 게 최고지만······. 오늘 날씨를 보니까 그건 그른 것 같네.’
태화는 여전히 잠잠해질 줄 모르는 바람에 앞머리를 가렸다.
바람이 강해서 그대로 두면 열심히 내린 머리카락이 평소처럼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잠깐. 흠, 호오. 그래······.”
갑자기 앞머리를 가린 손을 덥석 잡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철진을 확인하고 태화는 당황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잡혀 있는 손이 어색해질 때쯤 PD는 그에게 사과 한 마디 없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어, 채연아 작가. 난데. 어, 오늘 촬영이 좀 난항이라 다른 장면부터 진행하고 싶어. 그래서 대본이······.”
마치 볼일을 마쳤다는 듯, 철진은 손을 휘휘 저어 태화를 쫒아냈다.
취급이 너무하다 생각하면서도 그는 뭐라 항의하는 대신 얌전히 자신의 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PD는 분명 제멋대로고 내키는 대로 말을 뱉는 인물이었지만 거기엔 묘한 천재성이 있었다.
그가 잘못된 오더를 내리는 게 아닌 이상, 태화는 굳이 자신을 내세워 가며 싸울 생각이 없었다.
‘천재란 사람들은 진짜 특이해······.’
저런데도 찍어 달라는 사람이 줄을 잇는 걸 보면 역시 연예계 최고 덕목은 재능과 천재성 그리고 성과인 게 확실했다.
***
“······대본이 바뀌었다고요?”
간이로 설치된 천막에서 하라와 함께 대기하던 태화는 현규의 말에 눈썹을 추켜세우며 건네진 대본을 받았다.
‘9화(임시)’라는 묘하기 짝이 없는 타이틀이 그를 반겼다.
“오늘 촬영 예정이던 8화 장면은 날씨랑 인파 때문에 힘들 것 같아서 9화쯤에 예정되어 있던 장면을 먼저 찍을 거래.”
“어머나. 이거 태화 씨가 상당히 노력해야 하는 장면이네요. 근데 생각보다 일찍 들어가네?”
어느새 대본을 펼친 하라가 작게 탄성을 흘리며 단정한 손톱으로 얇은 대본을 톡톡 두드렸다.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를 이런 식으로 찍을 줄은 몰랐는데.’
대본을 확인한 태화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생각에 잠겼다.
드라마의 반전인 동시에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되는 부분.
이런 연출이라면 확실히 현재 날씨가 안성맞춤이긴 했으나······. 오글거리는 감이 없지 않았다.
“태화 씨는 여러모로 특이한 경험들을 하고 가겠네요.”
“그러게요. 이걸 살릴 수 있다면······. PD님을 좀 존경하게 될 것 같네요.”
그는 다시 한번 연기해야 할 장면을 살폈다.
대사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것보다 짧은 편이었고, 행동 지시 또한 단순했다.
‘문제는 이게 단순해서 더 어렵다는 거지.’
잘못하면 싸구려 연출로 비난받을 수 있는 모험이었으나, 거기까지 생각한 태화는 역으로 즐거워졌다.
오늘 현장에 와서 스포일러당하게 된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도전의 재미를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공윤혁은 ‘좋은 남자’였다.
자신의 부하 직원들에게 친절하고 필요한 것 이상의 명령을 하지 않으며, 자식을 홀로 키워야 하는 아리를 배려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리도 약간의 호감을 가졌고, 둘 사이는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그의 약혼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주말을 맞이해 연호와 루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온 아리는, 길을 걷던 중 한 고급 식당에서 팔짱을 낀 채 나오는 남녀를 발견했다.
익숙한 남자의 얼굴에 반가워하던 그녀의 표정은 순간 망치를 얻어맞은 사람의 것처럼 멍하게 변했다.
“은인?”
“엄마?”
“아, 그 누나······.”
형제가 있다는 말을 떠올리고 당혹감을 지우려던 그녀는 귀찮은 표정을 짓다가도 결국 뺨을 내어 주는 윤혁과, 그런 그의 뺨에 입을 맞추는 여성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긴······.”
그렇게 멍하니 있던 아리는 마침내 찰싹 달라붙어 사라지는 둘이 연인임을 인정했다.
“엄마?!”
현실을 깨달은 아리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평범한 이들처럼 연인간의 사랑이란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꿈이 깨지자 얇은 유리 속에 담겼던 아리의 봄도 함께 날아갔다.
