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60
「어떤가!」
「이건······.」
태화는 화면을 채운 사진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결과를 보기 전만해도 완전히 끌려가지 않았다며 자축했는데, 지금은 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히 인정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진 속의 태화는 창일이 찍은 프로필 사진과 달리 누가 봐도 태화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사진 속의 인물은 달고나로 만든 뽑기처럼 부스러진 어딘가가 달랐다.
‘내가 진짜인데도 사진 속에 있는 내가 더 진짜 같다니······. 이전 모델들은 이런 기분을 어떻게 참은 거지?’
희미한 웃음은 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우는 것 같기도, 곤란한 것 같기도, 어쩌면 화난 것 같기도 한 묘함을 지녔다.
태화도 본인을 90퍼센트밖에 표현하지 못하는데, 고작 멈춰있는 순간엔 100퍼센트로 보이는, ‘이상적인 배우 이태화’가 있었다.
「······도대체 이런 건 어떻게 해야 찍을 수 있는 거죠?」
때문에 그는 평소 궁금해하지 않던 타인의 작업에 관해 물었다.
분야는 달라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깨닮음이나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에 관심 있나? 난 자네가 모델로 남았으면 하는데.」
「전 배우입니다. 모델로 전업할 생각도 없고요. 단지······. 이 모습을 연기로 펼치고 싶어졌어요.」
태화는 화면에 손을 댔다. 눈앞의 작품처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내 뮤즈는 이미 사랑에 빠졌구만. 사랑하자마자 차이다니. 데니, 난 너무 불쌍한 남자인 것 같아.」
「떨어지세요.」
은근슬쩍 위로를 받으려던 장은 매정한 다니엘의 거절에 또다시 우는 척했다.
「난 코가 안 좋아.」
그리고 곧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고민하던 태화는 그가 아까 물은 질문에 대해 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조향사였지만 난 제대로 뭘 배우기도 전에 후각의 대부분을 잃었어. 그래서 내가 느끼는 향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지.」
잠시 콧등을 찡그리던 장은 태화의 사진을 보곤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내가 현실에서 맡지 못한 향을 담아내네. 향수를 보고 그것에 맞춰야 할 땐 데니나 다른 조향사들의 설명을 들으며 상상하지. 아! 너의 향은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말이야.」
사진을 통해 현실의 향을 맡을 수 있기에, 그는 사십 년 넘게 이어진 감각의 상실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나도 소리를 포기하면 되나?”
“아, 안 돼 태화야!”
“농담이에요.”
진지한 얼굴로 무서운 소리를 중얼거렸던 태화는 다시 한번 자신의 사진을 응시했다.
조금 편한 태도를 취하자 첫 시선에서 맡지 못했던 향이 느껴졌다.
그것은 상쾌한 것 같기도 달콤한 것 같기도 한 독특한 향기였는데, 강한 척하면서도 너무나 은은하게 사진을 받쳐 주고 있었다.
「······난 이 향을 자네에게 주고 싶네.」
「장!」
사진에 시선을 빼앗긴 자신의 뮤즈에게, 장은 다른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건넸다.
가장 먼저 반발한 것은 다니엘이었다.
지금까지의 화보와 너무 달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향기와 모델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녀는 장의 결정에 찬성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저건 못 써. 나도 보는 사람들도 만족하는 향이지만 실제 사용하면 너무 오묘해서 장미 향이 나는 백합 같을걸?」
그러나 장의 덤덤한 말을 듣고 그녀도 인정해야 했다.
사진 속 향기는 개성이 없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개성적이었다.
태화가 아닌 타인이 뿌린다면 향수가 아닌 방향제를 뿌린 것처럼 밋밋하고 촌스럽게 느껴지리라.
「······그걸 알았으면서 왜 찍은 겁니까?」
「내 만족을 위해 찍은 거지!」
다니엘은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가 은근슬쩍 바꿔둔 사진을 응시했다.
태화가 화장을 지우기 전 촬영한 사진으로 맹수의 것을 닮은 푸른 눈. 강렬한 음영이 어우러져 무겁고 진한 향기가 났다.
묵직하고 남성적이면서도 달콤한 잔향이 남는 것이, 여성에게도 잘 어울릴 듯한 향이었다.
‘이쪽은 동양인 느낌이 거의 없기도 하고······.’
상품화에 좋은 쪽이 이쪽이라는 건 그녀도 보자마자 알았다. 하지만 아까 맡았던 향기가 코끝에 남아, 묘한 아쉬움을 자아냈다.
