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8
‘진짜 지쳤다······.’
어쩐지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마무리되자 태화도 한시름 놨다.
중간중간 전 직장에도 연락한 터라 이제 드라마에만 신경 쓰면 됐다.
“태화 오빠, 오늘 고마워요! 왠지 잘 찍힌 거 같아!”
“어디쯤 사시죠? 신세도 졌는데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역도 바로 앞이니 사양하려던 순간, 작은 진동이 울리며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제작 팀이었다.
“태화 씨, 작가님이 지금 막 6화까지의 대본 보내 주셨는데 혹시 확인하셨어요?”
바다 역을 맡은 유라도 당연히 연락을 받고 그에게 물었다.
아직 문자도 제대로 읽지 못한 태화와 달리 그녀의 화면엔 이미 대본으로 보이는 글들이 떠 있었다.
“잘됐네! 같이 가서 연습하고 가요!”
“하모. 돈도 많이 못 드리는데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는 게 맞겠제.”
“매니저가 취소 못 하게 미리 시켜야겠다. 통통아, 넌 피자가 좋아, 치킨이 좋아?”
“반반무! 간장!”
“언냐, 그건 대접받는 사람이 골라야지. 태화 씨는 뭐가 좋아여?”
벌써 가는 걸로 결정 난 건지 유라를 제외한 멤버들은 한마디씩 거들며 그에게 물었다.
매니저나 유라가 말려도 들을 기색은 없어 보였다.
“아, 그럼······.”
모여드는 시선에 태화는 슬쩍 웃었다.
축복이 있으니 혼자서도 충분히 연습 가능하지만, 미리 여주인공과 맞춰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라면, 괜찮을까요?”
그리고 라면은 원래 남이 끓여 주는 게 더 맛있었다.
태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소연은 배달 음식이 물 건너 간 것이 아쉬운 눈초리였고, 주아는 별생각 없어 보였으나 나머지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淘?!(응큼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새빨갛게 익은 통통의 목소리가 공원에 메아리쳤다.
────────────────────────────────────────────────────────────────────────다른 신의 후원
‘아침, 아니, 점심인가······.’
태화는 부스스한 머리로 창밖을 내다봤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더니 머리가 멍했다.
“아- 아-. 완전히 잠겼네.”
몇 번 목소리를 내 보던 그는 가라앉은 자신의 음성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가상의 공간에서만 연기를 펼치다 보니 오랫동안 육성으로 말하는 일이 적어졌다.
그 결과 유라와의 연습 후 술 한잔 걸치고 돌아온 여파가 아침까지 남아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4시간 연습한 것 가지고 이 상태는 좀 심하잖아.’
일단 목부터 축여야겠단 생각에 태화는 침대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음주는 계획에 없었는데 ‘좋은 과실주를 선물 받았으니 같이 마시지 않겠냐’는 주아의 권유에 그만, 두어 잔 걸치고 말았다.
그녀의 말대로 술은 참 맛있었다.
병당 고작 3만 원 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향긋했으며 병 사진을 따로 찍어 올 정도로 입에 맞았다.
‘아니, 그래도 촬영이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에서 음주는 좀 아니지.’
자신의 자제심을 꾸짖으면서도 후회는 없었다.
복분자가 정력에 그리 좋다 속살거리는데 남자 된 도리로 거절할 순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아, 오늘 나가신댔지.”
식탁 위의 종이를 보고서야 태화는 집에 자신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평일인데도 늦은 시각에 일어난 데다 혼자 빈둥거리는 꼴이 꼭 백수 같아 머쓱했다.
“아니, 그래도 어제 오늘 바빴고, 다음 주부턴 더 바빠질 예정이니까 좀 쉬는 의미······.”
누구한테 하는 것인지 모를 변명을 내뱉으며 냉장고를 열자 쪽지에 써진 대로 정갈하게 정리된 반찬이 태화를 반겼다.
왠지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멍하니 그릇을 보고 있던 그는, 시끄럽게 울리는 경고음을 듣고서야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태화는 책상 위에 놓인 쇼핑백을 보고 이마를 부여잡았다.
지금껏 잊고 있었으나 술김에 수고비 말고 받아 온 것이 더 있었다.
“······이건 어디에 쓰지?”
해머대용으로 써도 될 것 같은 토성을 형상화한 응원봉.
사인이 포함된 앨범 케이스.
형광색으로 ‘Saturday For Saturn’이라 적혀 있는 공식 티셔츠와 그 위에 그려진 다섯 개의 사인.
포교 활동이라며 그녀들이 건넨 팬 상품이었다.
‘······옥션에 팔까?’
잠시 유혹에 잠겼던 태화는 이내 머리를 흔들어 사심을 털어 냈다.
아무리 그래도 선물이라고 준 물건을 팔아 치우기엔 양심이 찔렸다.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작가의 입김인지 꽤 괜찮게 출연료 계약이 마무리된 데다 집에 들어온 덕에 쓸데없는 지출이 줄었다.
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보는 그에게 친필 사인을 팔아 얻을 비용은 그러다 잃을 신뢰에 비해 값지지 못했다.
