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63
“선배님 덕에 저도 즐겁게 연기할 수 있었네요.”
“차기작은 정했어요?”
“지금 보고 있는 게 몇 갠 있는데 영······.”
태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드라마 중간중간 들어왔던 캐스팅 제의는 드라마가 막바지에 다다르기 무섭게 3배로 늘어났다.
BGA가 옥석을 가려서 전달해 주곤 있으나 겉만 번지르르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한껏 높아진 태화의 눈엔 성이 차지 않았다.
‘흥행성 4, 완성도 3.5 정도면 무난하다고 보는데 참······.’
기준점을 정했다 해도 다 읽어 보고 있는 만큼 역할만 마음에 든다면 얼마든 참여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많이 봤거나 멋지기만 한 역할이 전부였고, 때문에 태화는 그들 중 하나를 고르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년 영화는 해외 영화 빼곤 볼게 없었지. ······진짜 내년엔 드라마만 찍어야 하나?’
회귀 전 본 영화를 떠올리며 태화는 조금 더 의욕을 가지고 작품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드라마가 싫은 건 아니지만 일 년씩이나 영화를 찍지 못하는 건 괴로웠다.
말 몇 번 걸었다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태화를 다시 한번 질린 눈으로 흘기고, 하라는 발걸음을 옮겨 감독을 찾아 나섰다.
끝
ⓒ 마늘소금
10월의 끝자락. 촬영을 끝낸 태화에게 휴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 표창과 각종 시상식이 그를 반겼기 때문이다.
‘협력자들’이 한국 영화로 분류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분명 ‘협력자들’은 중국에서, 중국 감독에 의해, 중국 자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그러나 투자자의 윗줄에는 한국 정부가 있었고, 주연 사인방 중 둘이 한국인이었다.
무술 감독과 기타 인력도 한국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으니 한국 영화라 우기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한중일 공동 제작’이라 불리지만 과거 중국 자본을 바탕으로 개봉했던 영화 ‘아라한’처럼 ‘협력자들’은 한국 내에서 한국 영화로 통했다.
“그렇다고 해도 제가 받는 상들은 조연상, 인기상이지만요. 아, 이인자의 서러움이란.”
태화는 장난스럽게 탄식을 흘리며 손에 든 상패를 흔들었다.
현재 촬영이 한창인 박현호의 경우 자잘한 시상식에 불참하는 일이 잦았으나 태화는 달랐다.
공식적으로 촬영 중인 광고 0개, 작품 0개, 프로그램 0개.
누가 봐도 한가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그는 속절없이 끌려가 딸기 없는 생크림 케이크의 설탕 장식이 되어야 했다.
‘한번 거른 거긴 하지만 주요 시상식 말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한국에는 정말 많은 시상식이 존재했다.
‘모든 작품에 상을 주기 위해 만든 건 아닐까’란 의심이 들 정도로 이 작품 저 작품에 상을 뿌리는 행사도 있었으며, 아주 대담하게 ‘돈을 좀 주면 박현호 대신 남우주연상을 주겠다’고 말한 시상식도 있었다.
태화는 그런 자잘한 초대장 중 현규와 BGA가 추천한 곳들을 골라 참석했다.
인지도에 비해 대중 앞에 서는 일이 적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노출도를 높이라는 의미였다.
조언을 받아들여 그는 여러 시상식에 참여해 라나커스의 정장도 뽐냈고, 괜찮은 차기작을 준비 중인 감독이나 작가가 없는지 살폈다.
‘돌아다닌 거에 비해 성과는 없는 것 같지만······. 그나저나 난 정말 대금상이랑은 인연이 없네.’
대금상은 이번에도 태화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중국 감독에 의해 찍힌 ‘협력자들’을 한국 영화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는데, 한국 정부가 ‘협력자들’을 표창까지 줘가며 밀던 것을 상기하면 상당히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무신’을 밀어준 것도 아니라서, 대금상은 ‘이번에도 대금이 대금했네’라며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해가 지날수록 권위를 잃고 있는 시상식이었으나 태화의 스텝들은 초대장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아무리 몰락하고 있더라도 한국 3대 시상식 중 하나인 만큼, 다른 자잘한 시상식보다 가치 있기 때문이다.
‘남우주연상 그랜드슬램이라······, 어차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평가를 들어도 딱히 즐겁진 않은데.’