“은인.”
개나리 꽃잎은 겨울을 잊고 날아가 루이의 얼굴을 스쳤다.
순간의 바람이 그의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항상 아이 같았던 루이가 낯선 남자의 향기를 풍겼다.
루이는 엉망으로 젖혀진 머리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아리에게 다가섰다.
“나로 하도록 해.”
그는 평소 보기 힘든 진중한 표정으로 아리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줬다.
눈치를 보던 연호는 곧 엄마의 옷자락을 꼭 그러 쥔 채 ‘울지 마 엄마······.’라고 그녀를 위로했다.
***
외부 촬영이 있던 그날, 위버의 검색 순위에 ‘이태화 촬영’, ‘루이 각성’이란 검색어가 떠올랐다.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던 팬이 연속 촬영한 여섯 장의 사진으로, 단정하고 아이 같았던 루이가 점차 표정을 지워가며 종국엔 어른스러운 남자가 되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그 변화가 너무 마법 같아서, 인터넷에는 예전 유행하던 ‘안경을 벗어 보았다’ 놀이 이후 오랜만에 ‘머리를 올려 보았다’라는 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끝
ⓒ 마늘소금
이태화는 팔색조 같은 매력으로 감독과 작가들에게 호평을 받는 배우였다.
어떤 독특한 배역도 이상적으로 소화했으며 배우 본인이 아닌 역할이 돋보이는 연기를 펼칠 줄 알았다.
그러한 ‘위치를 지킬 줄 아는 연기’는 작품뿐 아니라 광고에서도 유효했다.
그가 촬영한 광고들이 소비자에게 ‘환상’을 팔았기 때문이다.
같은 옷을 입으면, 같은 화장품을 쓰면, 같은 차를 타면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허황되지만 유혹될 수밖에 없는 그런 환상을 말이다.
그렇게 관계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태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직종의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았다.
바로 사진작가라는 인종이었다.
“자! 다시 갑니다! 오! 좋아요! 네! 그렇습니다!”
태화는 다른 배우들을 촬영할 때와 달리 갖가지 포즈를 요구하는 카메라를 향해 소년과 같은 싱그러움을 뽐냈다.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동안’의 재능, 아기와 같은 깨끗하고 부드러운 피부, 나래의 화장, 마지막으로 그의 표정이 어우러져 상당히 멋진 그림을 연출했다.
‘······개인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을 필요가 있나?’
파인더의 시선을 놓아주지 않으면서, 태화는 이 사진들이 과연 새로 만들어질 오프닝 영상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고민했다.
아리의 사랑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에 손을 보탰던 루이는 우는 그녀를 보며 심장을 따끔거리던 통증이 ‘사랑’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고양이 요정답게 즉흥적인 부분이 강한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고백과도 같은 말을 아리에게 건넨다.
스토리의 반전을 예고하는 장면인 동시에 주연들의 관계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급물살을 타듯 분위기가 변하기 때문에, 제작진은 사건 이후 방영분의 오프닝 장면을 전면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한번 정해진 컷이 그대로 유지되는 게 일반적인 만큼, 특례에 가까웠다.
‘인기가 있어서 그런 식의 세세함을 가지는 건 좋은데 역시 이건 뭔가 이상······.’
“이태화 배우님. 이 아이 좀 받아주세요.”
셔터가 멈춰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건네진 작은 무언가를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CG로 구현했던 ‘고양이 루이’와 똑 닮은 작은 고양이였다.
낯선 손길이 닿으면 몸을 비트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얌전히 안겨 골골거리는 고양이는 참 순하고 귀여웠다.
“이건······.”
“이름은 로나예요.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고 호흡을 맞춰주세요.”
사전 예고도 없이 나타난 고양이였으나 귀여움이 깡패였다.
“와, 미묘(美猫)네요.”
태화가 고양이와 친해지기 위해 작은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순간에도 정면에 있는 카메라의 셔터는 쉬지 않았다.
“카메라를 쏘아보듯! 강렬하게 부탁······! 네, 그겁니다!”
결국, 사진작가의 의도에 따라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고 붙잡혀 있던 태화는, 루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칠고 색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인 뒤에야 촬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어머, 태화씨 생각보다 늦었네요. 나 떠나고 곧 뒤따를 거라 생각했는데······. 뭔 일 있었어요?”