‘일단 공개 동시에 기사가 몇 개 나간다고 했고······. 손해까진 아닌가.’
민태에게 수고비 명목으로 받은 돈은 대략 7만 원.
피팅 모델로 하루 일하는 것보다 못한 금액이었다.
원래 참여하기로 한 배우도 인지도를 목적으로 참여한 것이기에 책정된 금액이 적었거니와 새턴의 기획사 측에서 생떼를 부린 탓이다.
‘그쪽도 참 다사다난해.’
받은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드라마 홍보 겸 작성될 자신의 간단한 정보가 담긴 기사, MV 출연에 의한 인지도 증가를 생각하면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비율 생각하면 스카웃을 기다리는 게 나은데 이런 부분에선 좀 아쉽단 말이야······.’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했다고는 하나 개인이 홍보하고 관리하기엔 제한적인 부분이 너무 많았다.
잠시 복잡했던 생각을 털어 내며 태화는 팬 상품들을 쇼핑백에 정리한 뒤 어제 인쇄한 종이 뭉치를 바라봤다.
가람의 비중이 상당히 늘어난 대본.
그만큼 다른 역들의 비중이 줄었으며, 일부 단역과 조연은 배역 자체가 사라졌다.
‘그래, 이런 세계지. 약자는 얼마든지 밟아도 괜찮은 세계.’
MV에서 정당한 비용을 못 받은 것과 같은 이치다.
이름 한번 들어 보지 못한 배우는 오히려 새턴 같은 유명 걸 그룹과 출연하는 것을 감사하라는 의미.
참으로 불합리한 방식이었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각오한 일이니까.”
그도 여러 경쟁자들을 밟고 박가람이란 역을 쟁취했다.
비중이 늘면서 다른 이들의 기회조차 지워 버렸다.
이 화려하지만 냉혹한 연예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태화는 대본을 펼쳤다.
어제 부족했던 부분을 좀 더 갈고닦고 싶었다.
***
“이번으로 스무 번. 소모 시간은 대략 두 시간인가. 운동하고 발성 연습, 저녁엔 뮤지컬이나 한 편 보면 딱 맞겠네.”
제단에 도착한 태화는 아직도 많이 남은 하루를 떠올리며 할 만한 일들을 정리했다.
6편을 한 번에 묶어 입장하는 방식 탓에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만큼 암기력도 올라갔다.
‘······너무 맛들이면 위험하니까. 자제해야지.’
연습 후 조금씩 올라가는 수치들을 보면 눈이 즐거웠다.
현실 시간으로 따지면 10시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허기졌으니까.
그러나 너무 연기에 빠져 현실의 육체 관리를 소홀이해선 안 됐다.
‘가능하면 스턴트도 해 보고 싶은데. 액션 스쿨 쪽을 알아볼까······.’
그는 축복 덕에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심하며 제단 위에 올라섰다.
보상이 없었기에 확인 가능한 것은 동기화 정도와 재능의 숙련도뿐이었지만 이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특히 어려움 난이도에서 미묘하게 올라가는 동기화 비율을 볼 때면 묘한 승부욕이 피어올랐다.
“어느 정도 올랐으려나······. 응?”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1퍼센트의 상승을 기대하며 기둥을 응시하던 태화는 처음 보는 문구에 당황했다.
게임 업데이트도 아니고 뜬금없이 새로운 소식이 있다는 알람이 올 줄이야.
고정적인 거 같으면서도 이 축복이란 시스템은 은근히 수정이 많았다.
글귀를 누르자 또 다른 내용들이 기둥 위에 떠올랐다.
[불의 신 로키가 당신을 후원하길 원합니다.] [화로의 신 헤스티아가 당신을 후원하길 원합니다.] [신의 후원을 받으면 획득 가능한 재능이 늘어납니다.] [일부 신은 공물이나 특정 행동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후원?”
후원이란 단어 잠시 멈칫했으나, 생각해 보면 이 가상 공간도 ‘브라기의 축복’이란 이름의 후원이었다.
‘재능이 늘어난다는 건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목록이 다양해진다는 의미겠지?’
극작의 신 브라기.
시와 음악에 능한, 북유럽 신화에서 몇 안 되는 예술의 신.
예술의 신이다 보니 보상으로 나오는 재능들도 그와 관련됐다.
‘나쁘진 않지만 배우 생활로 따지면 미묘한 것들이 꽤 많았지.’
고를 게 없어서 받았던 가창뿐 아니라, 악기 연주, 작곡 같은 재능도 연기와는 조금 어긋난 게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태화는 기둥에 적힌 두 이름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로키와 헤스티아.
헤스티아는 처음 들었지만 로키의 경우 브라기에 대해 조사하는 도중 여러 번 언급된 신이었다.
“로키인가······.”
그다지 좋은 의미로 들어 본 것은 아니었기에 후원을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됐다.
단순히 불의 신이라 적혀 있지만 그보다는 장난으로 악명이 높은 신.
북유럽 신화에서 라그나로크를 일으킨 주범이기도 했다.
게다가 가볍게 수락하기엔 그의 성질과 공물이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설명이 마음에 걸렸다.
[로키에게서 개인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읽으시겠습니까?]“어······.”