「나의 뮤즈. 자네에게 이미 사랑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이 향을 맡을 때마다 내 생각을 좀······! 으헉! 데니!」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 죽겠는데 옆에서 이상한 소리나 해대는 철없는 상사의 발등을 꾹 눌러주고 다니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장에게 약했다.
「계약을 일부 수정하고 싶습니다.」
세잔은 프랑스와 유럽 귀족들 일부에게 시그니처 향수를 제공했다.
누구도 아닌 단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향.
고작 동양의 작은 나라 출신 배우에게 주기엔 세잔이란 이름이 아까웠지만, 상대가 장의 뮤즈라면 세잔도 어쩔 수 없었다.
‘세잔과 배우 이태화와의 관계를 외부로 공개하지 않을 것.’
다니엘의 조건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그녀는 장을 좋아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도 알고 있었다.
세잔이 태화에게 시그니처 향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유와 상관없이 세잔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태화가 세계적으로 유명해 귀족 출신들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 아닌 이상 세잔의 주요 고객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노동자 계급 출신의 백인 배우가 연기력이 아닌 출신 성분 때문에 유럽 영화계에서 위로 올라가지 못한 채 결국 할리우드로 넘어갈 정도다.
동양의 일개 배우가 그들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게 알려진다면 약간의 과장을 보태 세잔이 망할지도 몰랐다.
태화는 불안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다니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넓음을 느꼈다.
「만약 제 이름이 세계에 통할 수준이라면, 이 사진도 원래 이름을 찾을 수 있나요.」
그는 그들의 상용화에 사용할 거라 말한 사진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과연 자신이 조엘 웨인처럼 대단한 배우였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했다.
「······물론이죠. 그렇게 된다면 저희 측에서 부탁해야 할 겁니다.」
다니엘은 누그러진 눈빛으로 그리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만약’이란 가정이 강하게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나중에 찾아가도록 하죠.」
태화는 잘게 눈웃음치며 사진 속 모델의 정체를 비밀로 해도 좋노라 허락했다.
목표가 하나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리. 향수는 완성 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작게 안도하며 웃었다.
동방 작은 나라의 배우가 보이는 모습을 단순 치기로 받아들인 것이 겉으로 드러나 태화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아직까진 아시아를 넘어서진 못했으니까.’
그러나 마차를 미는 것은 가장 첫 움직임이 어렵고 돈은 돈을, 인기는 인기를 부르는 법이다.
태화는 한동안 모델이 실제하지 않을 자신의 화보를 되돌려 받을 자신이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떨어지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장을 강제로 호텔로 보낸 뒤 다니엘은 태화를 배웅했다.
완성된 향수가 ‘Mirage(환상)’란 이름을 가지고 태화의 앞에 도착한 건 그의 생일인 4월의 끝자락이었다.
끝
ⓒ 마늘소금
태화가 세잔과 계약하고 작업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 촬영이 몇 주 남지 않은 겨울의 초입에 다다랐다.
끝이 다가오자 배우와 제작진은 기뻐하면서도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그것을 돕는 이들은 바로 배우들의 팬이었다.
그들은 열과 성을 다해 응원했고 그 격려는 배우와 제작진을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저희 오빠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도시락 받으세요! 젓가락도요!”
과거 태화가 봤던 것보다 서너 살 더 어려보이는 소녀들이 추운 기색 하나 없는 밝은 얼굴로 자신들이 챙겨온 도시락을 스텝들에게 나눠줬다.
승혁의 팬이자 Exstar의 공식 팬클럽, 스타라이트(Starlight)였다.
나무젓가락을 감싼 포장지조차 따로 제작한 것인지, ‘Exstar★승혁 잘 부탁합니다’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정성이네.’
“잘 먹을게요.”
“앗! 네!”
“배우님 저희 오빠 갠방에 또 나오실 계획 없으셔요?”
도시락을 나눠주던 두 소녀의 눈이 태화를 마주하고 반짝였다.
승혁의 공식 계정에 태화와 둘이 찍은 셀카가 몇 장 올라가면서 친숙함을 느낀 탓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나는 눈빛에 태화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승혁에겐 이미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이들 앞에서 또 한 번 말하려 하니 조금 미안했다.
“어라, 나 말고 선배님이 더 좋아진 거야? 그건 싫은데.”
갑자기 끼어든 승혁이 짐짓 서운하단 표정을 짓자 소녀들은 숨넘어갈 것 같은 모습으로 꺅꺅 거렸다.
이미 옆에 있는 태화는 잊은 모양새였다.
“저흰 오빠 바라기예요!”
“오빠 오늘 완전 멋있었어요! 나쁜 남자 역할도 되게 잘 어울리세요!”