한발 먼저 사진 촬영을 마치고, 오늘 자 드라마 촬영 현장에 도착해있던 하라가 예상보다 늦게 온 태화에게 인사를 건네며 의아하단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찍은 사진은 많은데 잘 나오면 좋겠네요.”
그녀의 말에, 몇 분 전 있던 일을 떠올린 태화는 살짝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카메라에 담겼던 사진의 절반 이상이 사진작가의 욕망에 의한 것이라 느껴졌다면 오해였을까.
특히 마지막에 찍었던 표정은 루이의 것이라 보기엔 너무나 정제되지 않은 난폭한 야수의 얼굴이었다.
‘실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요구에 따른 표정과 눈빛, 분위기를 완벽히 이행했던 태화였으나, 그는 사진작가의 행동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일을 의뢰받아 작업한다면 그에 맞는 요구를 하고 어울리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 함께 작업한 이는 피사체를 아름답게 담아낼 실력은 있었어도 프로답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선 김창일 사진작가가 잘 찍던데.’
오늘 함께 작업했던 작가와 달리, 김창일은 자신의 욕망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의뢰주의 의뢰 내용과 무관한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피사체의 매력을 한껏 제 입맛대로 끌어올리면서, 그것이 기가 막히게 의뢰된 이미지와 맞췄다.
창일이 촬영한 화보와 광고가 예술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그런 만큼 비싸기 때문에 비싼 브랜드의 화보 촬영이 아니고서야 만날 일이 적었지만. 그래도 ‘창일이 촬영을 주도했다면 좀 더 빠르게 작업이 끝나진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까 초반에 찍은 거 보니 괜찮게 찍히던 거 같던데. 후반 작업이 영 아니었나 봐요? 아참, 그보다 오늘 카메오 하나 끼는 거 들었어요?”
떠나기 전 봤던 현장의 장면을 떠올리며 의아해하던 하라는 곧 화제를 돌렸다.
이미 매니저를 통해 알고 있던 일인지라, 태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신상아 선배님이 도와주신다 하더라고요.”
‘구미호’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 신상아는 특정한 연기만큼은 여타 톱배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오늘 촬영할 분량의 ‘여자A’는, 단역에 불과했으나 어느 정도의 연기력이 요구됐다.
그래 봐야 단역에 불과해서 ‘과연 괜찮은 장면이 나올까?’ 걱정하던 태화는 이미지에 완벽히 들어맞는 이가 카메오로 참여한다는 소식이 기꺼웠다.
“님은 빼요. 내가 더 선배인데 압존법을 확실히 지켜야죠.”
‘······음?’
하라는 아이돌들에게도 하지 않던 행동을 보이며 태화의 단어 하나를 수정했다.
평소 보이던 모습과 너무나 달랐던 탓에, 태화는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슬그머니 불안이 들었다.
‘······설마 사이 안 좋나?’
“안녕하세요! 태화씨 오랜만이네요.”
그가 싸한 느낌에 슬쩍 미간을 좁히려던 찰나, 경쾌한 노크와 함께 신상아가 등장했다.
“와, 선배는 보이지 않나봐?”
그리고 인사부터 비아냥거림이 따라붙었다.
“어머 설마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 뵌 사이 성숙미 넘치게 변하셔서 순간 못 알아 뵈었지 뭐예요?”
상아는 과장되게 감탄하며 ‘안 보고 사는 동안 너무 늙어서 못 알아봤다’라고 하라를 에둘러 공격했다.
“그러는 상아 후배도 신수가 좀 훤해졌네. 예전엔 상당히 많이 걱정했는데. 이렇게 카메오 제의도 받을 정도라니 정―말 출세했다. 축하해?”
그런 공격에, 하라는 ‘발연기는 좀 나아졌나 보다? 이런 제의도 다 받고’라는 말로 응수했다.
둘 모두 생글생글 웃으며 상냥한 음성을 주고받았지만, 그 사이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사이 안 좋네······.’
어쩌다 보니 사이에 끼게 된 태화는 이 기 싸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곧, 자신과 상관없는 일임을 깨닫고 머릿속으로 오늘 촬영분을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여배우는 하하호호 웃으며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곱게 돌려 말하는지, 겉만 보면 아주 다정한 선후배처럼 보였다.
“신상아 배우님! 여기 계시나요!”
“태화씨, 나 가볼게요. 스텝이 찾네.”
“아, 네. 안녕히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