태화는 본인의 연기를 타인에게 선보이는 걸 즐겼다.
보는 이가 연기에 홀려 눈을 떼지 못하고, 연기 속 세계를 실제처럼 느끼고, 그에게 가졌던 악의마저 잊은 채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 태화에게, 평가는 부수적인 것이었으며 객관성을 잊은 평가는 관객이 쓴 한 줄짜리 코멘트만도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다들 원하니까 시도는 해봐야지.’
그는 연기 이외의 부분에선 스텝들의 조언이나 의견을 잘 따르는 배우였다.
원한다고 덜컥 받을 수 있는 상은 아니지만 노력을 할 수 있었다.
대금상에 대해 떠올리던 태화는 갑갑할 정도로 목을 조이고 있는 보타이를 풀고 스마트폰의 일정을 살폈다.
다음주에 잡힌 창룡영화제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작년엔 상 탈 줄 몰랐는데······. 이번 년은 이변 없이 박현호 선배가 타겠지.’
한상일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활약하긴 하나, 더 비중이 크고 스토리를 주도했던 건 박현호가 맡았던 임진혁이었다.
특히 호쾌한 전투 장면에선 그의 활약이 두드려져, 관계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중소형 시상식이 박현호의 자리가 공석일지라도 꿋꿋하게 남우주연상을 선물한 것처럼, 창룡영화제 또한 그의 연기력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됐다.
‘······아님 좋은 거고. 근데 설마 이번 시상식에 내 저번 영상 보여주려나? 에이, 설마.’
그래도 작년에 있었던 호명을 떠올린 태화는 섣불리 결론짓지 않았다.
그리고 따라붙은 기억에 얼굴을 흐렸다.
“태화야, 어디 아파? 갑자기 안색이······.”
“아뇨, 그냥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게 떠올라서요.”
어차피 이번 연도만 지나면 대중들의 머리에서 치울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인 그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등을 기댔다.
이미 작년부터 5초로 짧게 편집된 자신의 영상이 UTV에 떠다닌다는 걸 알지 못해 생긴 여유였다.
***
태화는 1년 만에 레드 카펫을 걷고 포토존에 몸을 세웠다.
따라붙는 셔터음과 플래시가 나쁘지 않았다.
‘효신 누님도 도착했고, 상원 형님도······. 진짜 오랜만에 다 보겠네.’
앞서 태화가 참석했던 자잘한 시상식엔 여러 인물이 모였으나 아는 이는 드물었다.
연차가 훌쩍 높은 이들이 초대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감독과 작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행사장에 있는 이들은 경력이 보송보송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상식에 참여해 적당한 차기작을 지닌 감독이나 작가를 물색하던 태화가 번번이 실패한 이유였다.
‘가능하면 여기서도 괜찮은 작품을 지닌 사람이 없나 찾아보고 싶지만······. 일단 인사가 먼저니.’
생각의 많은 부분을 연기가 차지하고 있다곤 하나 태화도 ‘어느 정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았다.
오늘은 감독이나 작가보다, 그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쟁쟁한 동료들과 관계를 다녀두는 게 중요했다.
‘작품은 혼자 찍는 게 아니니까.’
물론, 그 행동에 사심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아, 이태화 배우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늘 2부 중에 저희 스텝이 배우님을 마중 갈 텐데······,”
이번 시상식도 전년도와 같은 장소에서 이뤄졌는데, 태화가 앉은 위치는 중간 복도 근처에서 상당히 앞줄로 바뀌었다.
전년도 남우주연상 수상자로서 올해 수상자 발표를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앞쪽에 위치한 이들 대부분 사정이 비슷했던 터라 까마득한 원로 배우도 있었고, 전년도 조연상을 수상했던 남녀배우도 눈에 띄었다.
‘짧은 한마디만 하면 된다라······. 이번엔 실수하지 않겠지,’
태화 또한 후보자 중 한 명으로 포함된 탓에 읽는 부분은 진행자에게 맡겨졌다.
때문에 해야 하는 멘트도 시상 바로 전 긴장을 완화시키는 정도가 전부였고, 따로 준비할 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그도 작년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따로 대사를 짜지 않았으리라.
‘일단 또 다른 부끄러운 일만 만들지 말······. 그런데 저번 시상식 멘트를 정말 보여주려나? 작년엔 안 보여줬으니 올해도 넘기려면 넘길 텐데.’