승혁이 맡은 역할 공윤혁은 떠나가는 아리의 마음에 점차 나쁜 쪽으로 변화해 현재엔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아리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단지 과거 좋아했던 남자가 제 모습을 잃어가는 것을 보며 슬퍼했을 뿐이다.
아무튼 애절하며 한편으론 구질구질한 그의 태도는 점차 발전하는 승혁의 연기력과 맞물려 호응을 얻었다.
물론 윤혁에 대한 여론은 ‘이제 아리 놓아주고 너 좋다는 애나 다독여’였지만 말이다.
승혁은 자신의 성장 공로를 태화에게 돌렸다.
애정도 전혀 숨기지 않아서, 스라도 아리 역을 맡은 하라나 약혼자 역을 맡은 태연보다 라이벌 역인 태화를 더 좋아했다.
자신들의 오빠와 잘 지내줘서 고맙다며 루이를 닮은 봉제인형을 보내오기도 했다.
“오,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선배님은······. 야채 위주로 고르셨네요?”
받아 온 도시락을 보며 기뻐하던 승혁이 거의 풀밖에 없는 태화의 도시락을 확인하곤 슬쩍 눈매를 찡그렸다.
고기와 달달한 음식들로 가득 찬 그의 도시락과 달리 태화의 손에 들린 상자는 초록색이 가득했다.
“이 몸을 유지하는 덴 관리가 좀 필요하니까요.”
가늘고 부드러운 실루엣을 위해 근육을 줄인 태화는 열량 적어 보이는 도시락을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스타라이트는 꽤 세심하게 도시락을 준비했다.
미리 설문지와 비슷한 종이를 돌려 십여 개의 메뉴 중 다섯 가지를 선택하게 하고 알레르기가 있는 재료를 사전에 확인했다.
상당한 정성이었으며, 태화는 그 중 칼로리가 적은 채소 위주의 반찬을 골랐다.
‘맛도 괜찮은데.’
그는 정갈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맛에 만족하며 젓가락을 놀렸다.
“저희도 시즌 되면 체중조절을 하지만······. 선배님은 더 심한 것 같아요.”
“배우가 몸을 많이 움직이는 직업은 아니니까요. 촬영 끝나면 천천히 원래 무게로 돌아가야죠.”
곧 있을 자유를 떠올리며 태화는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외모뿐 아니라 몸매까지 가녀린 편이 어울려 시작한 식단 조절이나 입이 심심한 걸 제외하면 생각보다 지루하진 않았다.
하지만 먹고 싶은 걸 세 달 가까이 참는 건, 그로서도 고역이었다.
“근데 선배님 팬들은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하라 선······배님도 그렇고 태연씨 팬분들도 한 번씩 밥차 돌려서 마레드도 그럴 줄 알았는데.”
승혁은 톡톡 도시락을 두드렸다.
사실 태화와 하라 쯤 되는 배우의 팬들은 밥차나 도시락을 돌리는 비율이 신인에 비해 적다.
그런 식으로 잘 보이지 않아도 감독과 작가, 그리고 스텝들이 알아서 잘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묘한 신경전이 없는 건 아니라서, 다른 배우들의 팬덤이 한 번씩 돌렸다면 그와 비슷하거나 더 큰 비용 혹은 정성으로 경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제 팬클럽 이름 알고 있네요?”
“존경하는 선배님 팬클럽인데 당연하죠!”
“······역할 때문에 많이 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 이미 제 매니저와 그쪽 운영자 분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갔어요.”
초롱초롱한 승혁의 눈을 자연스럽게 외면하며 태화는 전달받은 사실을 알렸다.
하라의 팬클럽에서 뷔페를 했으니 비슷한 수준으로 가야하는데, 정작 태화는 몸매 유지를 위해 먹질 못한다.
배우를 서포트하려는 것이지 고문하려는 것이 아니기에 마레드는 깔끔하게 자존심을 버렸다.
그리고 모은 금액으로 쌀과 고기를 사, 미혼모 시설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제가 먹지 못하니 차라리 영혼을 살찌우겠다던데······. 좋은 뜻에 힘을 모아주셔서 저야 감사하죠.”
마레드를 위시한 태화의 팬들은 최근 선물을 보내는 대신 한 좌표를 잡아 태화의 이름으로 기부 폭격을 퍼부었다.
비싼 음식, 좋은 화장품을 선물해도 대부분 BAG 직원이나 태화의 지인들에게 나눠진다는 것을 깨닫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실제 명품에조차 별 관심 없던 태화는 이런 변화가 기꺼웠다.
기부는 절세에 도움된다는 회계사의 말에 팬들이 기부한 곳에 해당 금액의 두 배를 기부한 뒤 공식 계정에 인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