가능성은 없어도 약간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태화는 주변에 앉은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
1부의 마지막에서 인기상을 수상한 태화는 편한 마음으로 공연을 관람했다.
창룡제가 주연상 예정자에게 인기상을 주는 일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이번엔 정말 즐기는 사람 1이 될 거란 생각에 태화는 카메라가 비추지 않은 틈을 타 앞에 앉은 심봉호 감독과 약간의 친목을 다졌다.
“이태화 배우님.”
“네.”
자신을 부르는 스텝을 확인하고 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화려한 앞과 달리 정리가 부족한 전선과 날카롭게 곤두선 촬영진이 그를 반겼다.
‘이쪽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니, 내가 진짜 촬영이 고픈가 보네.’
촬영을 마친지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런다며 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은 예정작이라도 있다면 심적으로 편했을 텐데, 내년 기억날만한 작품이 하나 없다는 게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이러다가 내 앞에 아니라 BGA로 간 오디션 정보까지 요구할까 봐 걱정······.’
“태화야, 준비 다 됐어?”
“준비랄 것까지야 있나요.”
배우를 돕기 위해 무대 뒤쪽으로 온 현규가 정장이 어딘가 구겨진 곳은 없는지, 타이는 삐뚤어지지 않았는지 살폈다.
“괜찮네. 사진 한 장만 찍을게.”
“네.”
태화는 자신을 향하는 스마트폰의 렌즈를 보며 웃었다.
자신 대신 열심히 공식 계정을 꾸리는 매니저를 위해 이 정도는 하는 게 당연했다.
사진이 마음에 들게 찍혔는지 현규는 긴장한 와중에 조금 미소 지었다.
“그럼 긴장하지 말고 잘······.”
“이태화 배우님! 이제 들어가셔야 합니다!”
“저 가볼게요.”
“그래.”
스텝의 다급한 부름에 태화는 발걸음을 옮겨 무대로 향하는 입구로 향했다.
신호가 오면 천천히 들어가시면 된다 이야기하는 스텝의 얼굴엔 ‘실수하면 안 된다’라는 글자가 긴장이란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오늘 좋은 무대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네? 네. 이쪽이야말로 오늘 시상식을 빛내 주셔서 감······. 아,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의 뜬금없는 인사에 당황과 기쁨이 섞인 표정을 짓던 스텝은 곧 이어폰으로 흘러들어온 신호를 듣고 프로의 얼굴로 태화를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태화는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당당하고 여유 있는 걸음으로 통로를 지났다.
인기상을 받았을 때 올라왔던 무대가 새로운 각도로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 회 남우주연상의 주인공, 이태화씨가 이번 시상을 도와주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태화입니다.”
그의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우들 뒤편에서 환호가 터졌다.
자신을 반겨주는 이들의 환성에 태화는 미소로 답했다.
“아까도 뵈었는데, 잘 지내셨나요?”
“네. 작년과 올해에 걸쳐 같은 상으로 초대장을 받을 줄 몰랐는데, 기쁘네요.”
태화가 잔잔하게 웃자 마주 보고 있던 진행자도 미소를 돌려줬다.
물론 그 미소의 의미가 ‘이제 시상식 본론으로 넘어가자’란 의미는 아니었다.,
“그럼 이태화 배우님의 지난 시상식 소감 보고 가실까요?”
“그런 건 안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깔끔한 진행자의 멘트에 태화는 곤란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진심이 묻어난 탓일까, 장내엔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아름다운 밤이네요······.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잊기 힘든 그의 흑역사가 큰 화면으로 생생하게 송출됐다.
그가 했던 실수, 신인다운 풋풋함이 그대로 묻어나 사람들을 향수에 잠기게 만들었다.
“저 당시엔 세련된 절제미가 있었는데, 오늘은 화려하시네요.”
살짝 눈가를 붉힌 태화를 위해 진행자는 소감과 관련된 이야기 대신 의상과 화장에 대해 언급했다.
3년 동안 영화와 드라마로 단련된 태화도 곧 부끄러움을 지우고 평정을 되찾았다.
“분위기를 바꾸는 게 제 특기라서요.”
귀걸이를 하지 않았다뿐이지, 오늘 화장과 분위기가 ‘협력자들’의 한상일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짧은 담소를 마치고, 드디어 진행자가 수상자의 이름이 담긴 카드를 열었다.
“협력자들, 박현호,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